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래 공부를 열심히 하고, 진리 탐구에 몰두하며, 지식을 많이 쌓은 사람은 존경의 대상에 가까웠을 것이다. 어쨌든 그들은 다른 사람들이 잘 알지 못하는 인간의 내면, 세상의 원리 등을 알며 더 정확하거나 중요한 판단과 사고를 할 수 있다고 믿어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 ‘공부’를 열심히 많이 했다는 것이 그런 존경의 대상이 되는 일은 별로 없는 것 같다. 대체로 한국에서의 공부란 단지 성공의 수단이며 경쟁에서 이기고자 하는 노력이고, 그로써 출세하고 부귀영화를 누리고자 하는 개인적 욕심 이상의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공부는 신분을 바꾼다. 사회적 위치를 바꾸고, 그로써 삶을 바꾸며, 집안마저 바꾸어 놓는다. 그것이 우리나라에서의 공부였으며 여전히 공부는 그와 같은 식으로 작동한다. 그래서 공부란 가능하면 목표 달성에 효율적으로 하면 그만인 무엇이 되었다.
시험에 합격하기 위한 공부는 결국 정답을 잘 찾아내는 것, 정답에 가깝게 써내는 것이 그 목표가 되었을 뿐, 공부가 그 이상이 되는 건 낭비이고 쓸모없는 짓일 뿐이다. 공부는 딱 성적을 잘 받기 위한 정도에서 멈추어야 하며, 그 이상의 공부는 어리석은 일일 뿐이다.
대학원에서의 학문이라는 것도 때로는 크게 다르지 않다. 공부를 통해 정말로 어떤 진실을 탐구하는 일보다는, 단지 학계에서 인정받는 논문을 써내는 것만이 중요한 것이다. 내가 이 공부를 통해 내 삶, 나의 관계들, 나의 사랑, 내가 속한 사회를 정말로 더 나은 것으로 바꾸어가는 통합적인 과정보다는 학계에서 요구하는 논점의 빈틈을 찾아내어 내 자리를 찾아내는 게 논문적 글쓰기인 경우가 대단히 많다. 그를 통해 연구교수가 되고, 부교수가 되고, 학회장이 된다면 그로써 그는 훌륭한 학자가 되는 것이며, 공부란 그에 이르는 수단일 뿐인 것이다.
결국 이렇게 ‘공부만’ 한 사람들은 다른 모든 분야에서 오직 그 분야의 성공만을 위해 ‘노력’한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인격적으로 성숙한다든지, 존경할 만한 사람이 된다든지 하는 것과는 아무 관련이 없어진다. 다른 모든 영역이 지닌 부패의 카르텔과 수직적 구조에서 일어나는 온갖 폭력, 권력의 횡포 따위는 공부한 사람들의 세계에도 똑같이 일어난다.
그들은 결코 운동을 열심히 한 사람, 그림을 열심히 그린 사람, 장사를 열심히 한 사람, 의료행위를 열심히 한 사람보다 더 존경할 만하지 않다. 올바른 인간이 된다는 것이 공부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시대가 된 것이다. 그저 이 영역이든 저 영역이든 인격자나 존경할 만한 사람이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할 뿐, 공부는 사실상 일반적인 기술과 차이가 없어졌다고 무방하다.
공부를 많이 한 사람들이 결국 사회의 지도층이 되고, 그들이 어떻게 이 사회를 더 ‘똑똑하게’ 이용해 자기 욕심을 채우는지가 매일같이 언론에 나오는 세상이다. 이제는 어린 학생들마저 공부를 오직 성적을 얻기 위한 것으로 여기고, 교사나 강사도 결국 자기에게 성적을 얻을 스킬을 주는 대상으로만 여겨간다.
어쩌면 우리 사회에서 가장 시급하게 복권되어야 할 것이 공부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어떻게 공부를 공부 자체로 되살릴 것인가, 공부를 진정한 공부로 다시 살릴 것인가가 가장 근본적인 문제일지도 모른다.
원문: 문화평론가 정지우의 페이스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