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지 못하는 사람의 마음
세상 모든 일은 두 가지 영역으로 나뉩니다. 내가 어떻게 해볼 수 있는 능력의 영역과 어떻게 할 수 없는 마음의 영역 말이죠. 우리는 최선을 다할 수 있지만 그래도 사람의 마음을 어쩌지는 못하는 것 같아요.
짐 캐리 주연의 코미디 영화 〈브루스 올마이티〉에는 최악의 불운을 타고난 남자, 브루스가 등장합니다. 브루스는 자신의 불운을 저주하며 신을 탓하죠. 그래서 신은 자신의 능력을 브루스에게 나눠줘요. 하루아침에 브루스는 신이 되어 무엇이든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게 됩니다.
하지만 신의 능력으로도 통제하지 못하는 것이 있었습니다. 사람의 마음은 어쩌지 못해요. 그는 이미 멀어진 연인, 그레이스의 마음을 돌려보려 신의 능력을 써보지만 통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곧 깨닫습니다. 그녀의 마음을 돌리는 마법 같은 방법은 없으며, 자신이 할 수 있는 건 그저 그 사람의 행복을 빌어주는 것뿐이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마지막에 신이 물어봅니다. 그레이스가 돌아오기를 원하는지. 브루스는 아니라고 말해요. 행복이 무슨 의미이든, 그저 그녀가 진정으로 행복하기를 바란다고 대답합니다. 그리고 다들 아시다시피 그레이스는 브루스에게 돌아오고 해피하게 끝나죠.
중학교 때 비디오로 봤던 영화입니다. 그때 비디오에 붙어 있던 그림이 위 그림이었는데 엄마가 야한 영화 빌린 거 아니냐고 추궁하시던 기억이 나네요. 저에게 〈브루스 올마이티〉의 영향은 꽤 컸습니다. 사람의 마음은 내가 어쩌지 못한다는 사실을 생생하게 알려준 영화였거든요. 세상엔 신의 능력을 가져도 통제하지 못하는 것이 사람의 마음이라는 사실을 말이죠.
좋아하는 사람에게 고백하는 것까지는 내가 할 수 있는 영역이지만 그 사람의 마음을 내가 결정하지는 못하죠. 회사에 영혼을 갈아 넣을 수는 있어도 상사의 마음을 얻는 건 내가 통제하지 못하는 영역일 테고, 내 주변 사람들을 살뜰히 챙기는 것까지는 내가 할 수 있어도 그 사람들이 나를 좋아하도록 만들 수는 없을 거예요.
그런데 비극인 것은, 우리가 삶에서 원하는 건 바로 이 마음의 영역에 있는 경우가 많다는 건데요. 위에서 든 예시를 다시 보면 관계의 키는 모두 타인의 마음에 달려있습니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의 마음을 얻는 것이 고백의 목적일 것이고, 상사의 신뢰를 얻어 회사 내의 입지를 다지는 것이 회사에 헌신하는 목적일 테니까요. 신의 능력으로도 얻지 못하는 것이 사람의 마음이라는 설정은, 가장 얻기 어렵고 또 그만큼 얻어서 소중한 것이 사람의 마음이라는 사실을 상기해주는 것 같아요.
마음이 움직이는 방식
그래서 사람의 마음이 어떻게 움직이는지 들여다보는 일은 중요합니다. 타인을 이해하고 그들의 마음을 얻는데 도움이 될 테고, 결국 우리가 궁극적으로 원하는 게 바로 그런 것이라고 생각해서요. 비록 인문학이라는 단어가 오염된 지 오래지만, 그럼에도 사람의 마음에 대한 이해는 여전히 필요합니다.
마음은 어떤 식으로 움직일까요? 앞서 두 가지 영역이 있다고 했죠. 능력의 영역과 마음의 영역. 웃기는 건 두 영역이 반대로 움직인다는 사실인데요. 능력의 영역은 노력한 만큼 보상이 따르는 세계입니다. 적어도 내가 최선을 다 할 수 있는 세계죠.
그런데 마음의 시간은 반대로 갑니다. 『코끼리는 생각하지 마』라는 책이 있죠. 생각의 딜레마에 대한 책인데요. 누군가 코끼리 생각하지 마, 하면 우리는 코끼리를 생각하지 않기 위해서 코끼리를 생각하게 되죠. 책 자체는 정치와 프레임에 대한 내용이지만 제 생각엔 인간 마음의 원리를 밝히는 책으로 보아도 될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코끼리를 생각하지 않으려 할수록 생각할 수밖에 없는 것, 뭔가를 통제하려고 할수록 통제할 수 없는 것, 가까워지려 할수록 멀어지는 것, 이런 게 사람의 마음이라는 사실을 알려주는 것 같아요.
브런치를 시작할 무렵에 저는 글 한 번 써보겠다고 무진장 애썼어요. 문제는 글은 안 쓰고 애만 썼다는 거죠. 써야지, 써야지, 생각만 하다가 생각이 지나쳤고 곧 생각만 남게 되었습니다. 일단 글을 쓰려면 인풋을 늘려야 한다. 그러려면 이러저러한 책을 읽어야 하고, 거기서 나만의 주제를 찾아야 한다. 나만의 주제를 찾으려면 나를 잘 알아야 한다…. 저는 출구 없는 자아 찾기에 빠져있었어요.
그런데 사실 알았습니다. 글을 쓰려면 그냥 쓰면 된다는 사실을요. 좋은 글을 쓰는 가장 빠른 방법이 뭔지 아시죠? 일단 쓰는 거잖아요. 알면서도 너무 많은 시간을 고민만 하면서 보냈습니다. 두려워하는 데 썼어요. 저에게 필요한 건 반복해서 글을 쓰는 시간뿐이었는데 말입니다. 쉽게 말하면 완벽주의에 빠져 있었어요. 완벽한 글, 좋은 글을 쓰고 싶다는 욕망이 깊어질수록 점점 글 쓰는 일 자체를 피했습니다. 글을 쓰는 리스크가 커졌기 때문이죠.
실제로 글을 쓰기 시작한 건 그로부터 한참 뒤의 일입니다. 좋은 글을 쓰고 싶다는 욕망도 잦아들고 좋은 글을 결정하는 저만의 기준도 모호해질 무렵이었어요. 첫 글이 봉준호 감독에 대한 글이었어요. 그때 마음은 이랬습니다. 완성이나 하자. 하기로 한 거니까 하자. 그렇게 몇 개월 묵었던 글을 하루 만에 후딱 정리해서 올렸습니다. 말하자면 완벽주의를 버리고 완성주의로 나아갔다고 할까요.
잘하려고 할수록 잘 안 되는 것, 통제하려고 할수록 통제를 벗어나는 것. 이런 게 마음이 움직이는 방식인 것 같아요. 마음은 우리의 의지와 반대로 움직이곤 합니다.
마음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
그런데 이쯤 되면 전에 했던 말이 떠오릅니다. 행복하려고 할수록 행복해지지 않는다는 말이요. 행복은 오히려 행복에 연연하지 않는 마음과 관계해요. 행복을 통제하지 않으려는 마음이 우리를 진정한 행복으로 이끌거든요. 브루스가 연인의 마음을 얻으려는 욕심을 포기하자 관계를 회복했던 것처럼, 제가 글쓰기에 대한 기대를 내려놓자 글을 쓸 수 있었던 것처럼 말입니다.
불안도 마찬가지예요. 불안이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생존에 반드시 필요한 감정이니까요. 그런데 이게 능력주의 사회에서는 지나치기 마련이죠. 많은 현대인이 불안장애를 겪습니다. 어떻게든 불안을 없애보려고 하죠. 그러나 무작정 불안을 없애고 부정하는 일은 같은 감정을 키울 뿐입니다.
마음의 작동 방식이 그래요. 불안을 잠재우려 할수록 불안에 예민해집니다. 도리어 불안의 존재를 인정하는 일이 불안을 통제하는 첫걸음이 됩니다. 인생은 하나의 불안을 다른 불안으로, 그 불안을 또 다른 불안으로 대체하는 과정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데에서 불안은 흔해지고 그 가치는 낮아집니다.
사랑은 어떨까요. 마음이 어떻게 움직이는지를 탐구하는데 평생을 쏟은 소설가가 있습니다. 에밀 졸라. 그는 자연주의 문학가로 분류되는데요. 자연주의는 극단적인 사실주의를 말합니다. 과학적인 정밀함으로 인간의 감정을 들여다보는 방법론이죠. 그의 자연주의 소설 『테레즈 라캥』에는 한 쌍의 부부, 카미유와 테레즈가 등장합니다. 그리고 남편의 친구인 로랑이 있습니다.
아내 테레즈는 로랑과 금지된 욕망을 추구하며 불륜을 저질러요. 급기야는 남편인 카미유를 살해하기에 이릅니다. 둘은 자유가 되었습니다. 마음대로 사랑할 수 있게 되었어요. 그런데 이상한 일이 벌어집니다. ‘욕정이 사라진 것이다.’ 방해물이 사라지자 가득했던 열정이 식어버립니다. 판이 깔리니 흥미를 잃어요.
심지어 두 사람은 누가 먼저 살인을 자백할지 몰라 이제 서로를 의심하기 시작합니다. 물론 이건 최악의 결과입니다. 그러나 이런 자극적인 이야기 안에서도 우리는 인간 마음의 보편적인 원리를 찾아낼 수 있습니다. 에밀 졸라는 인간의 마음을 잔인한 정확함으로 들여다봅니다. 마음의 역설적인 움직임을 밝혀내요.
타인의 마음을 얻는 방법
왜 마음은 이런 식으로 움직일까요? 자세한 건 모르겠습니다만 비슷한 느낌을 상상해보면, 아마도 마음이란 한 사람의 모순과 자기방어, 그리고 트라우마가 집적된 곪은 상처 같은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상처를 빨리 낫게 하겠다고 쉽게 건드렸다간 금방 덧나고 부어버리죠. 그렇다고 없는 척할 수도 없습니다. 종이 위에 그려진 낙서는 금방 지우면 되지만 인간의 마음은 그렇지 못해서 어떤 인위적인 방법도 역효과를 내는 것 같아요. 자연스럽게 놔두는 수밖에요.
‘자연스럽게 놔둔다.’ 이건 우리가 마음의 문제를 대할 때 선택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인 것 같습니다. 코끼리를 생각하지 않는 방법은 간단합니다. ‘코끼리 생각하지 않기’를 포기하면 됩니다. 포기하고 놔두면 돼요. 놔두고 다른 일에 집중하면 되죠. 통제를 포기하고 일상에 몰두하는 순간만큼은 코끼리를 생각하지 않게 되잖아요.
한 가지 팁이 있다면, 그냥 놔두는 것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놔둔다는 것인데요. 〈브루스 올마이티〉를 다시 떠올리게 된 건 전주영화제에서 시나리오 관련 특강을 들으면서였어요. 그 수업에서 연기 잘하는 법을 설명해주는데, 비유가 좋았습니다. 아이들이 귀여운 척하는 걸 생각해보라는 거예요.
애들이 진짜 뭘 모르고 하는 귀여운 행동들은 정말 귀여워 보이죠. 그런데 가끔 어떤 애들은 자기가 원하는 걸 얻어내려고 일부러 귀여운 척을 하잖아요. 그러면 별로 귀여워 보이지 않죠. 사실은 자기가 원하는 다른 것이 있고 그걸 숨기기 때문에요.
그래서 연기를 잘하려면 원하는 것이 없어야 한다고 하더라고요. 우는 연기를 한다고 했을 때 ‘내가 우는 것처럼 보였으면…’ 하고 원하지 말아야 한다고. 뒤에서 뭔가 원하는 순간 꿍꿍이가 생기고, 그런 게 마치 아이들이 귀여운 척하는 것처럼 얼굴에 다 보인다고요.
우리가 보통 연기가 좋으면 자연스럽다고 하잖아요. 문득 생각이 들었어요. 자연스러움이란 무언가를 원하지 않는 마음과 동의어가 아닌가, 하고요. 한창 마음에 관한 글을 쓰던 때라서 생각이 겹쳤거든요. 무언가를 원하지 않고 꿍꿍이가 없을 때 우리는 자연스러운 것 같아요. 마찬가지로, 타인에게 대가를 원하지 않을 때 우리는 자연스럽습니다. 자연스럽게 놔둔다는 건 그런 의미인 것 같아요.
남의 상처를 내가 대신 앓을 수 없듯이 남의 마음 또한 내가 통제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브루스가 아무런 대가 없이 그레이스의 행복을 바랐던 것처럼, 타인의 상처가 자연스럽게 낫기를 바라는 일뿐입니다. 타인의 마음이 나를 받아들이기를 바라는 일뿐이죠.
글쓰기를 시작하면서 세운 단 하나의 기준이 있다면,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 마음으로 쓰자는 거였어요. 제 글이 누군가의 마음을 얻을 수 있다면 그런 자연스러움의 힘밖에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에요. 마음에 대한 문제도 그렇습니다. 타인의 마음을 조종하거나 통제하는 방식으로는 누구의 마음도 얻을 수 없을 겁니다. 하지만 통제를 원하는 마음을 자연스럽게 놓다 보면 상처가 아물듯 신뢰는 쌓일 거예요. 거꾸로 가는 게 마음이니까요.
원문: Discus의 브런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