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글에는 영화 〈포레스트 검프〉(1994), 〈주먹이 운다〉(2005), 〈리틀 미스 선샤인〉(2006), 〈족구왕〉(2013),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2014), 〈수영장으로 간 남자들〉(2018)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수영장으로 간 남자들〉 류의 영화가 있습니다. ‘세상의 게임에서 패배한 루저들의 유쾌한 반란!’이라는 바탕을 공유하는 영화들이죠. 이런 영화들에선 남들보다 한참 모자란 ‘루저’가 주인공으로 등장합니다. 루저는 세상의 기준에 맞서 싸워요. 그리고 마침내 아무도 예상하지 않았던 승리를 거머쥡니다.
이런 종류의 영화들 정말 많죠. 우리는 이런 영화들을 ‘루저의 반란’ 장르라고 따로 이름 붙일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루저의 반란’ 장르의 서사를 아래와 같이 간단히 정리할 수도 있습니다.
- 세상은 루저를 무시한다 → 그런 루저가 세상에 대항한다 → 아무도 루저의 승리를 예상하지 않는다 → 그러나 뜻밖에 루저는 승리를 거머쥔다
그런데 ‘루저의 반란’ 영화의 핵심은 위 도식의 ‘그러나 뜻밖에’에 있습니다. 여태껏 세상에 패배해왔기 때문에 루저인 것인데요. 그랬던 루저가 어떻게 세상에 이기겠어요. 루저의 반란은 태생적으로 현실성이 부족한 이야기입니다.
그러니 루저의 반란은 비현실성의 문제를 해결해야 합니다. 현실성을 담보해줘야 해요.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극장을 나오면서 ‘이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영화야’ 하면서 투덜거리게 될 겁니다. 루저의 반란은 어떻게 자연스럽게 성공해야 할까요? 어떻게 관객의 마음을 사로잡아야 할까요?
1. 포레스트 검프: 루저도 이길 뚜렷한 방법을 제시하기
가장 유명한 ‘루저의 반란’ 영화로는 로버트 저메키스의 〈포레스트 검프〉가 있습니다. 걸작이죠. 주인공 포레스트(톰 행크스)는 지적장애가 있는 데다 어려서부터 잘 걷지도 못합니다. 그래서 괴롭힘을 많이 당해요.
어느 날은 단짝 친구 제니와 함께 길을 가던 중이었습니다. 그때 늘 돌을 던지며 포레스트를 괴롭히던 삼인방이 차를 타고 달려들죠. 다리에 보행 보조 장치를 단 포레스트는 잘 뛰지도 못하면서 열심히 도망갑니다. 차와 포레스트의 간격이 점점 좁아지던 때, 제니는 포레스트에게 달리라고 소리칩니다.
달려! 포레스트, 달려!
Run! Forrest Run!
이건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대사입니다. 영화의 메시지를 한 문장으로 드러내기 때문입니다. 달려라. 세상이 뭐라 하든 달려라. 이것이 영화의 주제입니다. 포레스트는 제니의 말을 듣고는 갑자기 빠르게 달리기 시작하고 다리의 보조 장치는 부서져 떨어져 나갑니다. 이건 일종의 상징입니다. 포레스트는 이제 알을 깨고 나와 새로운 세계로 질주를 시작합니다.
그 후 포레스트는 대학에서 미식축구를 하기도 하고, 베트남 전쟁에 참전하기도 합니다. 그는 미식축구를 하며 달리고, 전우를 구하기 위해 달립니다. 그 결과 명예 훈장까지 받는데요. 군대에서 만난 전우와 새우잡이 사업을 하자는 약속을 지키기 위해 전역 후에는 새우잡이를 덜컥 시작하기도 합니다. 당연히 주변의 비웃음을 사죠.
그런데 포레스트는 보란 듯이 성공합니다. 새우잡이가 크게 성공하면서 큰돈을 벌어요. 그러니까 이것도 달리는 거예요. 영화 속의 ‘달리라’는 말은 ‘생각만 하면서 우물쭈물 있지 말고 네 삶에 뛰어들어 무엇이든 쟁취하라’는 말입니다. 포레스트는 계속 달립니다. 주변의 시선 따위는 신경 쓰지 않고 자신의 삶을 살아갑니다.
자, 그러면 〈포레스트 검프〉가 ‘루저의 반란’ 영화로서 비현실성을 극복한 전략이 나온 것 같은데요. 맞습니다. ‘달리라’는 주문입니다. 포레스트는 지적장애가 있었고, 덕분에 주변에서 시키는 대로 하는 인물입니다. 감독은 주변인을 통해 포레스트에게 행동을 지시합니다. 루저도 세상에 맞서 이길 수 있는 뚜렷한 방법을 제시하는 것입니다. “달려!”
또 한 가지 중요한 전략은 〈포레스트 검프〉가 포레스트의 삶 전체를 다룬다는 것입니다. 보통 루저의 반란은 어떤 특정한 순간에 승리하는 루저들을 다루기 마련인데요. 예를 들면 〈국가대표〉 같은 영화가 그렇죠. 그런데 〈포레스트 검프〉는 포레스트의 어린 시절부터 그가 아들을 가질 때까지의 비교적 긴 시간을 다룹니다. 왜냐하면 성공엔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루저가 단 한 번의 경기에서 승리할 확률은 낮을 테지만, 그가 뚝심을 가지고 앞으로 달려 나갔을 때 인생 전체라는 경기에서 승리할 확률은 결코 낮지 않을 것입니다. 저메키스 감독은 포레스트의 긴 인생을 다루면서 루저의 반란 특유의 비현실성을 극복합니다.
2. 족구왕,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 유머와 뻔뻔함으로 돌파하다
〈족구왕〉과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 또한 루저의 반란 영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구태여 장르적 비현실성을 극복하려 하지 않습니다. 현실적이어봤자 영화잖아요. 그냥 한 판 놀자는 태도로 오히려 뻔뻔하게 밀고 나가는 거죠. 루저의 반란을 뼈대로 한 각본에 코미디의 외피를 둘렀습니다. 그래서 루저가 어떻게 세상에 이길 수 있냐는 질문을 무색하게 만들어 버립니다.
〈족구왕〉의 스토리는 간단합니다. 스펙 빵점의 복학생 홍만섭(안재홍). 그는 비록 가진 것 하나 없으나 족구를 사랑합니다. 취업에 목매야 할 귀한 시간에 족구나 하고 앉아 있습니다. 캐릭터들은 하나같이 전부 나사가 빠져있고 진지한 장면은 뭔가 콩트처럼 진행돼요. 만섭이 날리는 족구 스매싱은 거대한 빛을 만들기도 하고 땅에 균열을 내며 공이 박히기도 합니다. 말도 안 되는 거죠. 〈족구왕〉은 유머로 장르적 한계를 이겨냅니다.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는 히어로 장르의 문법과 루저의 반란 문법이 섞여 있습니다. 히어로라면 모름지기 사람들을 구하고 악인을 퇴치해야 하는 것이 인지상정. 그러나 이들은 구제 불능 오합지졸이죠. 악인으로 등장하는 로넌(리 페이스)을 퇴치할 능력도 별로 없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승리하냐? 인상적인 장면이 후반부에 나옵니다. ‘루저가 어떻게 승리할 수 있는지’를 납득시키는 것이 이 장르의 문제라고 했었죠. 그런데 승부를 가르는 결정적인 장면에서 주인공 스타로드(크리스 프랫)가 대뜸 춤을 춥니다. 그걸로 로넌의 시선을 뺏어서 빈틈을 만들고 필살의 일격. 완전 말도 안 되죠. 루저의 승리가 비현실적이라면 아예 비현실적으로 가는 겁니다.
그래서 이 장면은 영화의 백미가 됩니다. 사람들은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를 보고 나오면서 다들 그 춤추는 장면을 이야기할 수밖에 없어요. 답을 알려줘야 하는 가장 중요한 순간에 그냥 뻔뻔함으로 가는 것. 그 태도가 쿨하기 때문입니다. 월드컵 결승전에서 종료가 임박한 순간 얻어낸 천금과 같은 승부차기 기회. 이토록 중요한 순간에 칩샷으로 골을 넣는 것과 비슷하다고 할까요.
3. 주먹이 운다, 리틀 미스 선샤인: 승부에 매몰되지 않는 것이 진정한 승리
이번 사례는 루저의 반란이긴 한데, 루저가 승리하지 않습니다. 위에서 언급했던 도식을 다시 가져와 볼까요?
- 세상은 루저를 무시한다 → 그런 루저가 세상에 대항한다 → 아무도 루저의 승리를 예상하지 않는다 → 그러나 뜻밖에 루저는 승리를 거머쥔다
이랬던 원래 도식이 아래와 같이 바뀝니다.
- 세상은 루저를 무시한다 → 그런 루저가 세상에 대항한다 → 아무도 루저의 승리를 예상하지 않는다 → 역시나 루저는 승리하지 못한다 → 그러나 루저가 얻은 것이 있다
말하자면 ‘루저의 반란 2세대’입니다. ‘루저가 세상의 게임에서 승리하는 것이 비현실적이라면 승리하지 못하는 것이 맞다. 대신 루저는 승리로부터 고개를 돌려 다른 곳을 본다.’ 이런 식의 이야기이죠.
류승완 감독의 〈주먹이 운다〉에는 인생 막장인 두 사람, 태식(최민식)과 상환(류승범)이 등장합니다. 태식은 왕년에 권투를 좀 했던 모양이지만 지금은 나이가 지긋한 데다 경제적 능력도 꽝입니다. 아내는 견디다 못해 이혼을 요구하죠. 거기다 병원에서는 치매 초기 단계를 진단받습니다. 인생은 꼬일 대로 꼬입니다.
상환은 불량한 학생입니다. 폭행하고 돈을 갈취하다 소년원에 들어가죠. 할머니가 아픕니다. 아버지가 사고를 당해 죽습니다. 상환의 인생도 꼬일 대로 꼬이는군요.
두 사람에게 다시 삶의 의욕을 선물하는 건 권투입니다. 하루하루 최선을 다해 훈련합니다. 그리고 마침내 두 사람이 링 위에서 만납니다. 공이 울리면 태식과 상환은 치고받고 정말 치열하게 싸웁니다. 그들이 뻗는 주먹은 삶에 대한 의지입니다. 비정한 세상에 대한 몸부림이에요. 이쯤 되면 그들의 경기는 더 이상 권투가 아닙니다. 권투가 신성하게 보일 정도니까요.
마침내 경기는 최종 라운드까지 갑니다. 그리고 판정이 내려지죠. 두 사람 중 한 명은 승리하고, 다른 한 명은 패배합니다. 그러나 어쩐지 영화는 승리와 패배를 중요하게 다루지 않습니다. 그냥 자연스럽게 쓱 지나가죠.
경기를 마치고 태식과 상환이 찾는 사람은 각자의 가족입니다. 태식은 자기 아들을 부둥켜안고 아빠 아직 죽지 않았다고 되뇌고, 상환은 할머니를 껴안고 눈물을 흘립니다. 승리로부터 고개를 돌려 두 사람이 보는 건 그들이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군요.
〈주먹이 운다〉는 루저가 승리하는 모습을 다루지 않습니다. 갑자기 태식이 경제적으로 성공하거나 상환이 개과천선하는 모습은 나오지 않아요. 그게 현실적이기 때문입니다. 루저가 승리하지 않음으로써 비현실성의 문제를 극복합니다. 그래서 전통적인 루저의 반란과는 조금 다릅니다.
대신 〈주먹이 운다〉는 승리를 향해 나아가는 힘든 과정에서, 승부의 결과와는 관계없이 언제나 내 옆에 있어 주는 사람들에 주목합니다. 나의 작은 성취, 못난 실패마저 함께해주는 사람들에 주목하죠.
부부 감독으로 잘 알려진 밸러리 패리스와 조나단 데이톤의 〈리틀 미스 선샤인〉도 그렇습니다. 아카데미 각본상을 받은 이 영화는 처음부터 끝까지 귀엽고 따뜻합니다. 어린 올리브(아비게일 브레스린)는 어린이 미인대회에서 우승하기를 꿈꿉니다. 하지만 못생겼어요. 올리브는 세상의 기준 아래에 있습니다.
그의 가족도 그래요. 성공학 강사이면서 정작 자신은 성공하지 못한 아빠, 패스트푸드 음식을 저녁 식사로 내놓는 엄마, 헤로인에 중독된 할아버지, 자살을 시도하는 삼촌, 자신이 색맹인 줄은 모르고 파일럿이 되기를 희망하는 오빠. 콩가루 집안이나 다름없죠.
모든 인물은 각자 결여되어 있습니다. 루저가 아닌 사람이 없어요. 그런데도 이들은 올리브의 꿈을 이루게 해 주기 위해 전 가족이 폐차 직전의 작은 승합차에 올라타고 캘리포니아 미인대회로 갑니다. 올리브는 우여곡절 끝에 겨우겨우 무대에 오르지만, 관객은 야유를 보내죠. 올리브의 요상한 춤을 보고 어떤 관객은 당황함을 감추지 못하고, 어떤 관객은 그냥 일어나 나가버립니다.
하지만 똑같이 루저인 그의 가족은 끝까지 올리브를 응원합니다. 그리고 그들은 무대에 올라 그 요상한 춤을 함께 춥니다. 난장판을 만들어버리죠. 그들의 무대가 끝나고 손뼉 치는 사람은 음악감독 한 사람뿐입니다. 나머지 관중들은 올리브 가족을 외면해요. 결국 올리브 가족은 이제 다시는 캘리포니아 미인대회에 참가하지 않겠다는 조건으로 거기서 쫓겨납니다. 그들은 다시 작은 승합차에 올라타고요. 도로 위로 멀리 운전해 나갑니다.
올리브의 가족은 단 한 번도 승리하지 못합니다. 주변 사람들로부터 냉소 받고 무시당해요. 그러나 그들은 올리브의 미인대회 참가 과정에서 함께 똘똘 뭉칩니다. 그들이 승리하지 못했음에도 그 과정에서 찾은 건 못난 모습에도 함께 응원하며 살아가는 가족인 것이죠.
〈수영장으로 간 남자들〉이 비현실성을 극복하는 3가지 방법
겨우 〈수영장으로 간 남자들〉로 돌아왔군요(이 영화를 브런치 무비패스로 봤기 때문에 관련해서 글을 썼어야 했는데, 이 영화 얘기는 안 하고 다른 영화 얘기만 한참 했네요). 자, 〈수영장으로 간 남자들〉은 몇 번째 사례에 해당할까요? 좀 특이한데요. 이 영화, 놀랍게도 3가지 사례의 특징을 모두 조금씩 갖추었습니다.
앞서 〈포레스트 검프〉가 포레스트에게 루저도 이길 방법을 제시한다고 했는데요. 〈수영장으로 간 남자들〉도 네모와 동그라미라는 상징을 통해 특정한 방법을 제시합니다. 영화가 시작되면 아주 인상적인 내레이션이 나옵니다. 대사를 다시 보고 싶어 영어로 된 자막 파일을 구했습니다.
일단 당신이 알아야 할 것은 이 영화는 별거 없다는 사실이다. 단지 모순되는 두 도형에 대한 것이다. 이 영화는 아무 목적 없이 불타는 멍청하고 동그란 해 주위를 역시 목적 없이 도는 멍청하고 동그란 지구에 대한 이야기이다. 임부 뱃속의 동그랗고 끈적한 것에 대한 이야기이다. […] 자유의 동그라미. 소피의 동그란 눈, 사만다의 동그란 가슴, 사람들의 동그란 안경. 동그라미.
You need to know from the get-go, this is about nothing. Just a geometrical contradiction. The story of a dumb, round planet revolving aimlessly around a dumb, round sun burning aimlessly. The story of a round belly purposefully containing a round, gooey thing. That becomes an un-gooey thing. That looks at lots of round things. The rounds of freedom. Sophie’s round dots, Samantha’s round rounds. As round as people’s round glasses. Round.
동그라미에 대해서 설명하는군요. 동그라미를 해, 지구, 뱃속의 생명, 자유 등에 비유합니다.
이건 한편으로 곡선이 뻣뻣하게 꺾이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중략) ‘우리 그만 만나’라고 말하는 네모난 턱, 사람들의 네모난 안경, 네모난 게임, 네모난 사무실, 아빠의 암처럼 네모난 것. 네모.
It’s also the tale of a curve going straight and becoming a rigid angle. A square squishing a round with the rule book. A squared-off morality tale. Square education. Like square food at school, college, university. Square to the jaw like ‘It’s over!’. As square as square people’s glasses. Square games. Square office life. Square like your father’s cancer. Square.
반면 네모는 교육, 관계를 끝내는 입, 사무실, 아빠의 암으로 비유하는군요.
자, 그래서 이 이야기의 ‘모순점’이 뭐냐. 우리가 확실하게 알 수 없는 것이 별로 없다고 해도 이것 하나는 확실하다. 네모는 절대 동그란 구멍에 들어갈 수 없다. 절대로. 반대도 마찬가지다.
So we come to the contradictory aspect of our story. Of the few things we can be sure of, there is one even the worst skeptics cannot call into question. A square peg never fits in a round hole. Never. And vice versa.
동그라미와 네모는 화합할 수 없다. 영화는 이렇게 단언하고 시작합니다. 내레이션에는 안 나오지만 영상에서는 네모를 설명하던 중에 무덤의 비석을 보여주거든요. 그러니까 동그라미는 생명과 자유를, 네모는 죽음과 억압을 상징하는 것 같은데요. 영화의 마지막 내레이션도 한번 보겠습니다.
한 가지는 이제 확실해졌다. 바라는 마음이 있다면, 동그라미는 네모난 구멍에 들어갈 수 있다. 반대도 마찬가지다.
One thing is now certain, and the most skeptical will never call it into question. If the desire is there, a round peg will fit in a square hole. And vice versa.
아하. 동그라미와 네모가 결국 화합했군요. 바라는 마음이 있다면 동그라미와 네모가 화합할 수 있다. 이것이 〈수영장으로 간 남자들〉의 주제입니다. 말하자면 이 영화가 제시하는 ‘루저가 이길 방법’입니다. ‘루저의 반란’이라는 키워드로 네모와 동그라미를 해석해보자면, 네모는 루저들이 절대 이길 수 없는 세상을 은유하고, 동그라미는 루저들도 기쁘게 살 수 있는 세상을 은유한다고 보아도 무리가 없을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이 영화는 동그라미와 네모가 화합할 수 없다고 선언하면서 시작해서, 바라는 마음이 있다면 화합할 수도 있다고 말하면서 끝나는데, 이것은 ‘루저들은 절대로 세상에 이길 수 없다’고 선언하면서 시작해서 ‘(우리가) 바라는 마음이 있다면 루저들도 세상에 어울릴 수 있다’고 말하면서 끝나는 셈입니다.
〈수영장으로 간 남자들〉에는 동그라미와 네모가 정말 많이 나옵니다. 영화 속 루저인 주인공들이 현실의 벽에 가로막혀 좌절할 때 화면 안에는 항상 네모가 있습니다. 네모난 수영장, 네모난 창문, 네모난 사무실, 네모난 타일, 네모난 가구, 네모난 주차장.
반면 그들이 처음으로 함께 국제 수중발레 대회에 나가기로 결정하는 순간의 화면 안에는 동그라미가 있습니다. 대회를 마치고 돌아오는 저녁, 그들은 잠깐 버스에서 내려 노을을 바라봅니다. 그들을 맞이하는 것은 동그란 해입니다.
‘루저의 반란’의 비현실성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수영장으로 간 남자들〉은 상징으로 대답합니다. 현실적인 이야기로 대답하는 것이 아니라, 바라는 마음이 있다면(If the desire is there) 루저도 세상에 이길 수 있다고 말합니다. 아니 잠깐, 이거 너무 뜬구름 잡는 얘기 아닌가요? 확실히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습니다.
어쨌든 이것이 루저가 세상에 이길 방법에 대한 이 영화의 대답입니다. 〈포레스트 검프〉가 ‘달리라’는 주문으로 포레스트의 성공을 납득시켰다면, 〈수영장으로 간 남자들〉은 ‘동그라미와 네모가 화합할 가능성’을 통해 루저들도 승리할 수 있다고 대답합니다.
한편, 이 영화 좀 웃깁니다. 그런데 상황으로 웃긴다기보다는 인물의 기질로 웃깁니다. 등장인물들이 약간씩 바보처럼 나오거든요. 그러면서도 인물을 막 희화화하는 건 아니고, 약간 모자란데 그래도 마음은 착한 친구 정도로 나와요. 앗, 이건 〈족구왕〉과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의 전략인데요. 코미디, 나사 빠진 인물들의 콩트. 〈수영장으로 간 남자들〉은 영화 속 인물들을 (영리하게도) 만화적으로 그려내면서 영화의 현실성이 좀 부족해도 괜찮은 모양새를 갖춥니다.
그런가 하면 〈수영장으로 간 남자들〉은 문제를 실질적으로 해결하지 않으면서 영화에 현실성을 부여하기도 합니다. 어떤 인물의 엄마는 치매를 앓습니다. 영화가 끝날 때까지 치매를 앓죠. 우울증을 앓던 인물이 결과적으로 우울증을 극복했는지는 영화는 말하지 않습니다. 음악에 재능이 없는 아마추어 뮤지션은 끝내 히트곡 하나 만들지 못합니다.
분명 이들은 국제대회에 참여해서 놀랄만한 성과를 거두기는 합니다. 그러나 이어지는 시퀀스에서 그들이 모두 한자리에 모여 신문을 봅니다. 아무런 기사가 없습니다. 누군가 소리칩니다.
국제대회에서 메달을 따왔는데 신문에 안 나와?
그러자 옆에 있던 다른 사람이 힘없이 대답하죠.
내일 나오겠지 뭐.
그러나 영화는 끝까지 그들이 신문에 실리는 모습을 보여주지 않습니다. ‘우리는 잠깐 동안 국가적 영웅이 되는 꿈을 꾸었지만, 그런 환호를 받지는 못할 것이다’는 내용의 내레이션이 나오기도 합니다.
이 영화는 〈주먹이 운다〉와 〈리틀 미스 선샤인〉이 그랬던 것처럼 루저가 승리하는 모습을 다루지 않습니다.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바로 여기서 동그라미와 네모로 제시했던 영화의 주제, ‘화합’으로 이어집니다. 동그라미가 네모에 들어가고, 그 반대도 마찬가지라는 말과 함께 끝나요. 그러고 보면 이 영화가 궁극적으로 제시하는 것은 ‘루저도 세상에 이길 방법’이 아니라 ‘루저와 세상이 화합할 가능성’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원문: Discus의 브런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