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조정래 작가의 『천년의 질문』은 제목에서 풍기는 신비하고 고답적인 분위기와는 다르게 지금-여기의 한국 사회를 정면으로 겨냥한다. 방금 ‘한국 사회’라고 썼지만 사실 이 단어에 대한 엄밀한 정의부터가 쉽지 않다. ‘한국’은 구획된 영토를 가진 국가의 이름이기 때문에 어려울 게 없지만 문제는 ‘사회’다.
1896년 갑오개혁 정부가 일본에 파견한 유학생 단체인 ‘대조선인일본유학생친목회’가 펴낸 『친목회회보』에 처음 그 단어가 등장한 이래 ‘사회’라는 말은 다양한 정치적 입장이 치열하게 경합하는 장이었다. “사회는 없다. 개인으로서 남성과 여성, 그리고 가정만이 존재할 뿐이다.”라는 마가렛 대처의 말은 아마 관련해 가장 극단적인 동시에 광범위하게 퍼져 있는 관점일 것이다.
하지만 마가렛 대처의 말과 다르게 우리는 매일매일 ‘사회’를 마주하며 살아간다. 무엇보다 아침마다 펼쳐보는 신문에서 ‘사회면’을 피해갈 수 없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으로 이어지는 현실 재현의 카테고리 역시 여전히 강력한 힘을 발휘한다. ‘문학과 사회’라는 유서 깊은 문학 잡지가 존재할 정도로 문학과 사회의 관계는 뿌리 깊다.
하지만 최근의 문학은 여간해서는 직접적으로 사회와 대면하려 하지 않는다. 기존 사회의 문제를 얼마나 직접적으로 재현/고발했는가에 문학성을 판단하는 기준이 있다고 여겨지지 않기 때문이다. 오히려 사회의 문제를 간접적이고 알레고리적인 형상을 통해 세련되게 제시하는 것이 훌륭하고 좋은 작품의 미덕처럼 이야기되기도 한다.
그런 문학적 풍토를 염두에 두었을 때 조정래 작가의 『천년의 질문』은 과감하고 독특하게 다가온다. 먼저 눈에 띄는 건 한국 사회의 정치, 법, 교육, 예술 등을 여러 부문 망라하며 자리 잡은 적폐를 직시하고 글쓰기를 통해 고발해내려는 계몽적 의지다. 조정래 작가는 마치 마가렛 대처의 저 신자유주의적인 교리를 정면으로 반박하려는 것처럼 이 소설을 통해 우리가 사회라고 느끼고 인식하는 실체를 구성해내려고 시도한다.
신자유주의와 각자도생이 혼종적으로 결합해 맹위를 떨치는 지금 이 시대에 이와 같은 작업에 나선다는 건 여느 작가로서는 함부로 시도하지 못할 커다란 스케일의 작업임은 물론이다. 하지만 『태백산맥』, 『아리랑』, 『한강』을 거쳐 최근의 『정글만리』에 이르기까지 유장한 호흡으로 장편 소설을 집필해 온 조정래 작가의 ‘내공’이 여기서 빛을 발한다. 『천년의 질문』에서는 재벌, 법조, 언론, 사립대학 등에 도사린 한국 사회의 적폐가 흥미진진한 서사 속에서 몰입감 넘치게 펼쳐진다.
2.
이 소설은 성화그룹 비자금 사건을 좇는 민완 기자 장우진의 이야기를 뼈대로 다양한 인물들의 이야기가 결합하는 형식으로 짜여 있다. 먼저 장우진은 평범한 서울대 학생으로 성화그룹 회장의 간택을 받아 ‘부마’가 된 김태범이 성화그룹의 비자금을 관리하는 차명계좌 장부를 훔쳐 잠적했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이 장부를 확보하고자 한다.
성화그룹은 소설 속 가상의 그룹이지만 이 성화그룹의 모티브가 무엇인지 알아차리기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2008년 조진웅 특검은 삼성 이건희 회장의 비자금 4조 5,000억 원이 든 차명계좌 1199를 발견했다고 발표한 바 있다.
한편 재벌가 사위로 살면서 비인격적인 대우를 당하면서 아이를 지키기 위해 양육권 소송에 나선 김태범 역시 자연스럽게 이부진 호텔 신라 사장의 남편 임우재 전 고문을 떠오르게 만들며, 일이 뜻대로 풀리지 않으면 임직원을 세워놓고 악을 쓰면서 손에 잡히는 대로 물건을 던지는 김태범의 아내 안서림은 우리가 익히 아는 그 사람을 모델로 한 것이다. 이런 예에서 드러나듯 이 소설은 최근 한국 사회를 달군 여러 사건을 그대로 차용하길 주저하지 않는다.
따라서 평소에 정치나 사회에 관심이 많은 독자라면 이 소설의 내용과 한국 사회를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사건을 비교해가며 읽는 재미가 쏠쏠할 것이다. 적지 않은 인물과 다양한 사건이 얽힌 이야기이기 때문에 소설의 내용을 정리하기란 쉽지 않고, 또 그런 정리가 딱히 이 작품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는 것도 아니다. 그보다는 차라리 소설 속에 등장하는 여러 장면 중 인상 깊은 장면을 소개함으로써 이 소설이 가지는 매력과 특징을 보여주는 편이 나을 듯하다.
이 소설에서 인상 깊은 장면 중 하나는 금불상 반환 소송을 둘러싼 에피소드다. 안서림의 미술관에 보관하던 신라 금불상을 반환해달라는 스님의 소송에 맞서 성화그룹은 전관 출신 변호사를 고용하는데 이 소설에서 전관예우는 골치 아픈 문제를 단번에 해결해주는 ‘요술 지팡이’처럼 등장한다. 가령 안서림은 김태범과의 이혼 소송을 위해서도 가정법원 출신 전관 변호사를 고용하는데 그러자 김태범의 변호사는 어쩔 수 없다는 듯 체념한 목소리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알겠지만, 전관예우는 민형사 재판에서 안 통하는 데가 없어. 이리 얽히고 저리 얽히고 해서 다 선후배 관계니까. 그런데 그것을 압도하는 게 있어. 그게 바로 근무연 전관예우야. 바로 얼마 전까지 함께 근무했던 직속 상관이 사건을 가지고 나타난 거야. 이런 때 자넨들 어쩌겠어? 꼼짝 못 하잖아. 그분을 이기게 해드려야지. 그게 우리나라식 의리고 인정이잖아.
법과 양심에 비춰 판결하는 게 아니라 의리와 인정에 기대 판결하는 이러한 행태는 분명 잘못된 것이지만 문제는 이것이 ‘불법’이 아니라는 데 있다.
“그게 말이야, 불법이 되려면 그걸 금지한다는 법이 명확히 있어야 하는데, 전관예우를 허용하는 법도, 금지하는 법도 아예 없거든.”
“근데 그따위 게 왜 생겨난 거야? 언제부터 그따위 짓들 해 온 거야?”
김태범의 말에는 점점 더 열기가 오르고 있었다.
“글쎄, 법관으로 평생을 바쳐온 선배에 대한 예우랄까, 보너스랄까. 하여튼 그 편리한 ‘관행’이라는 말로 해온 일이야. 그게 말썽이 되면서도 수십 년 동안 계속되어 왔으니까, 그게 언젤까? 박정희 때? 아니, 이승만 때부터였는지도 모르지. 어쨌든 끈질기게 이어져 왔어.”
조정래 작가는 이 에피소드를 통해 ‘관행’이라는 이름으로 묵인되어왔던 전관예우를 반사회적 ‘범죄’로 명토 박는다. 사실 이 문제는 김두식 교수의 『불멸의 신성가족』(창비)에서도 깊이 다루어졌던 문제지만 의외로 큰 사회적 문제로 받아들여지지는 않는다. 이는 전관예우가 평범한 사람들의 삶과 동떨어진 토픽이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가 소송에서 전관 변호사를 쓸 확률은 거의 없지 않은가.)
하지만 ‘그들만의 리그’는 일반인의 삶과 동떨어졌다는 바로 그 이유로 생성되고 번성한다. 평범한 사람들이 두 눈을 부릅뜨고 감시해도 쉽지 않은 일이 평범한 사람들의 삶과 멀리 떨어진 곳에서 비일비재하게 벌어지는 현실 앞에 착잡함을 느끼지 않을 독자는 없을 것이다. 참, 안서림의 금불상 소송은 어떻게 되었을까? 1심에서 안서림의 손을 들어준 판사가 항소심 변호사가 되어 나타남으로써 게임 오버. 그런데 과연 이런 일을 단지 소설적인 설정으로 치부할 수 있을까?
3.
최근 초등학생들한테까지 큰 인기를 끄는 노래 중에 〈천태만상〉이라는 곡이 있다. 신나고 흥겨운 트로트 곡인데 노래의 가사는 다음과 같다.
천태만상 인간 세상 사는 법도 가지가지 귀천이 따로 있나 재판한다 판사 변호한다 변호사 범인 잡는 형사 계룡산에 부채도사 연구한다 박사 운전한다 기사 (후략)
아마 이 노래를 신나게 따라 부르는 초등학생들은 판사는 재판하고 변호사는 변호한다고 믿을 것이다. 하지만 ‘천태만상 한국 사회’에서는 재판하던 판사가 재빨리 옷을 갈아입고 변호하는 변호사가 되기도 한다. 그리고 ‘전관예우’라는 막강한 보너스에 힘입어 수 년 만에 수백 억대의 수임료를 받아 챙긴다. 아무리 사는 법도 가지가지라지만 과연 이 사람들을 이렇게 살게 내버려둬도 되는 걸까? 이 소설은 우리에게 거듭 이와 같은 질문을 던지게 만든다.
한편 ‘연구하는 박사’라는 노래 가사도 이 소설이 보여주는 ‘천태만상 한국 사회’에는 들어맞지 않는다. 독립운동하듯 탐사보도에 몰두하는 장우진의 절친한 후배인 고석민은 10년 넘게 ‘보따리장수’를 면치 못하는 사회학 박사다. 어린아이들이 따라 부르는 노래에서도 박사는 분명 연구하는 사람이라 나와 있는데 정작 고석민이 하는 건 고향 국회의원 윤현민의 칼럼을 대필해주고 푼돈을 챙기는 일에 불과하다.
고석민이 그런 신세를 면치 못하는 건 당연히 ‘전임 교수’가 되지 못했기 때문이지만 그가 전임 자리를 꿰차지 못한 게 부족한 그의 실력 때문인 건 아니다. 학생 시절 모교에 밉보인 건 어쩔 수 없다 하더라도 지금의 대학은 또 다른 기업으로써 이윤을 위해 막대한 수의 비정규직을 고용하기 때문이다. 이따금 가뭄에 콩 나듯 전임 채용 공고가 올라오지만 안타깝게도 고석민은 늘 그런 채용 공고를 ‘보는’ 사람이다. 이게 무슨 말인가?
전국 대학들이 인터넷에 띄우는 그 공고를 따라 수만 명의 시간강사들은 제각기 가슴 조이는 기대를 품고 원서를 내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백발백중 떨어진다. 이유는 명백하다. ‘인터넷 공고’를 본 죄와 그것을 믿은 죄 때문이다. 인터넷 공고는 ‘객관적인 공정한 채용’을 입증하는 증거물, 요식행위일 뿐이고 합격자는 인터넷 공고를 볼 필요가 없는 사람으로 이미 정해져 있었던 것이다. (중략) 그것은 군대의 상습 폭행처럼, 연예계나 연극계의 성폭행과 성추행처럼, 체육계의 상습 폭행과 성폭행처럼, 모든 권력층의 부정부패처럼, 모든 기업들의 탈세와 비자금처럼 다 짐작하고 알면서도 모르는 척 외면하고 침묵하고 묵인해 온 병폐였다.
이와 같은 일련의 에피소드들은 우리가 사는 한국 사회가 얼마나 투명하지 못한 곳인지 냉철하게 일러준다. 정치인은 유권자와의 관계에서 투명하지 않고 대학은 구성원들과의 관계에서 투명하지 않으며 언론은 독자와의 관계에서 투명하지 않다. 언론인은 명절 선물을 보낸 재벌 기업 사장에게 머리를 조아리며 충성을 맹세하고 대학은 고용의 부담을 지기 싫다며 강사들을 일거에 해고한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국민들은 언론이 하는 말을 투명하게 믿지 않고 대학이 내세우는 고담준론에 냉소한다.
사회의 불투명함이 나쁜 건 단지 눈에 보이는 부정부패 때문이 아니라 이렇게 사람들을 위악과 냉소에 물들게 하기 때문이다. 모두가 모두를 속이는 세상에서, 겉과 속이 다른 세상에서, 내세우는 가치와 뒤에서 취하는 이익이 같지 않은 세상에서 우리는 속지 않으려 항상 날을 세운 채 살지 않을 수 없다. 속지 않기 위한 유일한 길을 아무것도 믿지 않는 것이다. 그렇게 한국 사회에는 불신과 냉소가 가득 차게 되고 이는 사회를 새롭게 바꿔나가려는 움직임을 무기력하게 갉아 먹는다.
그렇기 때문에 이 소설 역시 자칫 그러한 냉소와 위악에 복무할 위험이 있다. 하지만 조정래 작가는 한국 사회를 더 나은 곳으로 바꿔나가려는 희망적인 움직임에도 공평하게 노력을 할애한다. 소설 속에 자주 등장하는 ‘민변(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과 ‘참여연대’가 대표적이다. ‘기레기’가 아니라 진실한 정의감으로 가득 찬 장우진이 걸린 갖가지 소송을 “기본 수임료의 열 배라도 받는 것처럼 열성적으로, 마치 자기들이 당한 억울함처럼 뜨거운 열정을 쏟”는 민변 소속 변호사들과 시민들의 자발적인 감시의 힘을 보여주는 참여연대와 같은 시민단체들에게서 조정래 작가는 한국 사회의 희망을 본다.
그 희망은 소설의 결말에서 ‘너와 나 나라 사랑하는 모임’의 창립과 그 창립 모임에서 낭독되는 김종철 『녹색평론』 발행인의 글 속에서 더욱 또렷하게 부각된다. 「시민권력과 시민의회」라는 글에서 김종철은 “‘시민권력’의 지속성을 담보하는 제도로서 우리가 구상할 수 있는 가장 현실적이고, 설득력 있는 대안”으로 ‘시민의회’의 설립을 주장한다. 물론 소설에서 이와 관련된 더 진척된 아이디어를 발전시키는 건 아니지만 조정래 작가가 결국 이 소설을 통해 독자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인지를 느끼는 덴 어려움이 없다. 조정래 작가는 국가와 국민이 분리되고 소외된 작금의 구조를 넘어 국민이 국가의 진정한 주인이 되는 사회를 만들어야 함을 역설하는 것이다.
박근혜가 대통령에 당선되면서 파리로 피신했던 장우진은 스톡홀름으로 가서 스웨덴 국회를 견학하고 충격을 금치 못한다. 단 두 명의 입법조사관의 도움으로 수많은 법안을 발의하면서도 점심은 간단히 도시락을 싸서 먹고 자전거로 출퇴근을 하며 사회로부터 어떠한 특권을 지니는 것도 용납되지 않지만 더 나은 나라를 만든다는 사명감 하나로 일하고, 그렇기 때문에 국민들로부터 신뢰받고 존경받는 정치인들의 모습이 정말 딴 세상 이야기처럼 다가왔기 때문이다.
물론 우리가 부러워하는 어떤 나라의 문화와 제도는 역사적 배경을 가지고 형성된 것이기에 그 좋은 점만을 취해 간단히 이식할 수는 없다. 하지만 조정래 작가는 우리라고 해서 그런 정치 시스템을 못 만들 게 무어냐고 외려 묻는 듯하다. 아닌 게 아니라 우리에게는 촛불 혁명이라는, 세계가 감탄하고 부러워할 만한 창조적 저항의 자산이 이미 있지 않은가.
문제는 그 창조적 저항의 힘을 어떻게 제도적인 개혁으로 이어나가느냐 하는 일일 터, 시민들의 자발적인 힘과 관심을 모을 수만 있다면 “짧은 정권, 긴 자본, 무사안일 국가 권력층”이 단단히 결합된 우리 사회의 변화 역시 마냥 먼 미래의 일만은 아닐 것이다. 『천년의 질문』은 바로 그 미래를 앞당길 힘이 이미 우리 자신의 손에 쥐어졌음을 강조한다. 선택은 우리의 몫이다.
※ 해당 기사는 해냄출판사의 후원으로 제작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