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쉬움 2.5에 읽을 가치 7.5라는 평을 하고 싶다. 책이란 본디 TMI라는 전제하에, 이 책은 괜찮은 TMI다. 이 책의 가장 큰 미덕은 저자 양승훈의 시선이다. 저자는 현재 경남대에서 사회학을 가르치는 연구자이자 질 높은 칼럼니스트인데, 대우조선해양의 경영관리 파트에서 5년간 근무했던 경험을 영민한 관찰자의 시선으로 녹여냈다.
저자는 대우조선이 본격적인 첫 직장이었고, 이전에는 제조업 현장에 대한 경험이 없었다. 그는 조선소 생산직 노동자들의 모습을 신기해하며 묘사하는데 (조선업은 아니지만) 공장 경험이 꽤 되는 내 입장에서는 지겨움 반, 웃음 반 감회(?)에 젖으며 흥미롭게 읽었다.
국민체조로 시작하는 조선소의 아침과 약간 민망한 느낌의 안전구호 복창(안전 점검 좋아! 안전 점검 좋아! 안전!), 기름과 땀으로 범벅된 노동자의 모습 등은 조선업과 산업도시를 이해하는 데 빠질 수 없는 퍼즐이다. 정기적으로 회사에는 부인 및 가족의 방문 행사가 벌어지는데 고된 노동의 흔적이 여실히 드러나는 남편의 몰골에 눈시울을 붉히는 일이 흔하다고 한다.
생산직과 사무직의 갈등, 현장 기술직과 설계 기술직의 갈등, CAD 설계 세대와 수작업 설계 세대의 갈등에 대해 책은 비중 있게 묘사한다. 이런 갈등은 저자가 내부에서 본, 조선업 위기의 주요한 원인이기도 하다.
대기업 정규직과 하청 노동자들의 괴리, 원청과 하청의 모순을 균형감 있게 서술하는 것은 책과 저자의 강점이다. 누구나 그렇듯 똑 부러지는 해법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편향적인 ‘악마화’를 절제한, 균형미가 돋보인다. 수도권 생활자였던 저자가 남해 바다 끝의 특수한 산업도시에 취업하고 겪게 되는 여러 일화에는 소소하면서도 날카로운 재미가 있다.
거제에서 배를 만드는 대기업에 다닌다는 것은 특히 생산직에게는 자부심이 가득한 일인데, 저자가 다녔던 대우조선의 경우에는 소개팅 자리마저 회사 작업복을 입고 나갈 정도라고 한다(근무 중 더러워진 옷을 퇴근할 때 새끈한 작업복으로 바꿔 입는다고 한다).
인천에선 보통 중년의 대우 정규직들이 회사 근처에서 (멀끔하지만 아재스러운) 작업복을 입고 다니는 것을 종종 볼 수 있는데, 신입 정규직들이 소개팅에까지 작업복을 애용한다는 말은 못 들어봤다.
무슨 옷을 입을지야 자기 자유이지만, “직영 소속이냐”는 질문이 일상적으로 통용되고 직영이냐 아니냐, 즉 대기업 조선소 정규직이냐 아니냐에 따라 거의 신분이 갈리는 듯한 기류가 있다는 이야기는 착잡함을 느끼게 한다. 저자는 ‘카스트’라는 표현까지 덤덤하게 사용한다.
조선업은 현장 노동자의 숙련이 매우 중요한 제조업인데, 원하청의 커다란 격차는 특히 하청에서 일자리의 안정성을 해칠 뿐 아니라 숙련의 성숙도 저해한다. 결국 격차 해소는 조선업의 경쟁력을 높이기 위해서라도 당면한 과제이다.
또 한국의 조선업이 향후 어떻게 될지 아직 정해진 것은 없지만 행여 좋지 못할 훗날을 대비해서라도 격차 해소에 힘을 쏟아야 한다. 한 기업 또는 산업이 쇠퇴할 때, 격차가 작은 나라와 큰 나라에서 그 파급은 상이하게 나타난다.
조선업의 부침이 언젠가부터 언론을 장식한 지 오래다. 전성기를 누릴 시절 한국은 수주량 기준으로 세계 1위의 조선 강국이 되었지만, 2008년 미국발 금융위기를 기해 세계 경제가 침체할 때 물동량이 줄며 한국의 조선업도 심대한 타격을 입었다. STX조선해양, 성동조선해양 등 중급 조선업체들은 이미 법정관리 상태이거나 그에 준하는 구조조정에 들어갔다.
대우조선, 삼성중공업, 현대중공업의 조선산업 ‘빅 3’는 불황 타개책으로 ‘해양플랜트’ 건조에 뛰어들었다. 쉽게 말해 석유를 시추할 수 있는 선박이다(책 속에 다양한 해양 플랜트 선박의 사진을 넣는 것이 독자의 이해에 도움이 될 것인데, 그냥 말로만 해서 센스가 부족하다고 느꼈다). 하지만 이 도전이 한국 조선업의 시름을 더욱 깊어지게 만들었다. 공기업 등 공공부문에서 저들처럼 돈을 썼다면, “지 돈이면 저렇게 막 쓰지 못한다”는 힐난이 나오기에 딱 좋은 사업 실패였다.
해양플랜트는 한국의 기업들이 기존에 만들던 선박과는 결이 많이 다르다. 훨씬 복잡하고 더 높은 기술력과 설계 능력을 필요로 한다. (국산화가 미진한) 자재의 조달도 전보다 어렵고, 기존 현장 노동자들의 (설계의 빈틈을 메우는) 세계적인 숙련을 그대로 활용하는 일도 어려웠다. 한국 조선업계의 역량이 떨어지는 것은 아니지만, 배라고 다 같은 배가 아닌 것이었다.
1970년대 이후 정말 ‘맨땅에 헤딩’으로 시작하여, 1990년대 말에 이르러 기어코 조선업을 세계 1위에 올려놓았던 ‘빅 3’는 과거의 신화에 사로잡혀 해양플랜트 사업 역시 맨땅에 헤딩하듯 시작했다. 하지만 부딪힌 땅이 너무 단단했다. 설계, 자재 조달, 현장의 작업, 부서 간 소통, 임원진의 리더쉽, 하청과의 관계 어느 것 하나 제대로 되지 않았다.
과거엔 어떻게든 됐던 것이 이제는 통하지 않았다. 사업계획은 다 틀어졌고 현장은 현장대로 아수라장을 방불케 했다. 고부가가치 제품, 바꿔 말해 비싸도 질이 좋아 팔리는 제품으로 승부를 봐야 하는 한국으로서는, 종전의 ‘하면 된다’ 방식으로는 실패하기 딱 좋다는 것을 해양플랜트 사업이 적나라하게 보여준 셈이었다.
『중공업 가족의 유토피아』는 조선업이 어떻게 부흥했는지, 해양플랜트 사업은 왜 실패했는지 핵심 내용을 잘 알려준다. 조선업의 흥망성쇠에 따라, 저자가 명명한 ‘중공업 가족’이 어떻게 흥망성쇠를 겪는지도 잘 추적한다. 사회학자의 미덕이 전해지는 대목이다.
책에서 크게 아쉬운 지점을 꼽는다면 글로벌 해양플랜트 사업의 역사와 현황이라든지, 앞서 해양플랜트 선박 건조와 그 경영을 성공시킨 해외의 사례들을 거의 거론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다른 나라의 해양플랜트 기업은 수십 년 축적된 경험이 있다거나 프랑스의 설계 엔지니어링 기업이 말레이시아의 노동력을 활용하려는 사례가 등장한다고 언급하는 게 전부다.
이런 쪽의 자료 조사에 더 신경을 써야 했다는 생각이 많이 들었다. 그래서 아쉬움 2.5에 읽을 가치 7.5. 아무튼 앞으로도 해양플랜트는 글로벌 수요가 있는 고부가가치 부문이므로 조선업계에서 모쪼록 심기일전하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조선업의 실적이 표면적으로 좋아진다고 해도 그 내부까지 전성기처럼 좋아진다는 보장은 없다. 거제는 제조업 중에서도 조선업에 특화된 특수 산업도시로 ‘남성은 돈벌이, 여성은 육아와 가사노동’의 보수적 가족 형태가 안착한 지역이다.
이것은 우리 사회의 바람직한 지향과 대치되는 사회구조다. 현재로만 보아도, 유토피아를 이룬 대기업 ‘중공업 가족’의 이면에는 야근과 특근의 외벌이로 4인 가족분의 중산층 생활비를 맞추는 대기업 노동자와 상대적인 저임금의 하청 노동자, 그리고 사회적으로 배제되는 (저임금) 여성의 이야기가 서려 있다. 이 같은 노동-가족-사회 구조를 개선하지 못한다면 거제와 조선업의 앞날을 밝게 예측하기는 어렵다.
일례로, 설계 및 엔지니어링 분야의 젊은 인재들은 성별을 불문하고 거제의 제조 대기업에 취직하기를 꺼리고 이는 책에서 잘 지적하듯 기술력 향상에 치명적인 장애물이다. 글로벌 경쟁력을 높이기 위해서는 보수적인 거제의 사회구조와 문화를 혁신해야 하고, 이 중심에는 여성의 노동시장 참여 활성화라는 과제가 있다.
기본 틀은 세금과 복지의 발전을 토대로 여성 인력의 활용도를 높이고 이를 통해 남성의 벌이 부담 및 노동시간, 격차를 줄이는 것이지만, 거제는 특수한 지역이라 세부적인 난관이 있으리라 예상한다. 도시의 크기가 작고 특정 제조업에 대한 의존도가 높을 때, 해외에서는 어떻게 여성의 노동시장 참여를 끌어내는지 더 많은 연구가 필요해 보인다.
저자가 근무했던 대우조선과 현대중공업의 인수합병 문제로 사회적 갈등이 고조되는 요즘이다. 『중공업 가족의 유토피아』는 올해 1월에 출간되었고 시기적으로 이 사안을 다루지는 않는다. 나는 조선업이나 합병, 회계에 문외한이므로 이에 대해서는 뭐라 할 말이 없다.
다만 어느 쪽의 시각이든 일방적 주장이나 ‘악마 만들기’가 득세한다는 인상을 받고 있다. 이 책은 그런 식의 고질적인 갈등 부추기기와 거리를 둔다. 덕분에 조선업과 거제에 대해서는 물론, 우리 사회에 대해서까지 차분히 생각해 볼 기회를 갖게 해준다.
저자는 공교롭게도 대우조선에 취직한 뒤, 그의 아버지가 젊은 시절 현대중공업 울산 조선소에서 일을 했었다는 말을 처음으로 들었다. 일을 찾아 전라도에서 울산으로 무작정 간 이야기, 머스마 여럿이 작은 방에 합숙했던 이야기, 경험도 없는 용접을 시켜서 해봤는데 보안경도 없이 용접하는 바람에 시력을 잃을 뻔했던 이야기를 들으며 아버지와 소주잔을 기울였다고 한다.
저자로서는 (아버지처럼 생산직은 아니지만) 조선소에 취직하고 그에 대한 책까지 쓰게 된 것이 운명적이라고 여겨졌을 것 같다. 운명처럼 세상에 나온 『중공업 가족의 유토피아』는 읽을 가치가 충분할 뿐 아니라, 앞으로의 저자에 대한 기대도 갖게 해주는 책이다. 뛰어난 관찰자로서 그 활약이 기대되는 저자 양승훈에게 흐뭇한 미소를 머금으며 박수를 보낸다.
원문: 장제우의 페이스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