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인에게 커피란 무엇일까? 건강상의 이유로, 혹은 취향 때문에 마시지 않는 경우를 제외한 많은 노동자에게 커피는 직장이란 전쟁터에서 버티기 위한 생존 연료다. 살기 위해 마시고 습관처럼 마시고 무의식적으로 마신다. 나 역시 출근길, 미팅, 회의 등등 인사처럼 건네는 커피를 다 마시면 하루에 5–6잔은 훌쩍 넘을 것이다. 일정량 이상의 커피를 마셨을 때 생기는 부작용 때문에 하루에 두 잔 이상의 커피를 마시지 않도록 애써 노력한다.
내일 당장 지구가 멸망한다고 하면 누군가는 사과나무를 심겠다고 했다. 하지만 나는 커피를 마실 것이다. 전문가가 아니기 때문에 커피의 특정 성분으로 인해 몸에 생기는 과학적 반응 따위는 모르겠다. 다만 커피를 마시는 동안 커피가 주는 안정감과 여유가 나를 편안하게 만든다.
그래서 나는 언제나 커피가 필요하다. 프리랜서라는 이름의 보따리 장사이기 때문에 새로운 일터에 가면 으레 근방의 괜찮은 카페를 찾아 유랑한다. 이 즐거운 숙제가 있기에 한없이 무거워지는 출근길 발걸음이 한결 가벼워진다. 그렇게 많은 실패와 좌절 속에 마주한 보석 같은 카페가 있다. 이 글에서는 방송국 언저리에서 발견한 내 취향의 커피를 파는 몇 곳을 소개한다.
상암동 CJ E&M, MBC, YTN, JTBC 근처 ‘커피템플’
2011년. 상암동이 지금처럼 방송국으로 들어차기 전, 하나 둘 거대한 빌딩들이 모양을 갖춰갈 때쯤이었다. 카페 하나가 ‘커피템플’이라는 간판을 올렸다. 그때까지만 해도 부침 많은 상암동 카페계의 터줏대감이자 조상님이 될 줄은 몰랐다. 당시만 해도 이렇다 할 카페가 전무했기 때문에 제대로 된 커피를 찾아 방황하던 카페인 하이에나들이 귀신같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나도 촉이 빠른 동료들의 추천을 받고 처음 ‘커피템플’에 발을 들였다. 그곳에는 (당시에는) 뽀글뽀글 아프로 헤어(?) 스타일에 콧수염을 살짝 기른 바리스타가 인상 좋은 웃음을 가득 품고 커피를 내렸다. 커피를 주문하고 커피가 나오길 기다리며 카페 내부를 둘러보니 각종 상장과 상패로 가득했다.
나중에 알게 되었는데 처음 그분은 한국 4대 바리스타 중 한 명으로 꼽히는 유명한 바리스타였다. 그리고 또 늘 그의 곁에서 생글생글 잘 웃고 손님들의 얼굴을 찰떡같이 기억해주던 여성 바리스타는 그분의 아내라고 했다. 이곳은 상큼 달콤한 과일 맛이 나는 JUICY와 달콤 쌉쌀한 초콜릿 같은 맛이 나는 CLASSIC 두 가지의 원두 중 하나를 고를 수 있다. 나의 선택은 늘 후자다. 기분 전환이 필요할 때는 이곳의 시그니쳐인 텐저린 카푸치노를 마신다.
향긋한 오렌지향이 내가 ‘커피템플’의 커피를 사랑하는 이유는 정성 들인 맛 때문이다. 사무실이 밀집한 지역의 특성상 많은 사람들이 밀려들 때는 영혼이라고는 1도 없는 커피 콩이 탄 검은색 물을 주는 경우가 종종 있다. 하지만 이곳은 사람이 얼마나 밀려 있더라도 시간과 공을 들여 커피를 만들어 준다.
상암동의 산업역군들은 생명수를 하사 받은 전사처럼 부부 바리스타가 내린 커피를 받아 들고 각자의 일터로 향한다. 지금이야 상암동의 카페들의 커피맛이 상향 평준화되어 ‘커피템플’의 메리트가 희미해진 건 사실이다. 하지만 첫정을 주었기 때문일까? 상암동에 무수한 카페가 유혹을 해도 진짜 커피가 마시고 싶을 때는 ‘커피템플’로 향한다. 시간이 흘러도, 유행이 지나도 ‘커피템플’의 커피 한 잔에 담긴 진한 감동과 따뜻한 위로는 변함없기 때문이다.
목동 SBS 근처 ‘와플베르비에’
이름에서 보듯이 와플집이다. 근데 와플은 한 번도 먹어 보지 못했다. 늘 1분 1초를 재촉해야 하는 출근길 혹은 식사 후 배가 부를 때 갔었기 때문에 굳이 와플을 주문하지 않았다. 굽는데 시간이 걸리기 때문이다. 언젠가 여유 좀 있을 때 와플이랑도 같이 먹어봐야지 했는데 결국 먹어 보지 못한 채 프로젝트를 끝냈다(이 글을 쓰기 위해 관련 후기들을 찾아보니 커피에 주력하기 위해 몇 달 전부터 와플은 접고 커피에 올인한다고 한다).
이곳은 커피 리브레, 테라로사, 커피 몽타주 등 유명 커피 명가에서 원두를 가져온다. 각기 특색과 개성이 넘치는 커피를 기분에 따라, 취향에 따라 선택해 마실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나는 주로 몽타주를 선택한다. 보통은 아이스 아메리카노, 몸이 좀 으슬으슬하면 따뜻한 아메리카노, 마음의 여유가 필요할 때는 아이스 라테를 마신다. 커피 몽타주의 대표 블렌드인 ‘Bitter Sweet Life’는 이름 그대로 신맛이 거의 없고 단맛이 좋은 깔끔한 커피다. 산미 있는 커피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 나에게 딱이다.
피크를 피해가도 언제나 사람들로 북적인다. 젊은 바리스타들과 그들을 지휘하는 중년의 사장님이 분주하게 움직인다. 마치 오케스트라의 연주를 보듯 일사불란하고 체계적이다. 그 움직임을 보고 있으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곳을 찾는지 알 수 있다. 워낙 손이 빨라 오래 기다리지 않아도 큰 비용을 지불하지 않아도 일정 수준 이상의 커피를 맛볼 수 있다. 이것이 바로 내가 ‘와플베르비에’를 사랑하는 이유다.
여의도 KBS 별관 근처 ‘그레이 에스프레소’
한 건물당 1개 이상의 카페가 있는 카페의 격전지 동여의도에서 꽤 많은 사랑을 받고 있는 곳이다. 근처의 직장인, 아파트 주민은 물론 주한 인도네시아 대사관 근처에 있기 때문에 대사관 직원들도 자주 보인다. ‘그레이’라는 이름처럼 카페 내부도 회색톤에 스틸 인테리어 위주로 심플하고 간결하다.
플랫 화이트를 잘하는 집으로 알음알음 알려져 있지만 나는 10번을 가면 8번은 아메리카노를 마신다. 아메리카노나 에스프레소를 주문하면 두 가지 원두 중 하나를 선택할 수 있다. 산미, 단맛과 쓴맛이 조화를 이룬 #8 Bitter Sweet과 고소함과 풀바디를 장착한 #8.5 Buttery. 거의 후자를 택한다.
바리스타 대회에서 수상 경력이 있는 유명 바리스타가 내려주는 아메리카노는 그의 헤어스타일을 닮았다. 한 올 흐트러짐 없이 깔끔하고 세련된 맛이다. 헤픈 웃음도 없고, 선을 넘는 친절도 없다. 그저 바리스타라는 임무에 충실해 맛 좋은 커피를 내릴 뿐이다. 군더더기 없는 그 맛과 분위기 그리고 친절이 자꾸 나를 그곳으로 향하게 만든다.
나에게만은 특별한 카페
신기하게 세 곳 모두 테이블도 몇 개 없고, 테이크 아웃 위주의 카페다. 작업하기 좋은 넓은 테이블이나 화려한 인테리어는 없다. 대신 커피에 대한 자부심이 있고, 수평적인 서비스가 있다. 누군가에게는 발에 차이는 카페 중 하나일 것이다. 하지만 나에게만은 특별하다. 프리랜서라는 허울 좋은 이름을 가졌지만 프로젝트가 끝날 때마다 상암동, 목동, 여의도를 보따리 장사처럼 떠돈다.
어느 한 곳에 뿌리내리지 못하는 몸과 마음의 불안은 프리랜서의 숙명이다. 쓰나미처럼 밀려오는 불안을 잠재울 수 있는 힘은 앞서 소개한 그 카페의 커피 덕분이었다. 부디 이 보따리 장사가 끝나는 날까지 나의 사랑스러운 카페들이 오래도록 그 자리를 지켜 주길 빈다.
원문: 호사의 브런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