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는 말했다, 돈 주고 물을 살 거라면 차라리 어려운 이웃을 도우라고. 그렇다. 어릴 때만 해도 페트병에 담긴 물을 사서 마신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부엌의 주전자에는 언제나 보리차가 팔팔 끓었고, 냉장고 속 델몬트 유리병에는 더위를 대비한 차가운 보리차가 담겨 있었다. 가끔 다른 음료 페트병에 담겨있는 것도 있었는데, 물이라 착각했다가 매실 원액을 들이켜기도 했다. 으엑.
먼 과거의 이야기 같지만 짧게는 20년, 길게는 30년 전의 풍경이다. 지금은 편의점과 마트에서 물을 사서 마시는 것이 일상이 되었다. 먹는샘물(이하 생수). 엄마에게 등짝을 맞을 것 같은 아이디어가 시장의 주류가 되기까지. 오늘은 국내 생수 시장의 왕좌를 다투는 현대판 ‘봉이 김선달’들의 전쟁을 알아본다.
한국에서 생수가 판매된 것은 불과 30년?
국내 최초의 생수는 무엇일까? 1976년 ‘다이아몬드정수’라는 제품이 최초로 먹는샘물 제조업 허가를 받았다. 하지만 미군 부대 혹은 외국인들에게만 제한되게 판매되었다. 정부는 생수를 시중에 판매할 경우 국민들이 수돗물이 깨끗하지 않다고 인식할 것이라는 걱정이 있었다고.
하지만 1988년 ‘서울 올림픽’을 전후로 생수가 시중에 팔린다. 물론 한시적인 판매였다. 서울을 방문한 외국인들이 수돗물을 마시는 걸 꺼릴 수 있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이후 다시 생수 산업이 막히자 불만이 터져 나왔다. 1994년 결국 정부가 생수 판매를 금지하는 것은 위헌이라는 판결이 나온다. 그리고 1995년 1월 ‘먹는물관리법’이 제정되며 본격 물장사… 아니 생수 시장이 열렸다.
사실 초기 생수 시장은 말통이라고 불리는 것(정수기에 덩크 해서 넣는 대형 물병)이 대부분이었다. 사용되는 곳들도 사무실이나 식당 정도였다. 이때까지만 해도 사람들이 각자 작은 페트병으로 생수를 마실 줄은 몰랐겠지.
삼다수의 탄생: 생수의 왕좌를 차지하다
1995년 3월, 제주시 조천읍 교래리 산 70번지, 제주특별자치도개발공사는 지하 420m에서 지하수를 뽑아 올린다. 수질검사가 나왔다. ‘건강에 해로운 성분 전무(全無)’ 지하에서 나온 물에서는 불소나 암모니아성 질소, 카드뮴 등의 성분이 하나도 검출되지 않았다. 수십 겹의 화산 암반층이 일종의 정수기 필터 역할을 한 것이다.
비는 많이 와도 물이 귀한 섬으로 인식된 제주도는 지층 틈에 나는 용천수에 의존하는 지역이었다. 1970년대 막대한 양의 지하수를 발견하고, 1995년도에 지하수의 품질을 알게 된 것이다. 제주특별자치도개발공사에서는 이를 가지고 생수 시장에 진출한다. 바로 ‘제주삼다수(이하 삼다수)’의 출격이다.
1998년 3월에 출시된 삼다수는 한 달 만에 5,000톤이 판매되었다. 등장과 함께 당시 생수 3대장인 진로석수, 풀무원샘물, 스파클을 제치고 1위에 올랐고, 4개월 만에 품절이 된다. 청정제주의 이미지와 화산 암반층이 물을 걸러줬다는 수원지의 매력이 함께해 ‘돈을 주고 사서 마실만 한 물’의 이미지를 얻은 것이다.
그리고 삼다수는 20년 동안 1위 자리에서 내려오지 않았다. 판매된 삼다수의 양만 해도 수영장(올림픽 규격으로) 3,272개를 채울 수 있는 818만 톤이라고.
아이시스의 반격: 삼다수가 하지 못하는 것
삼다수의 라이벌은 누구일까? 바로 롯데칠성의 ‘아이시스8.0(이하 아이시스)’다. 하지만 아이시스는 뒤늦게서야 역주행한 녀석이다. 아이시스가 삼다수보다 1년 먼저 출시(1997년 2월)되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이 있을까? 또 아이시스의 이름이 ‘아이스’와 ‘오아시스’의 합성어라는 사실은…
아이시스는 출시 후 10년 동안 하위권은 다른 샘물들과 다를 바 없었다. 롯데칠성은 생수 시장이 아직 성숙하지 못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후 2000년대가 되며 아이시스는 공격적 마케팅을 결정한다. 하지만 점유율 60%에 육박하는 삼다수의 벽은 높았다. 아이시스는 삼다수가 하지 못하는 것들을 공략한다.
삼다수의 가장 큰 장점이자 단점은 ‘제주’다. 오직 제주도 안에서 생산되기 때문에 물량이 한정적이고 유통이 느리다는 단점이 있다. 아이시스는 전국 곳곳에 수원지를 확보하고 유통망을 더욱 촘촘히 만들었다.
또한 삼다수를 비롯한 여러 생수가 ‘수원지(샘물이 나오는 근원)’를 중심으로 판매할 때 ‘목 넘김 마케팅’을 진행한다. 2011년 아이시스 이름을 ‘아이시스8.0’으로 바꾼 것이다. PH 8.0의 약알칼리성 물이 목 넘김이 좋다나. 아무튼 이름 참 어렵다.
아이시스의 시장 점유율은 2015년 8.2%에서 2017년 10%를 기록하고 2018년 13.1%까지 오른다. 철옹성 같던 삼다수는 40%대로 떨어진 상태. 야금야금을 넘어 삼다수를 넘으려는 아이시스의 다음 반격은 무엇일까?
삼다수를 잃은 농심, 백산수와 중국으로 승부하다
삼다수와 아이시스를 이은 국내 생수 3대장은 농심의 ‘백두산 백산수(이하 백산수)’다. 신춘호 농심 회장은 이전부터 “지난 50년간 농심은 라면으로 먹고살았지만, 앞으로 수십 년은 물로 먹고살 것”이라고 말한 일이 있다. 하지만 여기에는 슬픈 이야기가 숨어있다. 사실 삼다수의 시작을 함께한 것이 농심이기 때문이다.
1998년 제주개발공사(제주삼다수)의 파트너는 농심이었다. 하지만 2012년 공사 측에서 농심과 계약에 문제 제기 소송을 한다. 기존 협약은 계약 기간이 3년이었지만 구매계획물량이 이행된 경우 매년 연장하기로 한 것이다. 마치 가입하고 잊어버린 정기결제 서비스처럼 자동 계약이 연장되는 것과 다름이 없었다. 법원은 공사 측의 손을 들어줬다. 그리고 삼다수는 광동제약의 손을 잡게 된다.
제주도를 떠난 농심이 간 곳은 바로 백두산. 2012년 12월 백두산 북쪽 안투현의 물로 백산수 생산에 도입하게 된다. 마지막으로 국내뿐 아니라 중국 시장을 함께 노렸다. 중국의 생수 시장은 2014년에는 3,247만 9,000달러였는데 2016년 5,195만 7,000달러로 무려 60% 가까이 성장했다. 농심은 국내에서는 ‘백산수’ 중국에는 ‘백산성수(白山聖水)’로 중국에 진출한다.
백산수의 라이벌은 누구일까? 중국 시장을 고려했을 때는 오히려 ‘오리온’이 될 수 있다. 제주 용암 해수 단지에 물 생산 공장을 지어 중국 진출을 목표로 생수(라고 쓰고 혼합 음료라고 읽어야 한다. 바닷물을 사용해서 가공하기 때문)를 제작한다. 초코파이로 중국 유통망을 확보한 오리온의 생수는 백산수의 맞상대가 될 수 있을까?
생수가 일상으로, 그리고 개인의 취향으로 변하다
지난 30년 동안 경제적으로 가장 핫한 마실 거리는 다름 아닌 ‘물’이다. 1995년 첫해 생수 시장은 600억 규모로 열렸지만, 현재는 1조 2,000억 원. 2023년이면 2조 3,000억 원을 돌파할 예정이라고 한다. 아직도 성장할 가능성이 많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지난해부터는 생수의 최대 단점인 ‘무게’에 대한 해결을 내놓기 시작했다. 아무리 택배로 배달해도 경비실에 맡겨놓으면 들고 가는 데 온갖 힘을 써야 했던 생수. 지난해부터는 생수 회사들이 자체적으로 배송 시스템을 만들어 정해진 수량과 배송 주기 요일을 맞춰 생수를 집 앞까지 전달한다고 한다.
생수의 가능성은 식수에서 그치지 않는다. 또한 나의 ‘취향’을 드러내기 위한 프리미엄 생수. 또 더위 속에서 다른 음료보다 물을 선호하는 ‘건강’족들의 등장까지. 지난 30년간 우리의 일상에 들어온 생수가 앞으로 만들 풍경은 과연 어떻게 될까?
원문: 마시즘
참고 문헌
- 물이라는 공공재의 위기, 변진경, 시사in, 2013.1.17
- 문 앞 배송 ‘생수 전쟁’, 김유림, 신동아, 2019.6.2
- 마시는 물 전쟁 2라운드, 김보람, 한국경제, 2019.5.3
- 한라산 깊은 물 국민건강수 ‘삼다수’, 강신우, 이데일리, 2019.4.26
- 20년 독주체제 삼다수 아성 흔드는 아이시스, 노정동, 한국경제, 2019.7.4
- 치열한 국내 생수 시장 중국에서 새로운 전투 나서나?, 박자연 ,이코노믹리뷰, 2019.4.20
- 25조 중국 생수 시장 정조준한 오리온의 속내는, 김아름 ,디지털타임스, 2019.2.5
- 韓 생수 자존심 제주삼다수, 장유미, 아이뉴스24, 2018.6.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