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더 이상 당신을 사랑하지 않아.
사랑하는 관계에서 이보다 더 위력적인 말은 생각하기 어렵다. 상대방으로서는 이 말 앞에서 할 수 있는 말이 거의 없다. 그나마 할 수 있는 말은 당신은 실제로 나를 사랑하지만 잠시 착각하는 것이다, 당신의 감정과 언어는 일치하지 않는다, 당신이 언어를 잘못 고른 것이다, 정도일 뿐이다. 그러나 이런 말도 마지막으로 할 수 있는 최후의 수단, 비상수단으로서의 말일 뿐 그다지 효용이 있기는 어렵다.
언어에는 선언의 힘이 있기 때문에, 일단 이런 식의 언어가 발화된 이후에는 좀처럼 수정되기 힘들다. 마찬가지로 이 말은 말하는 본인도 구속한다. 상대를 더 이상 ‘사랑하지 않는다’라는 말은 터져 나온 그 시점부터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더 단단해진다. 처음에는 단지 감정적으로 터져 나온 말일지라도, 시간이 흐르며 그와 관련된 온갖 근거가 덧붙는다. 알고 보니 나는 예전부터 당신을 사랑하지 않아 왔고, 단지 다른 근거로 겨우 관계를 이어왔을 뿐이라는 생각이 힘을 얻는다.
사실 ‘사랑’이란 지극히 추상적인 단어고 실물이 없기 때문에, 사랑이 있다 혹은 없다 어느 쪽으로 생각하든 그 나름의 근거들을 찾을 수 있다. 결국 이 말은 한번 내뱉어짐으로써 상대와 그 자신을 구속하고, 어지간해서는 쉽게 철회되지 않은 채로, 점점 더 강화되는 위력을 지닌 무서운 말이다.
그렇기에 다른 온갖 말보다도 사랑의 관계에서는 이 말은 가급적 나오지 않는 게 좋다. 차라리 당신이 싫다, 나와 맞지 않는 것 같다, 짜증 난다, 지겹다, 권태롭다, 힘들다 같은 말들은 이만한 위력은 없다. 그런 말들은 구체적인 상황과 연계된 말이지만, ‘사랑이 있거나 없다’는 말은 구체적인 상황들, 개개의 사연, 몇몇 에피소드를 초월해 그 모든 걸 통괄하고 결국 가장 추상적인 위치에서 선언하는 말이기 때문이다.
사랑은 당신을 사랑한다고 하는 말로부터 시작된다. 사랑한다는 그 선언을 시작으로, 다양한 구체적인 행위들과 시간이 있게 된다. 당신을 사랑하기 때문에 전화하고, 만나러 가고, 보살피고, 어루만진다. 그러나 그 모든 일이 시작되기 위해서는 사랑의 말이 필요하다.
내 안에서 시작된 말이든(나는 그 사람을 사랑하는 것 같아) 혹은 그 사람을 향해 하는 말이든(나는 당신을 사랑해, 이제부터 사랑하게 되었어, 사랑할 거야) 그 말이 결국 사랑의 무수한 시간을 이끈다. 그 과정에서 여러 어려움, 이를테면 갈등, 싸움, 장애물, 생각과 성격 차이 같은 것들이 있다 한들, 그 모든 것은 ‘사랑하는 사이’라는 최초의 선언을 통해 극복될 수도 있는 것이다.
반대로 사랑의 말을 철회하는 순간 이제껏 견뎌왔던 모든 것들은 더 이상 견딜 필요가 없는 것이 된다. 어려움은 어려움 자체가 될 뿐이며, 더 이상 사랑의 비호를 받지 못한다. 사랑하기 때문에 극복할 수 있다는 그 추상적 차원의 믿음과 인내, 끌어당김이 상실되는 것이다.
사랑하지 않으므로 더 이상 대화를 할 필요도, 관계 개선의 노력을 할 필요도, 여러 어려움을 극복할 필요도 없다. 거기에서부터 관계를 위한 모든 일은 무용한 것이 된다. 그렇기에 이보다 더 위력적인 말은 없는 것이다. 추상적이기만 한 언어가 현실에 현현하여 실질적인 힘을 발휘하게 된다.
그러니 아무리 관계가 위기에 도래했다 할지라도, 이 말은 주의하는 것이 좋을 듯하다. 같은 상황에서도 이 말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몇 배로 더 많은 힘이 든다. 삶에서는 하지 말아야 할 말, 지켜야 할 말이라는 것이 있다. 또한 어떤 말은 실제로 우리를 비호해주며 우리의 삶을 이끌어준다. 사랑이라는 말은 여러 언어 중에서도 가장 힘이 강한 자리에 속해 있고, 그만큼 조심스레 다루지 않으면 안 된다.
원문: 문화평론가 정지우의 페이스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