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담 스미스의 경제 이론은 ‘사람은 자신과 관련이 적은 사안에 공감하지 못한다’는 전제에서 출발한다. 그는 《도덕감정론》에서 중국의 재난에 유럽인의 관심이 적은 이유를 설명했다.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사람이 사는 청 제국이 통째로 지진에 삼켜졌다고 가정해보자. 그리고 그쪽 세계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어느 유럽 사람에게 이 끔찍한 재난 소식이 무슨 영향을 끼칠지 생각해보자. […] 그는 그럴 듯한 철학적 의례를 거치고 인도적인 감상을 적당히 표현한 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제 일상으로 돌아갈 것이다. […] 내일 그가 제 작은 손가락을 잃어버릴 예정이라면, 그는 오늘 밤을 지새울 것이다. 하지만 그 많은 중국인들을 본 적이 없으니 폐허를 두고도 아주 편안하게 잘 수 있다. […] 자기 손가락과 그 사람들의 생명을 바꾸는 선택을 강요당한다면 그는 어느 쪽을 선택할까?
뉴스 가치를 따질 때 중요한 관련성 요소 또한 이 믿음과 연결된다. 사람들은 같은 일이 자국에서 벌어졌을 때나 자신과 비슷한 처지에 있는 사람에게 일어났을 때 더 관심을 보인다.
한국에서 8,000km도 더 떨어진 다뉴브강에서 벌어진 참사가 한국인 여행객들에게 벌어진 일이니, 한국 신문이 5월 31일 1면에 헝가리 유람선 침몰 기사를 올린 건 당연하다. 이 사건이 한국 사회와 관련성이 높기 때문이다. 그런데 신문 1면 뒤 몇몇 기사를 보면 아담 스미스가 틀린 건지, 아니면 뉴스 가치 관련성의 기준이 잘못된 건지 헷갈린다.
《조선일보》는 1면을 타 언론사보다 다뉴브강 참사에 작게 할애했다. 현송월 처형 보도와 그의 평창올림픽 때 ‘재림’ 이후 북한 관료와 관련한 보도 신뢰성이 떨어진 와중에, 하노이 회담 책임자 처형 기사를 크게 내보냈다. 아니나 다를까, 김영철 북한 노동당 부위원장이 2일 김정은과 함께 공식 석상에 모습을 드러내면서 《조선일보》가 오보를 냈다는 것이 확인됐다. 어쨌든 그 때문에 다뉴브 참사 기사는 옆 귀퉁이에 작게 나갔다.
2면에는 「文대통령 “세월호 구조팀 보내라”… 靑, 대통령 지시 6번 걸쳐 공개」 기사를 냈다. 다뉴브강 참사에 세월호를 연결하는 것은 부자연스럽지 않다. 하지만 국내 타 언론사들은 물론 외신에서도 원인 규명과 재발 방지를 위해 한국과 헝가리 정부가 어떤 조처를 취했는지 기사에 자세히 옮기는 데 집중할 때, 정부가 대통령 지시를 공개한다고 생색낸다는 듯이 비꼬는 기사를 우선으로 낼 필요가 있는지 의문이다.
《중앙일보》의 기사 「헝가리 선박회사가 배상 책임…참좋은여행사는 “60억 보험 가입”」도 공감하기 어렵다. 미국 황색 언론이 이 사건을 다룬다면, 미국 사회와 관련성이 낮은 사건이니 그렇게 접근할 수 있다. 관련성을 제쳐두더라도 권위지를 자처하는 신문이 보험금 기사를 신속하게 내보내는 건 슬픔에 빠진 이들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한 보도 태도라 할 수 있다. 보험금 이야기를 들먹이는 기사 하나로 《중앙일보》는 ‘인지상정’과 ‘권위’를 둘 다 버린 신문으로 독자에게 비치지 않았을까?
‘조의’는 영어로 ‘condolences’이다. 어원을 따져보면 접두사 ‘con-‘은 ‘with’ 곧 ‘함께’, ‘dolore’는 ‘suffer’ 곧 ‘고통받다’라는 뜻이므로 ‘함께 고통받다’라는 뜻이 된다. ‘조의’만큼이나 상투적으로 쓰이는 단어지만, 이 말을 할 때만은 ‘내가 당신과 함께 그 슬픔을 지겠다’고 선언하는 것이다. 공감 능력이 부족한 신문이 독자의 공감을 얼마나 얻을 수 있을까?
원문: 단비뉴스 / 필자: 박서정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