많은 사람의 바람처럼 나도 여행자가 아닌 생활자로 이국의 땅에서 머물며 일하는 것을 꿈꾸고 상상했다. 몇 해 전, 운 좋게(?) 외국인 노동자 신분으로 중국의 신도시에서 8개월간 머무르며 일하고, 먹고, 살았다. 시작할 때까지만 해도 나의 앞날이 어떨지도 모른 채 꿈이 현실이 된 아이처럼 마냥 신나고 설렜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고 낯선 땅에서의 생활에 지쳐갈 때쯤 그 ‘신남’은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그 이국의 땅에서 내가 향할 곳은 사무실이 아니라면 호텔뿐이었다. 내가 8개월간 집을 삼아 살았던 곳은 글로벌 체인의 아담한 비즈니스호텔이었다. 월드 와이드 스타는 아니지만, 그들처럼 집이 아닌 (비즈니스) 호텔에 살며 외노자의 고단한 일상을 이어갔다. 카드 키를 긁어 문을 열고 들어가면 카펫과 커튼에 밴 텁텁한 공기가 나를 맞이했다.
온종일 창문을 열어 놔도 손바닥만 한 호텔 창문에게 완벽한 환기를 기대하긴 어려웠다. 그 냄새가 싫어 디퓨저도 사다 놓은 지 한참이지만, (금연 룸임에도) 담배 냄새, 먼지 냄새, 이전의 숙박자들이 남겨 놓은 강력한 체취들이 뒤섞여 도무지 해결이 되지 않았다. 이 지긋지긋한 외노자 생활이 언제쯤 끝날까? 달력만 보면서 지냈던 날들이 이었다.
시간은 흐르고 프로젝트가 끝나고 원래의 내가 살던 그 자리로 돌아왔다.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길었던 호텔의 날들이 내 삶에 박혀 조금씩 나를 바꾸었다. 호텔을 집처럼 살았던 날들이 지나가고 나는 분명 예전의 나와 달랐다. 살아가는 방법도, 사람을 대하는 방식도 말이다.
모두에게 좋은 사람이 되려고 연연하지 말 것
장기 투숙자가 되어 보니 이 세상에 얼마나 다양한 사람들이 호텔에 존재하는지 새삼 깨달았다. 사실 옆방에 누가 묵는지 알 수는 없다. 다만 가끔 들려오는 크고 작은 소리 또는 냄새로 그들의 존재를 확인할 뿐이다.
술에 취해 내일이 없는 사람들처럼 싸우는 연인들, 밤늦게까지도 쿵쾅거리며 연습을 하던 체육 꿈나무들, 신입사원 연수를 왔는지 단체로 구호를 복창하던 젊은이들, 먹고 죽자 파티를 하는지 담배와 음식 냄새를 풍기던 아저씨 부대, 때로는 방 호수를 착각해 내 방문을 두드리던 취객까지… 나를 때로는 웃기기도 했고, 또 때로는 울게도 했고, 또 분노를 폭발하게까지 만들었다. 하지만 나는 옆방의 투숙객을 선택할 수 없다.
한때 나는 누구에게나 좋은 사람이고 싶었다. 그래서 참고, 양보하고, 속으로 삭였다. 어리석었다. 그래 봤자 남는 건 속병이고, 호구라는 타이틀뿐이라는 걸 많은 시간이 흐른 후에야 알았다. 무례한 인간들이 만들어내는 스트레스를 끌어안고 끙끙거리며 베개에 머리를 처박는 대신 전화기를 들어 프런트 데스크에 전화했다.
무례한 인간들에게까지 좋은 사람이 될 필요는 없다. 약은 약사에게, 호텔 내의 문제는 호텔 직원에게 맡기면 되는 일이다. 각자 자기의 역할이 있고, 그 분야에서는 그들이 전문가다. 흥분할 필요도 없고, 얼굴을 붉힐 필요도 없다. 직원이 문제에 대해 정확히 인지하도록 상황을 설명하고, 문제 해결을 요청한다. 거의 99%는 직원 선에서 해결했고, 안 될 경우 공안이 출동하기도 했다.
수많은 투숙객이 내 옆방을 거쳐 갔을 것이다. 좋은 사람도 있었을 테고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었다. 내 인생에도 많은 사람이 들고 났다. 잠시 스쳐 간 사람도 있고, 또 오래 머무르며 나에게 크고 작은 영향을 준 사람도 있다. 좋은 사람들에게 잘하기도 바쁜데 굳이 나와 다른 사람, 나에게 무례한 사람들에게까지 마음을 쓰는 것만큼 멍청한 짓이 없다. 적당한 거리를 두고 선을 그어 놓으면 덜 외롭고 덜 괴롭다. 호텔에 살며 깨달았다. 나에게 제일 중요한 건 타인과의 아름다운 거리라는 것을.
감당할 수 없을 만큼의 짐을 늘이지 말 것
사람은 한곳에 정착하면 짐이 늘어나게 마련이다. 처음 25인치 캐리어 하나로 시작한 이국의 생활은 어느새 29인치 캐리어까지 더해져 짐이 두 배가 넘어 버렸다. 외국인 근로자라 종종 한국으로 휴가를 가거나, 중국의 다른 도시나 아예 다른 나라로 해외 출장을 갈 때면 방에서 짐을 빼야 했다. 최소 한 달에 1~2번 이상은 짐을 싸고 푸는 날들이 이어졌다. 짐을 쌀 때도, 짐을 풀 때도 이게 뭐 하는 짓인가 싶었다.
나도 한 때 동료들처럼 외로움을 쇼핑으로 풀었다. 특히 한국과 비교하면 각종 물품을 절반도 안 되는 가격에 구매할 수 있는 ‘타오바오’라는 개미지옥에 빠져 허우적거렸다. 집 없는 민달팽이 주제에 욕심을 내며 이것저것 불필요한 물건들을 이고 지고 살아가다 압사당할 뻔했다. 나는 언제라도 떠날 사람이다. 이 생각을 한 후 짐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한바탕 크게 짐을 정리하고 나서부터는 용암처럼 끓어오르는 물욕이 저절로 잠잠해졌다. 짐을 쌀 때도, 짐을 풀 때도 한결 가볍고 쉬웠다.
머리와 어깨를 짓누르던 각종 인생의 짐을 내려놓게 된 것도 그때였다. 사람이 사는 데 필요한 물건은 생각보다 많지 않다. 없어도 사는 데 지장이 없던 물건들을 편리하다는 이유로, 예쁘다는 이유로, 있어 보인다는 이유로 짊어지고 살았다. 없으면 없는 대로 살아도 크게 지장이 없다. 호텔에 살며 깨달았다. 사는 환경도, 생활 방식도, 인간관계도 간결하지만 집중도 있게 사는 것이 분명 나에게 더 잘 어울린다는 것을.
늘 함께 하는 걸 소중히 여길 것
외노자로 살며 참 많은 호텔을 떠돌았다. 대도시의 최고급 호텔부터 제3세계 오지의 이름만 호텔인 허름한 여인숙까지… 지금까지의 인생에 있어 호텔 경험치가 가장 많이 쌓인 시기다. 중국에서 출발해 한국에서 환승한 후 다시 피지에서 한 번 더 환승, 마지막으로 바누아투까지 왕복하는 출장을 간 적이 있다. 보름간의 일정을 마치고 돌아올 때쯤에는 몸이 떡이 되었다.
올 때와 달리 복귀할 때는 홍콩 공항에서 환승해야 했다. 악명 높은 홍콩 공항의 비행기 체증(?) 때문에 비행 스케줄이 꼬여 예상치 않게 상해에서 1박을 해야 했다. 급하게 잡은 상해 푸동 공항 근처의 호텔에 들어섰을 때는 이미 자정을 넘긴 시각이었다. 상해까지 오기 전 이미 공항과 비행기에서 보낸 시간을 합치면 거의 48시간 이상을 버틴 몸이었다. 호텔 방에 들어서자마자 곤죽이 된 몸을 침대 위에 내동댕이쳤다. 그리고 천장을 바라보며 멍하니 누워 생각에 잠겼다.
나는 왜 이 시간에 상해에 불시착했지?
나는 여기서 뭐 하는 거지?
빨리 집에 가서 쉬고 싶다.
그때! 내가 집이라고 떠올린 곳은 신기하게도 한국의 진짜 우리 집이 아니었다. 내가 몇 개월간 적을 두고 사는 중국 중남부 소도시의 그 호텔 방이다. 문을 열면 카펫과 커튼에 이전 투숙객들의 체취가 켜켜이 쌓인 그 방. 손바닥만 한 작은 창으로 겨우 환기를 시키던 그 방. 설날 밤새도록 터지는 폭죽 소리에 잠을 못 이루던 그 방. 매일 아침, 사과와 두부 샐러드로 셀프 조식을 먹던 그 방 말이다.
분명 당시 내가 누워있던 상해의 호텔 방이 훨씬 더 크고 고급이고 깔끔한데도 허름한 그 비즈니스호텔로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이런 생각하는 나 자신이 어처구니없어 침대 위에서 혼자 히죽거렸다. 어디든 오래 살면 그곳이 집이 된다. 중국의 내 집은 그 호텔이었던 것이다.
지긋지긋하다고 생각한 그 허름한 비즈니스호텔을 그리워하는 나를 보니 여러 생각이 밀려왔다. 그간 내 곁의 사람들, 나를 향한 친절, 나를 위한 배려 등등 모든 것이 당연하다고 여겼던 날들이 떠올랐다. 떠나 봐야 알게 된다. 없어 봐야 알게 된다. 공기처럼 존재하는 것 중 당연한 건 세상에 하나도 없다. 익숙함에 속아 소중한 걸 잃지 말자.
그로부터 몇 개월 후 외노자로서의 모든 임무를 마치고 한국으로 귀국하는 날. 공항으로 가기 직전 호텔 방에 놓고 가는 물건이 없는지 구석구석 살피며 참 많은 생각이 교차했다. 이 작은 방에서 혼자 외롭게 웃고 울었던 날들이 영화 필름처럼 스쳐 지나갔다. 그 날들이 쌓여서 난 한 뼘쯤은 마음의 키가 더 커졌고 마음의 근육도 좀 더 탄탄해졌다. 짐을 다 빼고 마지막으로 문을 닫기 전 마음으로 말했다. 고맙다 호텔 방아. 그동안 날 쉬게 해 줘서. 그리고 내 집이 되어줘서.
원문: 호사의 브런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