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집트와 로마의 외과술
외과술은 고대 이집트에서 타 문명권 대비 상당히 높은 수준으로 기원하여 고대 로마에서 해부학의 발전과 함께 꽃을 피웠다. 물론 고대 로마에서는 인체 해부는 금지되어 있었으므로 그 유명한 갈레노스조차도 마카크 원숭이의 해부로 인체 해부를 대신하였으므로 근대적 해부학의 수준에는 미치지 못하는 한계가 있었다.
또한 미생물학이 존재하지 않아 소독과 항생제 사용이라는 현대 외과술의 필수적인 요소가 결핍되어 있었으므로 수술이 제대로 이루어진 경우에도 감염으로 인해 사망하는 경우가 부지기수였을 것이다.
그러나 어쨌든 숙련된 외과의사가 동반된 환경 하에서라면 고대 로마인들은 전쟁에서의 사지 절단이나 혹은 외과적 배농으로 나을 수 있는 질환으로 목숨을 잃을 확률이 더 낮았을 것이다. 이 점은 무시할 수 없는 것으로 역시 외과 수술이 상당 수준으로 발달하였던 인도 외의 다른 문명권보다는 확실히 앞선 것이었다.
로마 제국의 몰락 이후 이러한 외과술은 일부는 비잔티움, 일부는 이슬람 문명 등에 계승되다가 르네상스와 함께 16세기에 다시 부흥하게 되었다. 이번의 부흥은 베살리우스로 대표되는 해부학, 앙브로아즈 파레로 대표되는 외과학, 윌리엄 하비로 대표되는 생리학의 발전을 동반하여 진정으로 고대 의학의 껍질을 벗어던지게 될 것이었다.
중세의 서유럽 의학은 아직 로마 제국의 수준 이하였으며 그리스, 로마의 의학을 이어받아 나름대로 발전시킨 아랍 문명권 의학의 영향을 벗어나지 못한 상태였다. 그러나 르네상스와 함께 인쇄술의 발달이 시작되면서 근대 의학의 여명이 시작되었다.
고대 의학의 집대성이었던 갈레노스의 그리스어 전집이 1525년에 베네치아에서 처음으로 출판되었고 히포크라테스의 저서들도 이때부터 라틴어로 번역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비판적인 르네상스 인의 정신은 이러한 고대의 의학 대가들의 견해를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고대 의학을 흡수하면서도 그것을 더 한층 업그레이드하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르네상스와 레오나르도 다 빈치
먼저 해부학에서부터 고대 의학은 뒤집히기 시작하였다. 갈레노스의 해부학 저서인 『해부의 방법(On anatomical procedures)』이 1531년에 귄터 폰 안더나흐에 의해 번역이 되면서부터 의사들은 해부학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하였다. 의사들 뿐 아니라 조각가나 화가들 또한 인체를 사실적이고 정밀하게 묘사하게 위해 해부학을 연구하였다.
특히 피렌체에서는 화가나 조각가와 의사는 같은 길드에 소속되어 있었고 대학의 해부학 강의는 일반에게 공개되는 경우가 많았으므로 화가, 조각가, 의사들이 함께 해부학을 연구하는 경우가 많았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파도바 대학의 의학과 교수였던 마르칸토니오 델라 토레와 함께 해부학을 연구하였고, 미켈란젤로는 역시 파도바 대학의 의학과 교수였던 레알도 콜롬보와 함께 해부학을 연구하였다.
둘 중 다 빈치의 해부학 연구가 훨씬 더 깊이 있는 것이었으나 불행히도 마르칸토니오 델라 토레가 1511년에 30세의 젊은 나이에 역병으로 급사하면서 둘이 함께 진행하던 해부학 책은 미완성으로 남았다. 다 빈치의 해부학 드로잉 700점은 그의 사후 200여 년이 넘어서야 세상에 공개되었으니 이 두 사람은 해부학의 발전에 영향을 주지는 못하였던 것이나, 다 빈치의 드로잉이 예술과 과학이 만난 기념비적인 작품임은 두말할 나위가 없을 것이다.
미켈란젤로의 인체 드로잉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해부 드로잉들
근대 해부학의 아버지 베살리우스의 등장
한편 근대 해부학의 아버지 베살리우스는 마르칸토니오 델라 토레의 사후 3년이 지난 1514년에 브뤼셀에서 카를 5세의 궁정 약사를 아버지로 하여 태어났다. 그의 본명은 안드리스 반 베첼(Andries van Wezel)이었으나 당시의 습관대로 안드레아스 베살리우스라는 라틴어식 이름으로 주로 불리웠다.
베살리우스는 파리 대학에서 당시 해부학의 대가였던 귄터 폰 안더나흐와 실비우스로부터 해부학과 외과학을 배웠다. 그는 해부학 연구를 위해 파리의 공동 묘지에서 시체를 훔쳐내기도 하였으며 갖은 방법을 동원하여 시체를 구하여 해부를 계속하였다. 학위를 받고 얼마 되지 않아 베살리우스는 베네치아로부터 파도바 대학의 해부학과 외과학 교수로 초빙되었다. 그는 파도바 대학 뿐 아니라 볼로냐 대학과 피사 대학에도 출강하였다.
이때까지는 베살리우스는 아직도 갈레노스의 해부학을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상태였다. 그는 파도바 대학에서 6장으로 된 최초의 학생용 해부도를 만들었는데 여기에는 갈레노스의 주장처럼 간이 5엽으로 이루어져 있고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 망상혈관(rete mirabile)이 존재하였으며 심장은 갈레노스의 마카크 원숭이의 것이 그려져 있었다.
그러나 베살리우스는 파도바 대학에서 범죄자들의 시체를 활용하여 더욱 많은 시체를 해부하여 경험을 쌓아나갔다. 그리고 그로부터 얻은 경험은 갈레노스의 해부학을 총체적으로 부정하게 하였다. 파도바 대학에서 강의를 시작한지 4년이 된 1542년, 이제 27세의 젊은 교수 베살리우스는 2년에 걸쳐 완성한 대작, 2절지 판으로 663페이지에 달하며 그의 전담 화가였던 칼카르가 그린 그림만도 300장이 넘는 ‘인체의 구조에 대하여 De humani corporis fabrica’를 완성하였다.
그는 이 대작을 황제 카를 5세에게 헌정하였다. 베살리우스는 이 책을 스위스 바젤서 인쇄하기 위해 납으로 된 원판을 노새의 등에 싣고 알프스를 건넜다. 1543년 6월, 고대인의 지적 지평을 뛰어넘는 근대의 여명 중의 하나인 이 대작이 출판되었다. 이 해는 공교롭게도 코페르니쿠스가 그의 지동설을 완성한 해이기도 하였다. 갈레노스와 프톨레마이오스라는 위대한 고대인들의 업적이 과학 혁명에 의해 저물기 시작하던 순간이었다.
베살리우스의 이 책은 7권으로 이루어졌는데, 1권은 뼈, 2권은 근육, 3권은 혈관(혈관계의 경우 갈레노스의 영향을 완전히 극복하지는 못하였다. 이것은 다음 세기에 잉글랜드의 윌리엄 하비가 혈액 순환의 원리를 발견해낼 때까지 기다려야 할 과업이었다), 4권은 신경(7쌍의 뇌신경 포함), 5권은 복부와 생식기, 6권은 흉부, 7권은 뇌에 관해서 기술하고 있다.
베살리우스의 해부학 도판들
대작을 출판한 다음 해인 1544년, 카를 5세는 베살리우스를 궁정 시의로 초빙하였다. 피렌체의 코시모 메디치 또한 명성이 혁혁한 그를 피사 대학의 교수로 초빙하였다. 베살리우스는 파도바 대학에서 동료 교수들과 사이가 좋지 않았으므로 카를 5세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원래 브뤼셀 출생이자 카를 5세 궁정의 사람이었던 그로서는 금의환향이라 할 수 있었다.
베살리우스는 카를 5세와 그를 이은 펠리페 2세의 궁정에서 융숭한 대우를 받았으나 해부학이나 외과학의 명성이 아직까지 완전히 확고한 상태가 아니었으므로 동료 시의들은 뒤에서 그를 ‘이발사’라고 흉을 보기도 하였다고 한다. 중세의 ‘이발사-외과의’에 대한 폄하가 아직까지 남아있었던 것이다.
펠리페 2세의 즉위 후 1564년에 베살리우스는 성지 순례를 떠났는데 순례 도중에 이오니아의 자킨토스 섬에서 병사하였다. 50세의 한창 나이였고 파도바 대학도 그를 다시 초빙하려고 하고 있었으므로 아까운 죽음이었다. 항간에는 베살리우스가 성지 순례를 떠난 것은 그가 스페인에서 아직 심장이 뛰고 있는 어느 귀족을 해부하여 죽음으로 몰아넣었고, 이 사실이 발각되자 펠리페 2세가 처형 대신 성지순례를 보낸 것이라는 그럴싸한 소문이 돌기도 하였으나 현대의 역사학자들은 이를 근거없는 뜬소문으로 평가한다.
베살리우스의 해부학은 고대의 수준을 멀찌감치 뛰어넘었을 뿐더러 동시대의 다른 문명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던 인류 사상 초유의 학문이었던 것이다. 그의 제자인 팔로피우스(Fallopius 1523 – 1562)는 여성 생식기와 내이의 반고리관을 연구하였으며, 유스타키우스는 유스타키오관, 부신, 흉선, 눈의 외전신경 등을 연구하였다. 그와 동시대의 인물이었던 앙브로와즈 파레의 외과학, 두 세대 뒤의 인물인 윌리엄 하비의 실험 생리학이 베살리우스가 기초를 놓은 해부학에 합쳐지면 근대 의학이 출범하게 되는 것이다.
앙브로와즈 파레의 수술 도구들
앙브로와즈 파레가 고안한 의수와 의족
혈액 순환을 실험 생리학으로 밝혀낸 윌리엄 하비
원문 : 다만버의 자유로운 생각
참고
- 이재담, 『의학의 역사』, 광연제, 2003
- wikipedi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