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비 부담이 큰 한국에선 교육비 부담을 최소화한 나라를 동경하는 이들이 많다. 시쳇말로 무상교육이다. 교육 기회의 평등이라는 관점에서 무상교육은 정당성을 갖게 된다. 없는 집 자식도 돈 걱정 없이 교육을 받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관념도 그 역사가 그리 길지 않다.
개인 부담 공교육비가 아주 적고 이를 위한 세부담 찬성 여론이 매우 높은 스웨덴의 경우, 교육비 부담을 낮추는 일이 처음부터 열렬한 환영을 받은 것은 아니었다. 1930년대, 블루칼라 계급은 고등교육 자체에 대한 반감이 컸다고 한다. 나와는 상관도 없고 잘 사는 이들에게나 해당하는 교육에 대한 공적 지원은 부당하다는 불만이다(이 기록에 대한 출처를 잊어버려 기억에 의존해 쓴다).
생각해보면 교육은 역사적으로 특권층의 전유물 같은 것이었다. 먹고살 걱정 없고 시간이 남아도는 (주로 남자인) 왕족과 귀족들, 아니면 이들로부터 후원을 받는 (신분이 좀 낮은) 천재들이 공부하고 지식을 쌓았다. 시간이 흘러 산업혁명이 일어나고, 세금과 복지를 비롯한 사회제도들이 발달하는 과정에서 교육은 (성별을 불문하고 누려야 할) 보편적 권리라는 인식이 자리를 잡아간다.
하지만 이 교육받을 권리는 여전히 과거의 흔적으로부터 자유롭지 않다. 일부 특권층의 전유물인 시대는 지나갔지만, 소득과 교육 기회의 향유는 밀접한 상관이 있다. 영국을 예로 들면 1분위(하위 10%)부터 10분위(상위 10%)까지 교육예산의 사용량은 소득에 비례한다. 상위층으로 갈수록 공적인 교육비 혜택을 더 많이 보고, 그만큼 교육 기회도 더 많이 갖는다. 자기 돈으로 시키는 교육이 아니라 이미 공교육에서 소득에 따라 교육이 불평등해진다.
한국은 영국보다 더 심하다. 영국의 경우 재정지출의 교육 수혜를 많이 보는 1등부터 4등까지의 소득분위가 차례대로 8·9·10·7분위인 반면, 한국은 정확하게 1분위에서 10분위로 갈수록 교육 수혜 금액이 늘어난다. 흔히들 사교육비에서 소득에 따른 교육(비) 격차가 발생한다고 생각하지만, 공공의 교육예산도 사교육비와 똑같은 불평등이 나타난다.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이것이 영국과 한국만의 현상은 아닐 것이다. 계층 간 교육 격차가 큰 미국은 말할 것도 없을 것이고, 유럽은 전통적으로 블루칼라와 화이트칼라의 계급이 세대를 넘어 이어지는 경향이 있다. 많이 약해졌겠지만 완전히 사라지긴 어렵다. 어느 나라가 됐든 부모의 교육 수준이나 직업 및 소득은 자녀의 진로에 큰 영향을 미치기 마련이다. 통계적으로는 부모가 대졸 이상일 때 PISA 점수가 더 높게 나오는 국제적 경향이 있다.
한국의 경우 부모의 학력에 따른 자녀의 학업 성취도(PISA 점수) 차이가 가장 적은 편이고, 대학 진학률은 가장 높다. 이것만 보면 교육 기회의 평등성이 높기에 긍정적인 모습이지만, 소득에 따른 재정지출의 교육 수혜를 보면 명징한 계단식 불평등이 나타난다. 여기에 여타보다 심각한 사교육비의 격차가 추가된다.
교육은 이중적이다. 서열과 신분의 전복을 일으킬 수도 있고 오히려 그것을 강화할 수도 있다. 전자의 효과를 기대하며 공교육 비용을 세금으로 처리하지만 그 수혜는 소득이 높을수록 더 많이 입는다. 단지 교육을 통해, 그 과정에서든 과정을 거치고 난 이후에서든, 평등성을 높이는 것은 처음부터 한계가 있다. 다만 지나친 불평등을 제어하는 것은 직관적으로 올바른 일일 것이다.
일반고와 특목·자사고의 분리는 교육의 효율성을 목적으로 처음부터 형식적인 평등성을 배제한다. 특목·자사고를 줄이는 것은 지나친 불평등을 제어하자는 취지에서 정당성을 획득한다. 어디까지가 지나친 불평등이고 용인 가능한 불평등인지는 회색 지대에 있으므로 대립과 논박이 불가피하다.
나는 특목·자사고를 다 없앨 필요는 없다고 보지만, 적을수록 좋다는 입장이다. 이런 유형의 교육 기관은 저 왕조, 봉건시대 특권층의 전유물이었던 교육을 현대로 불러오는 부작용이 있다. 하지만 일반고를 확대하려는 이유가 단지 교육의 평등성 강화는 아니었으면 한다.
어릴 때부터 다양한 환경의 사람들과 어울리고 부대끼는 것이 교육에 이롭다는 생각이다. 일반고에서 이런 어울림이 아주 잘돼왔다고 볼 수는 없겠지만, 청소년기부터 특히 성적이나 부모의 소득을 기준으로 공간 자체가 분리되는 것은 그 반대보다 바람직하지 않다는 생각이다. 다양한 능력과 취향의 사람들이 서로 배려하고 조화를 이루며 사는 법을 어릴 때부터 익히도록 돕는 것이 교육의 변함없는 목적이 돼야 한다.
스웨덴의 경우, 어린이집 등 보육 기관 확대의 주요 명분 중의 하나가 유년기부터 집단생활을 함으로써 올바른 관계를 맺는 능력이 길러진다는 것이었다(부모가 아이를 길러야, 사실상 엄마가 집에서 양육을 담당해야 아이와 부모 모두에게 좋다는 보수파의 주장을 반박하는 내용이다).
특목·자사고도 집단생활이기는 하지만 구성원의 다양성이 부족하다는 결함이 있다. 일반고의 다양한 구성원이 꼭 좋은 교육환경이라고 볼 수만은 없겠지만, 이것은 이런 조건 하에서 어떻게 교육의 질을 높일 수 있는지 고민해야 할 문제이지 다양한 사람을 접할 수 있는 교육환경 자체가 문제는 아닐 것이다.
앞서 말했듯, 교육은 이중적이다. 사회적 서열과 신분을 역전시킬 수도 있고, 강화할 수도 있다. 교육을 받는 과정에서든 그 이후에서든 교육 불평등은 피할 수 없다. 평등한 교육을 위해 노력을 해야겠지만, 그것을 이상향으로 삼거나 단순히 기회균등을 최고의 가치로 내세우는 것은 현실과 동떨어진 이야기다. 원초적으로 교육에 내재된 불평등을 인정하는 가운데 대책을 강구하고 조치를 취해야 한다.
교육 불평등의 완화 방안 중 한국에서 정말 잘 안 되는 것이 세금과 복지라는 사회제도다. 교육 수준이 높고 사회적 지위와 소득도 높은 이들에게 세금으로 학비를 (설사 본인이 원치 않더라도) 거의 전액 지원해주었다가 나중에 높은 세금으로 환원받는 것이 교육 불평등에 따른 사회적 갈등을 완충하는 유효한 방안이다. 재정 지출의 교육 수혜를 더 많이 받고 벌이도 더 좋은 이들로부터 걷은 세금으로, 그 반대편의 사람들에게 더 많은 복지가 가도록 하는 것이다.
영국의 경우, 소득 불평등이 심한 편이고 복지도 유럽의 선진국으로선 아주 좋다고 할 수 없지만, 한국보다 고소득층에게 세금을 더 많이 걷고 저소득층에게 (교육을 제외한) 복지도 더 많이 한다. 그리하여 전반적으로 소득이 높을수록 전체 복지혜택은 작아진다. OECD 기준에 따라 교육을 복지에서 제외한다면, 복지의 하후상박이 더욱 강화된다(통계적으로 볼 때 이런 건 북유럽 국가들이 제일 잘한다).
한국은 OECD에서 저소득층 복지가 가장 취약한 나라 중의 하나다. 저소득층일수록 이로운 복지의 하후상박이 미진하고 절대량도 부족하다. 교육을 복지에 포함하면, 아예 소득에 역진하여 복지가 이뤄진다. 전 구성원에 걸쳐 세금의 양이 작다는 특성도 있다. 임금 격차가 OECD 최대 수준인 것은 두말하면 입 아프다. 이런 사회구조 하에서는 교육의 형식적인 평등을 강조하는 주장과 그 주장의 현실적 모순을 탐탁지 않아 하는 주장이 첨예하게 대립하기 마련이다.
교육의 문제는 교육 외부에서부터 접근해야 풀 수 있음을, 사실은 누구나 다 안다고 생각한다. 교육 외부의 묵은 고질병들이 여전하니 교육 내부의 고질병들도 여전하다. 교육을 둘러싼 날 선 갈등이 끊임없이 벌어진다. 교육 스트레스는 기실 어느 나라에나 있겠지만, 한국은 분명 최대의 인원이 최고의 스트레스를 받는 나라에 꼽힐 것이다. 갈등의 기폭제로서의 교육이 아닌, 어울려 살기 위한 장치로서의 교육을 꼭 좀 봤으면 한다.
원문: 장제우의 페이스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