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학산문선’ 시리즈에는 조선 후기 실학자인 정약용의 글을 모은 『뜬 세상의 아름다움』이라는 책이 있다. 여기에 포함된 글 「가난한 근심」에서 일찌기 정약용은 사람들이 부질없는 근심이 많은 것에 대해서 썼다.
그에 따르면 사람들은 이익을 좇아 부지런히 내달리느라 정신이 고달프지만 다 부질없는 일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또 걱정해야 할 자기 정신을 기르는 일은 정작 걱정하지 않는다. 죽을 때 책 한 상자도 전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짐승이나 다름없지 않냐고 정약용은 말한다.
정약용이 그 글을 쓴 것은 이미 200년 전이지만 사람들이 부질없는 걱정에 시달리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다. 따지고 보면 더 많은 이유가 있을 수도 있지만 사람이 부질없는 걱정에 시달리는 이유에는 적어도 두 가지 큰 이유가 있지 않나 싶다.
첫 번째 이유는 자기가 뭘 원하는지를 잊어버려서다. 이 메시지를 잘 표현하는 이야기는 바로 투자를 권유받은 농부의 이야기다. 그리스의 한 농부에게 한 사업가가 투자를 하면 회사를 세우고 부자가 될 수 있다고 말했다. 농부는 부자가 되면 뭘 할 수 있냐고 물었다. 그에 사업가는 이렇게 그리스에서 휴가를 보낼 수 있다고 대답했다. 농부는 그 말을 듣자 웃었다. 자기는 이미 휴가를 보내는데 왜 그런 번거로운 일을 하냐고 말이다.
조금씩 바뀐 형태로 널리 알려진 이 이야기는 반드시 돈을 벌거나 회사를 세우는 것이 무의미하다는 뜻이거나 농사를 짓는 것이 행복하다는 뜻이 아니다. 그 핵심은 원하는 게 뭔지 기억하고 불필요한 일에 끼어들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자기가 원하는 것을 생각보다 쉽게 잊어버린다.
예를 들어 여행을 간다고 하자. 여행을 왜 갈까? 한마디로 말하기는 어렵지만 그래도 나름의 이유가 있다. 그런데 정작 여행 계획을 세우고 여행하다 보면 자꾸 다른 이유의 유혹을 받는다. 돈 벌러 여행 간 게 아닌데도 이왕이면 돈을 벌면 좋지 않냐는 생각이 들고, 여행지의 유명 관광지를 전부 바쁘게 돌아서 그걸 다 봤다고 자랑하러 간 게 아닌데도 남들이 다 그렇게 한다는 말을 들으면 그렇게 하려고 한다.
즉 우리는 자꾸 자신의 이유에 집중하지 못하고 남의 이유에 휘둘린다. 고등어 사러 시장에 가서는 자꾸 빵이며 파며 돼지고기 가게를 기웃거리는 셈이다. 어느 정도 그렇게 하는 것은 자연스럽고 좋은 일이지만 대개 어느 정도에 멈추지 못한다. 사람들은 적극적으로 자기 이유를 홍보하려 들기 때문이다. 그래서 남들의 이유에 휘둘리고 압력을 받는다. 그리고 그렇게 하는 순간 걱정은 시작된다. 삶은 피곤하고 바쁜데 자꾸 실패한다. 게다가 성공을 해도 내가 본래 원한 게 이게 아니니까 이게 무슨 소용인가 싶다.
정약용이 이익을 좇아 부지런히 내달리느라 사람들이 근심에 빠진다고 할 때 그나마 그 이익이란 게 진짜 내가 원하는 이익이기나 하면 다행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아무 필요도 없는 성공들을 위해 너무 많은 일을 하고, 비교할 필요가 없는 것들을 열심히 비교한다. 그러니 근심이 멈출 수가 없다. 이미 휴가를 즐긴다고 말하는 그리스 농부의 이야기는 바로 이 이야기를 하려는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두 번째 이유는 자기에 대한 믿음이 없어서다. 우리는 내일, 다음 주, 내년에 무슨 일이 있을 줄 모른다. 스스로를 믿고 모든 순간, 모든 상황에서 나는 그저 나로서 그 순간을 맞이할 것이라고 생각하면 사실 세상에 걱정할 것이 별로 없다. 사람은 누구나 죽고, 누구나 뜻밖의 실패나 불행을 겪는다. 내가 나로서 최선을 다해 살았는데도 그걸 피할 수 없다면, 그저 받아들이고 그 안에서 최선을 다해 살면 그뿐이다.
그런데 사람이 스스로를 믿지 못하면 이제 예측할 수 없는 것을 예측하고 미리 나의 행동을 결정하려고 한다. 현재의 나가 미래의 나를 믿지 못해 미래의 나를 속박하려 드는 것이다. 물론 과거의 나도 현재의 나를 믿지 못해 이미 여러 속박의 사슬을 나에게 묶어 두었다. 그런데 예측할 수 없는 것을 예측하려고 하면 이 모든 걱정은 부질없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매우 해롭다.
삶이란 어느 정도 자전거 타기 같은 것이다. 우리는 매 순간 우리 안의 균형감각을 발휘하면서 페달을 밟는 것이지, 한 시간 전에 미리 ‘한 시간 후 자전거를 탈 때는 이렇게 패달을 밟겠다’고 정해두면 넘어지게 된다. 과거의 나는 현재를 만나는 현재의 나만큼 지금 이 상황에 대해 세세하게 알 수 없다. 그러니 과거의 나가 현재의 나를 지배하게 만드는 건 서울 안 가본 사람이 서울 가본 사람에게 서울에 대해 말하는 거나 같다. 우리는 바로 그런 속박 때문에 선입견에 빠지고 애초에 있지도 않은 문제를 실존하게 만든다.
내 배우자가 불륜을 저지르면 어쩔 것인가? 내가 그것에 미리 방비하고 준비하면 부부 관계가 지켜지고 좋아지나? 언뜻 들으면 합리적으로 보이는 이런 걱정들은 우리로 하여금 쓸데없는 준비를 하게 만들고, 쓸데없는 것을 들춰보고 의심하게 만든다. 그리고 그런 불신은 불신을 실재로 만든다. 없는 귀신을 꼭 보겠다고 하는 사람은 귀신을 만들어 내게 된다. 그러니까 수없이 많은 걱정을 하는 사람은 수없이 많은 귀신을 불러들이는 셈이다.
이 모든 일의 근원에는 나를 믿지 못하고, 내 주변의 사람을 믿지 못하며, 내 나라를 믿지 못하는 것에 있다. 이순신 장군이 임진왜란에 싸우러 가면서 최선을 다해 싸울 것을 걱정하지, 혹시 지면 어쩌나 걱정하느라 밤을 새우겠는가. 지면 지는 것이지 어쩌겠는가.
우리가 우리 자신의 최선을 다해서 살았는데 성공 못 하면 그뿐인 것이지 그걸 어쩌겠는가. 성공 못 하면 어쩌나 걱정하는 게 우리를 성공하게 만들까? 오히려 우리의 눈을 멀게 하고, 우리의 머리를 선입견에 가득 차게 하며, 공포와 걱정 때문에 더욱 남에게 휘둘리게 만들지 않을까?
그럼에도 우리는 걱정을 한다. 부질없는 걱정을 한다. 우리는 유한한 인간이기에 어느 정도는 자연스러운 일이다. 이런 의미에서는 우리가 때로 부질없는 걱정을 한다고 걱정을 하는 것도 부질없는 것이다. 하지만 때로 어느 정도가 아닌 경우가 있다. 너무 걱정이 많고, 너무 바쁘고, 그러다가 모든 게 뒤죽박죽이 되고 만다.
이런 사람에게 정약용은 일찍이 말했던 것이다. ‘걱정해야 할 것은 걱정 안 하고 부질없는 이유들을 좇아 삶이 바쁘니 사람 되기 틀렸다’고 말이다. 이것은 걱정해야 하는 일이다.
원문: 나를 지키는 공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