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 옷에 녹음기를 달아 유치원에 보낸 한 여성의 이야기가 논란이 된 듯하다. 우연히 관련 기사를 보았는데, 댓글의 대부분은 아이의 엄마를 비난했다. 일단 불법적인 행위이기도 하고, 유치원 교사의 인권이나 기분은 어떻겠냐는 말들은 대체로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었다. 그런데 가장 공감을 많이 받은 댓글 중 ‘그러니 맘충소리 듣지.’ ‘이러니 맘충이라는 비속어가 생기고, 노키즈존 생기는 거 아니냐.’ 같은 말이 쓰여 있었다.
만약 녹음기를 달게 한 게 아빠였다면 어땠을까? 혹은 아빠가 그런 제안을 했더라면? 그러면 사람들은 무슨 말로 그를 비난할까? 파파충? 대디충? 아니, 그를 그렇게 비난할 수 있는 표현, 한 그룹으로 싸잡아서 비하하며 혐오할 수 있는 표현은 없다. 아마 같은 비난을 하더라도 결국 그의 행위만을 비난할 것이다. 그렇게 제 자식만 챙기니 사회가 이 꼴이다, 지 자식만 귀한 줄 안다, 따위의 말들이 올라올 것이다. 그러나 아빠 자체를 지시하며, 그 집단 전체를 혐오하지는 않을 것이다.
엄마는 초등학생들에게서부터 비하의 대상이 된다. 아이들은 ‘니애미’ ‘느금마’ ‘엄창’ 따위의 말들을 쓰며, 상대와 관련된 가장 비하적인 표현으로 엄마를 활용한다. 이제는 엄마들이 어떤 실수라도 하면, 사소한 잘못이라도 하면, 곧바로 사회 전체 구성원들이 엄마들을 ‘맘충’이라고 손가락질한다.
지하철에서 아이가 울어도, 식당에서 아이가 토해도, 길거리에서 아이가 칭얼대도 그녀는 아이를 돌보고자 애쓰는 여성이 아닌, 그저 맘충이다. 어느 엄마 개인이 실수나 잘못을 한 게 아니라 맘충들은 원래 그런 것이다. 그런 맘충 때문에 노키즈존이 생겨나고, 그런 맘충 때문에 그들은 당연히 맘충이라 불린다. 모두 그들이 자초한 일이다. 그러니 그들은 싸잡아 비난당해 마땅하다.
개저씨라는 말이 있다. 대개 주변에 피해를 입히는, 제멋대로인 중년 남성들에 대한 비하적이고 적대적인 표현이다. 술을 마시고 행패를 부린다든지, 성추행을 한다든지, 큰 소리로 떠들거나 훈계질을 심하게 하는 이들이 주로 그렇게 불린다. 하지만 아이들은 너네 아빠 ‘개저씨’라며 비하하고 서로를 놀리지는 않는다. ‘노아저씨존’이 생기지도 않는다.
중년 남자 한 명이 실수로 잘못한다고 해서 아저씨 전체가 싸잡혀서 혐오 당하지도 않는다. 그저 개저씨스러운 행위들이 비난받을 뿐이다. 그들에게는 실질적인 배제, 실질적인 혐오, 실질적인 힘의 작동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오히려 개저씨라는 표현은 중년 남자들이 휘둘러온 횡포, 폭력, 권력에 대한 토로에 가깝다. 이 사회에는 그들을 배제할 힘이 없다.
그러나 아이와 엄마에게는 힘이 가해진다. 아이가 울면, 엄마는 식은땀을 흘리며, 아이를 데리고 도망가야 한다. 아이가 울거나 뛸 수 있으니, 출입을 금지당해야 한다. 한 명의 엄마가 잘못할 때마다, 엄마라는 존재 전체가 비하당하며 상처 입어야 한다. 엄마가 되었다는 이유로, 온갖 사람들의 비하와 몰이해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
더군다나 그들은 항변할 자격도 없다. 그들 스스로 맘충임을 자처했기 때문이다. 모든 해악은 오직 그들이 스스로 만들었으며, 따라서 그들에게 주어지는 표현도 당연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그들은 입 다물고 혐오 당하며 배제당해 마땅하다.
일정 나이대까지 아이를 낳지 않는 여성은 집안의 죄인이 된다. 반면, 아이를 낳은 여성은 그때부터 사회의 죄인이 된다. 아이는 그들만의 몫이며, 아이들의 잘못은 그들의 잘못이며, 이 사회의 아동 적대적인 성향은 엄마 적대적인 성향으로 확장된다. 그리고 그 모든 일의 근본적인 원인, 가장 근원적인 문제는 오직 ‘엄마 개인’에게 있다고 치부된다.
그들은 악의 근원이자, 죄의 원천이며, 자기책임적 사회의 화신이다. 그렇게 다른 모든 구성원은 그들을 손쉽게 혐오하고, 배제하고, 비난하면서 편안함과 즐거움을 느낀다. 미래까지 갈 것도 없지만, 이런 사회의 미래를 상상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원문: 문화평론가 정지우의 페이스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