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순간까지도 웃음을 잃지 않으며 공포에 질린 아이들을 위로하고 곧 구조될 거라는 희망을 주던 나이 스물 두 살의 여승무원이 있었다. 언니는 왜 구명조끼를 입지 않느냐는 학생의 질문에 “승무원은 맨 나중이야.”라고 대답했던 그녀는 끝내 우리에게 살아 돌아오지 못했다.
누구보다 그렇게 해야 할, 어떻게든 사람 하나 더 살리려고 발버둥쳐야 할, 나오더라도 맨 나중에 나와야 할 선장은 일찌감치 구조돼 자기 배가 어떻게 침몰됐는지도 모른다면서 병원에서 젖은 돈을 말리고 있었다.
여학생들이 부모와 떨어진 다섯 살 아이를 그 가녀린 팔로 안고 필사적으로 탈출할 때 그를 돕는 선원들은 적었다. 고등학생이 그 극한 상황에서도 “아기 있어요!”를 부르짖는 동안, 로프를 연결해서 수십 명을 구한 승객은 미처 못 구한 사람들의 얼굴이 어른거린다며 머리를 싸매는데 그 상황을 통제할 선원들, 특히 고급선원들은 이미 배를 떠나 있었다.
책임이라는 단어를 생각해 본다. 왜 우리에게는 책임을 질 일도 없는 이들이 막중한 책임을 기꺼이 감당하다가 스러져 가는 일이 이다지도 흔한가. 정작 책임을 져야 할 사람들은 십 리 밖으로 도망하거나 남들 시신 딛고 살아나서는 “산 사람은 살아야지” 하며 눈알을 굴리는 일이 어찌 이렇게도 자연스러운가.
누군가를 제물로 삼아 분노의 스트레스를 푸는 건 온당하지 않다. 안다. 하지만 문제는 그에서 멈추는 일이지, 분노 자체에는 문제가 없다. 분노하자. 그리고 이 사건의 원인이 명백하게, 그리고 누구나 이해할 수 있게 밝혀질 때까지 분노를 멈추지 말자. ‘우리 모두의 책임’은 즐겨 ‘우리 모두의 책임 없음’으로 전화한다. 냉철하게 분노해서 책임을 지울 사람 모두에게 책임을 지워야 한다.
“좋은 게 좋은 거”에 순응하고, 명백한 범죄를 보고도 “에이 더러운 놈들 잘 먹고 잘 살아라”고 포기하고, 90년대 대참사 퍼레이드의 교훈을 완전히 잊어버린 ‘우리 모두’에게 그 책임이 돌아올 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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