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 처음 퇴사하고 1년의 여행을 준비할 때 나는 ‘디지털 노마드’라는 단어에 사로잡혀 있었다.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며 글을 쓰는 삶. 작년 8월 퇴사한 후 긴 여행을 떠났고 이제 여행한 지 8개월이 다 되어간다. 미얀마 양곤, 태국 치앙마이와 빠이, 포르투갈 포르투와 리스본, 스페인 마드리드를 거치는 동안 두 권의 책을 계약했다. 현재는 세비야에 머물며 이 글을 쓴다. 결과적으로 보면 디지털 노마드처럼 보이지만, 나는 정말 디지털 노마드일까?
디지털 노마드 뽕, 하지만 닥쳐오는 불안감
어디에도 정착하지 않지만 어디든 나의 방인 것처럼 살았다. 호스텔의 다이닝 룸이나 치앙마이의 코워킹 스페이스에서 맥북 프로를 열고 타자를 두드리며 에스프레소를 마시는 내 모습은 그럴싸한 디지털 노마드처럼 보였다. 내가 머무는 곳은 어디든 작업실이나 카페가 되었다. 나는 “나는 하루의 대부분을 카페에서 보냈다”라고 말한 사르트르를 떠올리며 디지털 노마드 뽕에 한껏 취했다.
하지만 이런 “디뽕”은 얼마 가지 못했다. 디지털 노마드란 시공간의 제약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일하는 것이 핵심처럼 보이지만 본질은 ‘일’에 있다. 수익을 내지 않으면 여행자와 다름이 무엇인가. 여행을 하며 일을 하고 돈도 벌고 싶었던 나는 지금 내가 하는 것에 ‘일’이라는 이름을 붙이기 부끄러웠다. 지금 나는 돈을 벌지 못했으니까. 불안했다.
나에게 필요한 건 “일을 한다”는 감각의 루틴
이런 불안함은 작업을 이어나가면서 조금씩 해소됐다. 당장 바로 수익이 나지 않아도 무언가 쌓아가는 과정을 지속하는 그 순간의 한가운데서는 불안함을 느낄 새가 없다. 더군다나 나는 이미 포트폴리오와 경력이 있는 개발자나 디자이너와는 달리, 조직생활을 막 벗어나 새로운 업에 대한 고민을 시작하는 초보 프리랜서였다. 당장은 수입 없이, 그간 직장생활을 하며 벌어온 돈을 야금야금 쓰면서 할 수 있는 것들을 조금씩 하는 습관을 만드는 것이 우선이었다.
이때 중요한 것은 좋은 질을 생산해야겠다는 조급함 없이 양으로 승부하는 것이다. 최고의 일감을 얻기 위해 완벽한 작업물 하나를 만들겠다는 부담감을 내려놓고, 이것 저것 다 건들며 내 장점이 무엇인지 파악하는 시간을 갖는 것이 중요하다. 내 수준에서 질을 너무 생각하다 보면 하나도 생산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작업량이 많다고 질이 높은 건 아니었지만, 적어도 작업량이 아예 없는 상황에서 번지르르한 아웃풋을 생각할 수는 없었다. 할당량을 조금씩 채워가고 있다는 리듬감, 여행과 작업이 유연하게 나뉘어 있고 그 스케줄을 내가 통제할 수 있다는 감각은 일상에 생기를 줬다.
당장 이 여행은 내 작업의 수익이 아니라 과거에 벌어둔 돈으로 굴러가는 판국이지만, 돈을 벌든 벌지 못하든 ‘일을 한다’라는 감각을 느끼는 게 중요했다. 그렇게 말해야 내가 더 의무감을 느꼈기 때문이다. “나는 여행하면서 취미로 글을 쓰는 게 아니다. 글쓰기는 나의 본업이다”는 생각을 뚜렷이 해야지만 무기력한 나날에 간신히 정신을 차리고 책상 앞에 앉아 글을 썼다.
아무도 나에게 고료를 주지 않아도 고료를 받는 것처럼 글을 쓰고, 아무도 마감을 주지 않아도 마감이 있는 것처럼 글을 썼다. 가끔은 한국에 있는 친구들에게 징징댔다. 한국 가면 다시 취업 준비를 해야 할 것 같아 가기 싫다고 하면, 그들은 너는 이미 글을 쓰는 작가라고 나를 따뜻이 위로했다.
돈에 대한 집착을 버려야 돈을 버는 아이러니
돈을 생각하지 않고 해야 할 것을 하나씩 하니 점점 나를 설명하는 것들이 쌓여갔다. 그리고 여행의 어떤 지점을 지나면서 내가 쌓아온 것들은 정말 기회가 되었다. 그 덕에 받은 계약금으로 다음 나라의 항공편을 예매하기도 하고, 어떤 날은 통 크게 비싼 파인 다이닝 레스토랑에서 세 시간 만찬을 즐기고 나오기도 했다. 스페인에 있는 지금도 하루는 여행을, 하루는 기획안을 쓴다. 아무리 좋은 곳에 여행을 와도 먹고사니즘에 대한 고민은 항상 나와 함께하고 있다.
회사에서도 매일 일을 했고, 무언가 쌓였지만 그것이 내 커리어에 유의미한 포트폴리오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특히 나는 직무 적합성이 떨어지는 이유로 퇴사를 결심했기 때문에 이전의 경력이 커리어상 큰 도움이 되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 내가 하는 것들은 내가 하면서 즐겁고 (물론 스트레스를 많이 받기는 하지만), 경제적으로도 수익익이 생기며, 이 작업 자체가 나의 포트폴리오가 된다.
디지털 노마드 체험판이 내게 알려준 것
하지만 지속 가능한 디지털 노마드 생활을 위해서는 여행과 삶에 드는 경비를 최소한 1년 이상 본인의 수익으로 충당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은 아닐까? 의식주와 생활을 충당할 수 있는 수익을 지속적으로 감당할 수 있는 자력을 가져야 하는 것은 아닐까? 순수 비율로 따지면 내가 여행 중 번 수익은 내 여행비의 20% 정도 밖에는 충당하지 못한다. 1년은 무슨, 단기적이고 비정기적인 수익에 기대 생활해야 했으며, 그 수익을 받을 시기도 내가 정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나의 여행은 디지털 노마드 여행이 아니라, 디지털 노마드가 무엇인지 체험하는 파일럿 버전이었다.
그럼에도 이와 같은 디지털 노마드 체험판은 일의 방식과 형태에 대해 나와 맞는 것을 찾아가는 과정으로써 내게 큰 영향을 미쳤다. 이제는 안다. 디지털 노마드는 직업이 아니라 일을 하는 하나의 방식이라는 것. “어떻게 살고 싶은지”가 업과 가치관에 대한 것이라면, 디지털 노마드를 빙자한 긴 여행은 “어떤 방식으로 일하고 싶은지”라는 질문에 대답할 기회를 주었다.
혼자만의 짧고도 긴 시간을 통해, 평생 이렇게 해외를 떠돌며 글을 쓰고, 수익을 창출하며 돌아다닐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했다. 마음만 먹으면 그럴 수 있다는 자신감도 쌓였다. 하지만 여행을 하면 할수록 오히려 조직 생활에 대한 애착이 들었다. 혼자서는 얻을 수 없는 큰 조직에서의 인적 경험이나 규모의 경제가 나의 세계를 확장시켜주는 것을 경험한 적이 있기 때문이다. 다만 나에게 맞는 조직을 찾기 위한 시간이 내게 필요했을 뿐이다. 내 자아가 회사의 가치관과 충돌하지 않으면서, 서로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줄 수 있는 곳은 어디일지. 다행히 나에겐 고민할 시간이 충분하다.
조직 생활 잘하는 사람이 원격 근무도 잘한다
미래의 근무 방식에 대한 인사이트를 얻은 것은 덤이다. 워드프레스(WordPress)라는 웹사이트로 유명한 기업 오토매틱(Automatici)은 800명 정도 되는 전 직원이 원격 근무(Remote work) 형태로만 일한다. 현재 800명의 직원이 속한 국가는 68개국이고 사용할 수 있는 언어는 84개에 이른다고 한다. 이 곳의 원격 근무는 전 세계에 분산된 임직원이 서로 다른 곳, 다른 시간대에서 일하는, 완전히 자유롭게 일하는 원격 근무를 시행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나와 업무 시간이 같은 사람이 단 한 명도 없을 수 있다는 의미가 된다. 각자의 업무시간이 다른 근무 환경에서는 내 질문이나 요청에 대한 즉각적인 응답을 기대할 수 없는 비동기(asynchronous) 커뮤니케이션이 이루어진다. 소통의 제약이 명확한 원격 근무에서 필요한 커뮤니케이션 스킬은 조직 생활의 소통보다 정교하게 설계되어야 한다. 한국과 시차가 다른 나라에서 다양한 사람들과 크고 작은 업무를 비동기 커뮤니케이션으로 진행한 나는, 원격 근무를 잘하는 사람은 조직 생활도 잘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았다.
“만나야 일이 된다, 회식을 해야 유대감이 형성된다”와 같은 구시대의 태도로는 미래의 일터를 선제적으로 대응할 수 없다. 만나지 않아도 모든 것이 진척되야 한다고 가정한 상황에서 업무를 하면 커뮤니케이션의 많은 문제가 해결된다. 전화로 구구절절할 내용을 메일로 간략하게 정리하고, 두세 번 주고받을 메일을 한 번에 준비할 수 있도록 텍스트로 지시하고, 서로의 요청에 대해 늦지 않고 정기적으로 업무를 확인하는 작업. 이건 비단 원격 근무에만 필요한 덕목은 아니다.
보고와 회식 등 대면 커뮤니케이션이 업무의 필수라고 생각하는 사람일수록 비대면 커뮤니케이션에 적응하지 못한다. 여행 기간 업무의 90% 이상을 메일로 주고받는 나는 일하기 편한 사람일수록 시공간의 제약을 받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런 사람들과는 메일만으로도 충분히 잘 소통할 수 있다. 만나야 일이 풀릴 것 같다고 느끼는 사람들은 대체로 그 정도로 밖에 일을 못하는 사람들이었다.
디지털 노마드라는 환상, 그럼에도 한 번쯤은
내가 처음 여행을 떠날 때 떠올린 디지털 노마드는 그저 무직의 상태를 포장할 허울 좋은 단어에 불과했다. 지속 가능한 디지털 노마드 생활을 위해서는 새로운 공간으로 떠나 정착하고, 생활을 유지하고, 다시 원할 때 이동할 수 있는 최소한의 자금이 필요하다. 생계에 대한 문제가 해결되었을 때 비로소 생계를 위한 작업을 시작할 수 있는 디지털 노마드의 역설은 프리랜서의 그것과 닮아있다. 디지털 노마드에 대한 부푼 꿈을 안고 능력과 생계의 기본적인 준비 없이 떠날 바에는 차라리 여행에만 집중하는 것이 낫다. 엄밀히 말해 나는 디지털 노마드가 아니라 작업을 하며 여행하는 장기 유랑자에 가깝다.
하지만 디지털 노마드라는 이름이 뭣이 중요한가. 디지털 노마드 단기 체험은 앞으로 어떤 일을, 어떤 방식으로 할 것인지 고찰할 명분을 제공한다. 특히 당장 수익이 없는 사람은 정말이지 치열하게 돈벌 궁리를 할 수밖에 없다. “내 능력으로 돈을 벌 수 있을까?” 내가 가진 재능의 크기를 가늠하고 먹고사니즘을 치열하게 고민하는 것을 서른에 가까운 나이에 나도 처음 해본다.
물론 이 세상과 취업 시장은 내가 쉬는 것을 기다려주지 않는다. 냉혹한 취업 시장에서 나의 가치는 내가 쉬는 개월 수에 따라 수직 하락한다. 그래도 우리에게는 나의 커리어와 삶의 가치관의 의미를 조정할 체험판의 시기가 필요하지 않을까. 그게 꼭 거창하게 1년간 해외를 돌아다니는 방법은 아닐 지라도. 지금의 일을 평생 할 자신이 없는 사람이라면, 과연 내게 능력이라는 게 있을까 시도해볼 여유조차 가져본 경험이 없는 사람이라면, 디지털 노마드 체험판은 삶 전체를 두고 봤을 때 그렇게 손해 보는 장사는 아닐지도 모른다.
원문: 사과집의 브런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