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여간 죄다 빼버리면 알맹이는 요만하다니까.
추석이나 설 같은 명절 때마다 들리던 엄마의 볼멘소리. 나는 그 안에 든 스팸이나 참치 같은 알맹이 말고는 현관문 앞에 쌓여가는 재활용 봉투 더미에는 관심이 없었다.
연휴를 앞둔 지난주, 광화문역 퇴근길에는 손에 무언가 큰 보따리가 들려있는 직딩의 모습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었다. 물론 내 손에도 들려있었다. 그 큰 보따리로 사람들에게 치이고, 나도 보란 듯이(?) 내 보따리로 사람들을 치면서 그렇게 민망한 퇴근길을 겪었다.
치레라고 하기엔
단단하고 반듯한 네모난 상자에, 훼손을 막기 위해 내용물을 본뜬 커다란 스티로폼으로 마음의 크기를 가늠하는 시대. 선물의 종류는 대개 오랜 기간 보관이 가능하고, 호 불호가 거의 없는 스팸이나 참치 같은 ‘캔’에 든 먹을거리가 대부분이다. 커다란 스티로폼 더미에서 ‘꺼내고’, 캔에서 ‘꺼내야’ 비로소 알맹이를 볼 수 있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그렇게 버려진 쓰레기 더미가 과연 재활용되어 순환할지, 아니면 우리가 초딩 때부터 배워 온 ‘썩으려면 몇만 년이나 걸리는 쓰레기’로 전락해버릴지 기회비용을 따지자면 치레라고 하기엔 치러야 할 것이 어마하다. 단순히 배 보다 배꼽이 크다는 정도로 우습게 넘어갈 정도로 간단하지 않다.
자료(상단)에 따르면 실제로 포장재의 약 70%는 폐기물이 되어 자원 낭비와 환경오염의 주범이 된다. 2009년 환경부가 내놓은 통계에서는 생활폐기물 중 포장 쓰레기가 무려 32%(중량 기준, 부피기준으로는 50%)를 차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서울은 사정이 더 심하다. 대한민국 면적의 0.6%에 불과한 서울의 생활 폐기물 배출량이 전국 배출량의 19% 이상을 차지한다. 인구 밀도가 높아서 그렇다 치자. 그렇다면 대체 이 많은 쓰레기는 어디로 가는 것일까. 쾌적한 지금의 월드컵공원이 쓰레기 더미를 덮어 만든 것이라고 하면 누가 믿기나 할까. 그런데 진짜다.
환경뿐 아니라 이 쓰레기를 처리하는 데 사용되는 비용과 시간 또한 만만치 않다. 제2의 난지도 공원을 만들면(만들어야 하면) 그제야 생활 쓰레기의 심각성에 대해 알게 될까. 훗날 우리 후손이 난지도에서 발견된 쓰레기 더미를 연구하다가 ’20세기 사람들은 라면만 먹고살았다더라’할지도 모른다는 웃지 못할 농담은 걍 여담
세상은 ‘친환경’ 제품이 열풍인데, 정작 그것들은 환경에 ‘친화적’이지 않다니 아이러니하다. 비단 명절뿐 아니다. 과대 포장에 드릅게 웃픈 해프닝을 종종 겪으며, 어느 누군가는 이제 실속 있게 살자고 재미난 일을 구상했다.
포장지 없는 슈퍼마켓
2014년 9월, 독일 베를린에서 포장지 없는 슈퍼마켓 ‘오리기날 운페어팍트(Original Unverpackt)’가 최초로 문을 열었다. 독어인 듯 영어인 듯 낯설지 않은 스펠링에서 짐작할 수 있듯, unpacked 제품을 판매하는 슈퍼마켓이라고 한다.
슈퍼마켓을 이용하는 방법은 간단하다. 본인이 덜어 갈 용기를 가져가거나(웹사이트엔 안경 케이스도 활용이 가능하다고 되어 있다), 재활용 가능한 백이나 병을 구입하면 된다. 사실 담아가는 것이라서 곡물이나 견과류 정도만 판매할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온라인 쇼핑몰에는 소다나 세척제 같은 생활용품도 종이 포장지에 담겨 있는 상태로 판매한다. 아마 오프라인 몰도 가능하지 않을까 싶다.
독일의 움직임에 가만히 있을(?) 뉴욕이 아니다. 뉴욕은 같은 콘셉트의 ‘필러리(the Fillery)’를 열었다.
여기도 방법은 비슷하다. 담아갈 용기를 선택하고(심지어 창의적(?)으로 생각하라고 한다. 기상천외한 것이라도 담아갈 수만 있다면 된다는 것. 안경케이스 말고 또 뭐가 있을까), 담아갈 용기의 중량을 재고(가격에서 제외하기 위해), 원하는 것을 채워 그만큼의 가격을 지불하면 끝이다. 특이한 점은 병을 기부하면서 후원이 가능하다는 것.
필러리의 미션은 로컬푸드를 바탕으로 공정한(합리적인) 가격으로 소비자에게 안성맞춤인 식재료, 패키지를 뺀 지구를 위한 제품을 판매하는 것이라고 한다. 아마 다른 곳도 비슷한 미션으로 운영할 것이다.
웹사이트를 둘러보다가 순간 멈칫했다. 2050년에는 바다에 떠다니는 플라스틱의 양이 물고기 수 보다 많게 될 수도 있다니. 내 나이에 대략 30살을 더해보니 그리 먼 이야기 같지가 않다.
이때다 싶었는지 파리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비슷한 콘셉트의 ‘비오콥21(Biocoop 21)’을 시범적으로 개점했는데, 호응이 좋아 운영 기간을 연장하기도 했다고 한다.
이웃나라 영국도 동참했다. ‘언패키지드(Unpackaged)’는 유기농 제품을 포장 없이 판매한다. 설립자는 물건 값 50파운드 중 약 8파운드가 포장에 쓰인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창업을 결심하게 됐다고 밝혔다.
여기에 우리나라도 드디어 제로 웨이스트(Zero Waste) 운동 대열에 합류했다. ‘더 피커(The Picker)’라는 곳으로 하태하태한 성수동에 있다고 한다. 식재료 판매 말고도, 직접 요리를 제공하는 그로서리(grocery store) 형태의 상점이라고 한다.
필요한 만큼 담아가는
Renew 새로 쓰고
Reduce 줄이고
Return 오래 쓰고
Resycle 모아 쓰고
Reuse 다시 쓴다
이런 가치를 담은 슬로푸드 국제대회 5R Market. 얼마 전 슬로푸드 국제대회에 다녀왔다. 워낙 관심 있는 분야이고 집과 가까워서 해 마다 가는 곳이다. 올해는 작년까지 볼 수 없던 5R마켓을 볼 수 있었다.
작년에 와디즈를 통해 우리나라의 ‘더 피커’의 소식을 듣고, 제로 웨이스트에 관련된 다양한 사례에 관심을 두었다. 이곳에서 보다니. 차일피일하다 더피커에 직접 가보진 못하고 잊었는데, 우연히 슬로푸드 국제대회에서 만났다.
이용 방법은 병을 골라 원하는 곡물이나 견과류를 고르면 된다. 시범 마켓이라 종류가 많지 않았다.
현미와 호두+해바라기 씨앗을 담아보았다. 저 병은 이것저것 담거나, 내년에 담을 피클이나 과일청을 나눌 때도 유용하게 쓰일 것 같다.
일회용 젓가락, 숟가락은 빼주세요
사실 당장 모든 것이 바뀌길 기대하는 건 무리가 있다. 실제로 병이 얼마나 재사용되거나 순환될지도 모르는 일이고, 불편한 이용 방법 때문에 얼마나 확산될지도 모르는 일. 벌크 단위의 유통도 원활해야 하는데 이마저 쉬울 리 없다. 사실 당장 나만 해도 일회용으로 적당히 소분된 것에 익숙하고, 선호한다.
그렇지만 이제 천천히 진지하게 생각해볼 만한 문제인 것은 확실하다. 꼭 큰 실천만이 지구를 살릴 수 있을까. 일상에서 아주 작은 행동도 가능할 테다. 이 글을 보는 분들만이라도 배달 음식을 시켜먹을 때 부득이한 경우를 제외하고 ‘일회용 젓가락, 숟가락은 빼고 주세요.’라고 말한다면 조금 더 나은 세상이 올 수도 있다고 믿다. 아마 더 작은 실천 방법이 있을 것이다.
우리 모두가 정의감에 가득 차서 지구를 아끼는 환경운동가가 된다면 좋겠지만, 그때까지 아무것도 하지 않고 마냥 기다리기만 하면 어쩌면 정말 늦을지도 모른다. 선물 포장을 뜯다가 머리를 쥐어 뜯을 당신께 이 글을 바친다.
원문: 오가닉씨의 브런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