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만다 게프터(Amanda Gefter)가 리 스몰린(Lee Smolin)을 인터뷰한 「How to Understand the Universe When You’re Stuck Inside of It」을 번역한 글입니다.
우주의 내부에 갇혀 있을 때 우주를 이해할 방법
우주는 불가능한 객체의 일종이다. 우주는 내부는 있지만 외부는 없는데, 이를테면 우주는 면이 한 개인 동전이다. 이런 뫼비우스 구조는 우주론자에게 독특한 난제를 제시하는데, 우주론자는 자신이 파악하려고 노력하는 바로 그 시스템의 내부에 갇혀 있는 난처한 입장에 처해 있다.
리 스몰린은 자신의 경력 대부분 동안 바로 그 상황을 고찰해왔다. 캐나다 워털루 소재 페리미터 이론물리학 연구소(Perimeter Institute for Theoretical Physics)에 재직하는 물리학자인 스몰린은 양자역학과 상대성, 우주론이 교차하는 까다로운 문제를 다룬다. 그의 부드러운 목소리와 조용한 태도에 속지 말아야 한다. 그는 반항적인 사상가며 지금까지 언제나 독자적인 길을 선택했다. 1960년대에 고등학교를 그만두었고, 이데오플라스토스(Ideoplastos)라는 록밴드에서 연주하였으며, 지하신문을 발행했다.
R. 버크민스터 풀러(Buckminster Fuller)처럼 측지선 돔을 짓고 싶었던 스몰린은 독학으로 고등수학을 익혔다. 나중에 밝혀진 대로 그때 익힌 수학은 아인슈타인의 일반상대성 방정식을 다룰 때 필요한 수학과 같은 종류의 수학이었다. 스몰린이 이 사실을 깨달은 순간은 그가 물리학자가 된 순간이었다. 그는 하버드대학에서 공부했고 뉴저지주 프린스턴대학 고등연구소에 자리를 잡았는데, 결국은 페리미터 연구소의 창립 교수진에 합류했다.
사실상 ‘페리미터’는 주류 물리학의 경계에 있는 스몰린의 위치를 서술하는 완벽한 낱말이다. 대부분의 물리학자가 끈 이론으로 곧장 뛰어들었을 때, 스몰린은 고리 양자 중력(loop quantum gravity)이라는 경쟁 이론을 고안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대부분의 물리학자가 물리학 법칙은 변경 불가능하다고 말했을 때, 스몰린은 물리학 법칙은 일종의 우주적 다윈주의에 따라 진화한다고 말했다. 대부분의 물리학자가 시간은 환상이라고 말했을 때, 스몰린은 시간은 실재적이라고 역설했다.
스몰린은 흔히 자신이 생물학자, 경제학자, 조각가, 극작가, 음악가, 정치이론가와 나누는 대화에서 영감을 받음을 깨닫는다. 어쩌면 철학에서 가장 큰 영감을 받는다고 깨닫는데, 특히 17세기와 18세기에 활동했고 아이작 뉴턴(Isaac Newton)과 함께 미분법을 발명한 독일 철학자 고트프리트 라이프니츠(Gottfried Leibniz)의 저작에서 그러하다.
라이프니츠는 (뉴턴에 맞서) 우주에 대한 고정된 배경, 즉 공간이라는 “요소”가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는데, 요컨대 공간은 관계들을 서술하는 간편한 방식일 뿐이다. 이런 관계적 틀이 스몰린의 상상을 붙잡았다. 라이프니츠가 세계의 근본적인 구성 요소는 일종의 실재 원자인 “모나드”라고 제시하는 불가사의한 텍스트 『모나돌로지』가 그런 것처럼 말이다.
여기서 각각의 모나드는 우주 전체에 대한 독특한 견해를 나타낸다. 그것이 바로 스몰린이 견해들로부터 실재를 구성하려고 시도하는 가장 최근의 작업을 특징짓는 개념인데, 각각의 견해는 역동적으로 진화하는 우주에 대한 부분적인 시각이다. 내부에서 바라본 대로의 우주.
《퀀텀 매거진(Quantum Magazine)》은 우주론과 양자역학에 대한 접근법에 관해 스몰린과 인터뷰를 가졌다. 그는 최근에 출간된 책 『아인슈타인의 끝나지 않은 혁명(Einstein’s Unfinished Revolution)』에서 관련 내용을 상세히 서술한다. 그 인터뷰는 명료함을 위해 축약되고 편집되었다.
Q: 당신의 슬로건은 이렇습니다. “우주론의 제일 원리는 다음과 같아야 한다: 우주의 외부에는 아무것도 없다.”
A: 뉴턴 역학이나 양자역학처럼 물리학 법칙을 표현하는 다른 형식에는 배경 구조, 즉 규정되어야 하는 고정된 구조가 존재합니다. 그 구조는 진화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일어나는 어떤 일에도 영향을 받지 않습니다. 그것은 모형화되는 시스템의 외부에 있는 구조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관측할 수 있는 것들, 이를테면 관찰자, 시계 등을 거는 틀입니다. 우주의 외부에는 아무것도 없다(우주의 외부에는 어떤 관찰자도 없다)라는 진술은 배경 구조가 없는 물리학의 형식이 필요하다는 점을 함축합니다. 우리에게 있는 물리학 이론들은 모두, 이런저런 식으로, 우주의 하위 시스템에만 적용됩니다. 그것들은 우주 전체에는 적용될 수 없는데, 그 이유는 그것들이 이런 배경 구조를 필요로 하기 때문입니다.
우주론적 이론을 만들고 싶다면, 우주론적 규모에서 자연을 이해하고 싶다면 철학자 로베르토 웅거(Roberto Unger)와 제가 ‘우주론적 오류’라고 부른 것, 즉 하위 시스템에 적용되는 이론을 취해 우주 전체로 확대할 수 있다는 그릇된 믿음을 회피해야 합니다. 관찰자나 측정 기기나 시스템 외부의 어떤 것에도 준거하지 않는 동역학의 형식이 필요합니다. 그것은 다른 종류의 이론이 필요함을 의미합니다.
Q: 최근에 당신은 그런 이론을 제안했습니다. 당신이 서술한 대로 ‘우주의 역사는 그 자체에 대한 다른 견해들로 구성된다’는 이론을 제안했습니다. 그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A: 그것은 존재하는 것들의 고유한 특성들에 관한 이론이 아니라, 과정에 관한 이론, 일어나는 것들의 순서와 인과적 관계들에 관한 이론입니다. 사건은 단일한 장소와 시간에 일어나는 것인데, 각각의 사건에는 어떤 운동량, 에너지, 전하 또는 측정할 수 있는 다른 다양한 물리량이 있습니다. 사건은 우주의 나머지 부분과 관계를 맺고, 그런 관계들의 집합이 우주에 대한 그것의 “견해”를 구성합니다. 우리는 어떤 고립된 체계를 외부에서 측정되는 것들과 관련 지어 서술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주가 사건들의 관계로 구성되어 있다고 여길 것입니다. 그 관념은 물리학을 내부에서 바라본 이런 견해들과 관련 지어 다시 표현하고자 하는 것, 우주의 내부에서 바라보았을 때 물리학의 모습이 어떠한지 표현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Q: 그 작업을 어떻게 합니까?
A: 많은 견해가 존재하고, 각각의 견해는 우주의 나머지 부분에 관한 부분적인 정보를 담을 뿐입니다. 각각의 견해는 독특해야 한다는 점을 동역학의 원리로 제시합니다. 그 관념은 식별할 수 없는 것들의 동일성에 관한 라이프니츠의 원리에서 비롯됩니다.
각각의 견해가 서로 정확히 대응될 수 있는 두 사건은 정의상 같은 사건입니다. 그래서 각각의 견해는 독특하고, ‘다양성’으로 불리는 양을 정의함으로써 이것과 저것이 얼마나 구별되는지 측정할 수 있습니다. 그래프 위의 노드에 관해 생각한다면, 당신은 한 걸음 밖으로, 두 걸음 밖으로, 세 걸음 밖으로 갈 수 있습니다. 각각의 걸음은 이웃, 즉 한-걸음 이웃, 두-걸음 이웃, 세-걸음 이웃을 제공합니다.
그러므로 어떤 두 사건에 대해서도 이렇게 물을 수 있습니다. 그것들의 견해가 달라질 때까지 얼마나 많은 걸음을 나가야 합니까? 어떤 이웃에서 그것들은 다릅니까? 더 적은 걸음을 나가면 될수록 두 견해는 서로 더욱더 구별될 수 있습니다. 이 이론에 함축된 관념은 물리학 법칙, 즉 시스템의 동역학이 다양성을 최대화하려고 작동한다는 것입니다. 그 원리, 즉 자연을 다양성을 최대화하기를 바란다는 원리는 사실상 내가 지금까지 서술한 틀 안에서 슈뢰딩거 방식을 낳고, 그래서 양자역학을 적절한 한계 안에서 복원합니다.
Q: 저는 당신의 책으로부터 당신이 본질적으로는 실재론자라는 것, 즉 당신은 우리의 지식과 독립적인 실재를 강하게 믿는다는 것을 알고, 그러므로 아인슈타인과 마찬가지로 당신은 양자역학이 불완전하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견해 이론은 당신이 양자론에서 빠져 있다고 생각하는 것을 모두 갖추는 데 도움이 됩니까?
A: 아인슈타인은, 게다가 레슬리 발렌타인(Leslie Ballentine)이라는 사람도 파동함수(양자 시스템을 표상하는 수학적 객체)에 대한 ‘앙상블 해석(ensemble interpretation)”을 옹호했습니다. 그 관념은 파동함수가 가능한 상태들의 앙상블을 서술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어느 날, 저는 카페에 앉아서 일을 하는 동안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앙상블이 실재적이라면 어쩔 것인가? 단일한 물 분자를 서술하는 파동함수가 있을 때, 그것이 사실상 우주에 있는 모든 물 분자의 앙상블을 서술한다면 어쩔 것인가?
Q: 그래서 일반적으로 우리는 한 개의 물 분자와 상태들의 불확정성이 있다고 생각하는 반면에, 당신은 상태들의 불확정성이 사실상 우주에 있는 모든 물 분자의 앙상블이라고 말했습니까?
A: 그렇습니다. 그것들이 앙상블을 형성하는 이유는 그것들의 견해들이 매우 유사하기 때문입니다. 그것들은 모두 서로 상호작용을 하는데, 그 이유는 상호작용의 확률이 견해들의 유사성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지 반드시 공간적인 근접성에 의해 결정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Q: 사물들이 상호작용하려면 서로 가까이 있을 필요는 없다는 말씀입니까?
A: 이 이론에 따르면, 견해들의 유사성이 공간보다 더 근본적입니다. 흔히, 두 사건이 유사한 견해를 갖는 이유는 그것들이 공간적으로 가깝기 때문입니다. 두 사람이 서로 옆에 서 있다면, 그들은 우주에 대해서 매우 유사하고 겹치는 견해가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두 원자는 사람 같은 크고 복잡한 객체보다 훨씬 더 적은 관계적 특성을 갖추었습니다. 그래서 공간적으로 멀리 떨어진 두 원자도 여전히 매우 유사한 견해를 가질 수 있습니다. 그것은 매우 작은 규모에서는 대단히 비국소적인 상호작용, 이를테면 양자역학에서 얽힘으로 얻는 바로 그것이 존재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실재적 앙상블 형식에 따르면, 그것이 양자역학이 비롯되는 지점입니다.
Q: 그것은 제게 얽힘과 시공간의 기하학 사이의 놀라운 연결 관계를 찾아내는 물리학에서 현재 진행하는 많은 작업을 떠올리게 합니다.
A: 저는 그런 작업 중 많은 것이 정말로 흥미롭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을 부추기는 가설은, 얽힘은 양자역학에서 근본적인 현상이고, 게다가 공간 또는 시공간의 기하학은 얽힘의 구조에서 창발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매우 긍정적인 전개입니다.
Q: 당신은 이런 관념들이 라이프니츠의 『모나돌로지』에서 촉발되었다고 말했습니다. 공교롭게도 당신은 방금 『모나돌로지』를 꺼내어 다시 읽었습니까?
A: 저는, 제가 막 대학원 과정을 마쳤을 때, 줄리안 바버(Julian Barbor)가 부추겨서 라이프니츠를 처음 읽었습니다. 먼저 저는 뉴턴의 추종자인 사무엘과 라이프니츠가 주고받은 서신을 읽었는데, 요컨대 라이프니츠는 절대공간과 절대시간이라는 뉴턴의 관념을 비판하면서 물리학에서 관측 할 수 있는 것은 관계적인 것이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것은 상호작용에서 비롯되는, 한 시스템이 다른 한 시스템과 맺는 관계를 서술해야 합니다.
그 뒤에 저는 『모나돌로지』를 읽었습니다. 저는 그것을 배경 독립적인 물리학 이론을 구성하는 방법에 대한 묘사로 읽었습니다. 저는 때때로 『모나돌로지』를 읽습니다. 그곳에는 라이프니츠가 이렇게 말하는 아름다운 인용문이 하나 있습니다.
같은 도시를 다른 방향에서 바라보면 전적으로 다르게 보이는 것과 꼭 마찬가지다. […] 이를테면 많은 다른 우주가 존재하는데, 그런데도 그것들은 각 모나드의 다른 관점에 해당하는, 단일한 우주에 대한 시각들일 뿐이다.
그 인용문 덕분에 저는 이런 관념들이 매우 적절한 이유를 떠올립니다, 그저 물리학뿐 아니라 사회 정책과 탈근대주의에서 예술을 비롯해 다원적인 사회에서 한 개체라는 것이 어떤 느낌인지에까지 이르는 모든 범위에 말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다른 곳에서 논의할 주제입니다!
Q: 당신의 작업은 철학의 영향을 많이 받았습니다. 역사적으로 되돌아보면, 아인슈타인과 보어와 존 휠러 같은 사람들은 모두 철학을 진지하게 여겼고, 철학이 그들의 물리학에 직접 영향을 미쳤습니다. 그것은 위대한 물리학자들의 특질인 듯 보입니다.
A: 그리고 위대하지 않은 물리학자들의 특질이기도 합니다.
Q: 좋습니다. 공정하시군요! 오늘날에는 물리학에서 철학에 관해 이야기하는 것은 거의 터부시되는 것처럼 보일 뿐입니다. 당신의 경험도 그렇습니까?
A: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근본 법칙에 대한 우리의 지식을 심화하는 목적의 기초물리학을 선도하는 이론가 중 많은 사람이 철학을 매우 잘 압니다. 햄프셔 칼리지의 학부생로서 저는 많은 물리학 강좌와 몇몇 철학 강좌를 수강했습니다. 그 후 제가 대학원 과정을 위해 하버드 대학에 갔을 때, 제 의도는 물리학과 철학에서 복수 박사학위를 취득하는 것이었지만 꽤 빨리 철학에 환멸을 느꼈습니다. 정말로, 물리학자들은 어지간히 오만했습니다. 하지만 철학자들은 훨씬 더 오만했습니다.
20세 초 유럽에서 물리학의 혁명이 일어났던 시기로 돌아가면, 아인슈타인, 보어, 하이젠베르크, 슈뢰딩거 등과 같은 사람들은 철학 교육을 매우 잘 받았고, 그것이 물리학자로서의 그들의 작업을 특징짓습니다. 그 후에 이런 실용적 전회가 벌어졌는데, 그리하여 물리학의 지배적인 양식은 반기초적이고 반철학적인 것이 되었습니다.
MIT에 재직 중인 물리학의 역사가 데이비드 카이저(David Kaiser)는 지금까지 이 사태를 상세히 연구했습니다. 카이저는 양자역학 교과서와 강의록을 연구했고, 1940년대를 거쳐 1950년대에 들어서면서 양자역학 강좌에서 철학과 기초적 쟁점들에 관한 언급이 어떻게 사라졌는지 알았습니다. 프리먼 다이슨(Freeman Dyson)이 언젠가 말한 대로, 일반적으로 젊은이는 반항자고 늙은이는 보수주의자이지만 그의 세대에서는 상황이 정반대였습니다. 젊은이들은 난삽한 철학이나 기초적 쟁점에 관해 듣고 싶어 하지 않았으며, 그저 벗어나서 양자역학을 응용하고 싶어 했을 뿐입니다.
이 사태는 1940년대에서 1970년대에 이르기까지 표준 모형과 응집물질 물리학 등의 확립을 통해서 양자역학의 응용이 폭발적으로 증가하는 데 대단히 좋았습니다. 하지만 그 후에 기초물리학은 수렁에 빠졌고, 우리가 수렁에 빠진 이유의 일부는 이런 실용적이고 반기초적인 문화로는 진보를 이룰 수 없는 일단의 문제에 이르렀다는 것입니다. 저는 응집물리학과 천체물리학처럼, 우리가 관련 법칙들을 안다고 가정할 수 있는 그런 분야들이 계속해서 번성하리라는 점은 분명히 할 것입니다. 하지만 목표가 새롭고 더 깊은 법칙을 찾아내는 것이라면, 또다시 철학과 혼합해야 합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그런 일이 훨씬 더 많이 일어났습니다.
제가 철학자들과 교류하기 시작했을 때에는 실제로 물리학을 잘 알았던 소수의 철학자가 있었지만, 대부분의 철학자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오늘날, 물리학의 철학을 연구하는 젊은이는 대체로 물리학을 잘 압니다. 철학과의 교류가 귀환하고, 저는 그것이 좋은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원문: 사물의 풍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