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루보틀 매장이 대단한 화제다. 수많은 사람이 평균 서너 시간씩 줄을 서서까지 이 특별한 커피를 경험하고자 한다. 블루보틀이 전 세계적인 인지도를 가졌음에도 매장 수를 가급적 제한하고, 우리나라에는 처음 들어왔다는 점을 생각하면, 이런 열광이 이해될 법도 하다. 더군다나 커피 업계에서는 블루보틀을 필두로 한 ‘스페셜티 커피 문화’를 ‘제3의 물결’이라고까지 부르니, 더욱 이 힙하고 핫한 문화를 향한 열망도 마냥 이상한 것만은 아닐 것이다.
하나 흥미로운 점은 블루보틀이 표방하는 ‘느림의 미학’을 실제로 이 커피 매장을 찾는 사람들이 체화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는 사실이다. 주로 20–30대로 구성된 방문객들은 커피 한잔을 마시기 위해 기다리는 서너 시간을 별 어려움 없이 견뎌내는 것 같다.
면면을 살펴보면 입장을 기다리는 동안 책을 읽는다든지, 음악을 듣는다든지, SNS를 하거나 일행과 대화하며 그 시간을 제법 즐긴다고 한다. 나아가 기다리는 상황을 생중계하며 온라인의 사람들과 그 기다림을 함께 누리는 경우도 있다. 일일이 핸드드립으로 커피를 내리며, 한 잔 한 잔에 정성을 기울이느라 시간이나 효율성 같은 건 아무래도 좋다는 ‘신념’을 가진 블루보틀 커피와 그 방문객들이 묘하게 어울리는 지점이다.
그런데 또 한편으로 이 새로운 커피 문화에 대한 열광이 다소 기이하거나 과잉된 것처럼 보이는 측면도 있다. 일단 핸드드립 커피 문화 자체가 그렇게까지 새로운 건 아니라는 점이다. 지금도 동네 커피점 중 핸드드립을 고수하는 카페를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고, 국내 유명 매장이 그런 문화를 이미 도입하기도 했다.
또한 방문객이 정말 그런 커피 문화에 그리 대단한 가치를 부여하느냐고 한다면, 꼭 그렇지도 않을 것이다. 아마 대부분은 서둘러, 남들보다 앞서 블루보틀을 경험한 뒤에는 다시 또 그 몇 시간의 기다림을 감내하러 가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게 보면 이 현상에는 단지 블루보틀의 문화 자체와는 다른 요소도 작용했으리라 생각된다.
아는 사람은 다 알지만, 사실 블루보틀 커피는 국내에 들어오기 전부터 이미 온라인상에서 화제였다. 무엇보다 인스타그램의 여러 인플루언서들이 해외 블루보틀 매장을 적극적으로 인증하며 알렸고, 그에 따라 블루보틀 지점이 있는 해외 도시에 방문한 사람들은 그곳을 꼭 들르는 게 하나의 ‘유행’이 되어 있었다.
다시 말해 청년 세대 사이에서 블루보틀은 일종의 해외의 이색적인 명소이자, 따라 누려보고 싶은 경험으로 은연중에 자리 잡았다. 그래서 블루보틀의 국내 상륙은 ‘유행하는 이미지’의 상륙과 다르지 않았고, 그 이미지에 서둘러 닿고자 하는 욕망을 폭발시켰다. 즉 이 현상은 문화적 경험 자체 못지않게 이미지의 소유 혹은 이미지에 대한 접촉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청년 세대는 이미지에 닿길 원한다. 이미지를 소유하길 원하고, 그 이미지 속에 있길 바란다. 최신의 혹은 가장 핫한 이미지를 누구보다 빨리 누리길 원하고, 그 이미지에 닿지 못함에 안달한다. 그래서 이 현상에도 그 밖의 핫한 이미지를 향한 문화들, 핫플레이스, 호캉스, 유명 관광지, 명품 소비에 따라붙기 마련인 ‘인증샷 문화’가 필연적으로 동반된다.
아마 블루보틀 매장에 들어가서 사진을 찍지 않은 사람은 한 명도 없을 것이다. 그리고 그제야 안달하는 마음도 사라지고, 안심하고, 만족감을 느끼게 될 것이다. 이 이미지의 확산과 성행은 확실히 이 시대가 소비사회의 한 가운데로 접어들었음을 보여주는 것이자, 우리 사회의 오랜 특성인 중앙 및 상향 집중화의 현상도 보여준다.
그레고리 헨더슨은 일찍이 한국 사회의 정치적 특성을 설명하면서 ‘소용돌이(VORTEX) 현상’이라는 은유를 쓴 적이 있다. 이는 한국 사회가 고도로 동질화되어 있고, 중앙집중화되어 있으며, 사회의 모든 구성원과 분야가 오직 권력의 중심을 향해 상승하고자 하는 현상을 일컬은 것이다. 과거에 소용돌이의 중심이 ‘출세’나 ‘자수성가’ ‘부자 되기’ 같은 것이었다면, 이제 그 소용돌이의 중심은 가장 화려한 최신의 ‘이미지’들이 되었다. 나는 이를 ‘상향 평준화된 이미지’라 불러왔다.
흥미로운 것은 이런 상향 평준화된 이미지를 소비하는 일이 다른 무엇보다도 실제로 중시되고, 경험되며, 누려진다는 점이다. 한 달 내내 아르바이트를 해서 저축을 하고 장래를 대비하는 경우보다는 ‘탕짐잼’이나 ‘욜로’를 앞세워 호캉스나 해외여행에 돈을 쓰는 일은 확실히 늘어났다.
당장 실용적인 경차로 운전을 시작하기보다는 무리해서라도 외제 차를 구입하거나, 통장 잔고를 털어 명품을 사는 일도 어렵지 않게 목격할 수 있다. 이런 일은 확실히 우리 삶의 다른 여러 요소보다도 그런 이미지 자체에 즉각적으로 접근하고, 지금 당장 그에 속하는 일이 무엇보다 중시되었음을 뜻하는 것이다.
삶에서 다른 모든 것보다 이런 이미지야말로 핵심적인 것이 되었다는 것, 더군다나 그런 이미지에 대한 ‘즉각적인 접촉의 욕망’이 삶의 중심에 놓이게 되었다는 것을 ‘블루보틀 현상’은 다시 한번 보여준다. 어쩌면 이런 현상은 앞으로 더 빈번하게, 우리 문화 내에서 핵심적으로 일어날 것이다. 우리 삶이란 손을 뻗으면 닿아야 하는 그런 이미지의 연쇄 속에 자리 잡게 되었다.
이런 삶이 그 자체로 좋다거나 나쁘다고 말하기는 곤란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런 형태의 삶이, 이런 방식의 문화가, 이런 스타일의 존재 방식이 우리에게 무엇을 잃게 하거나 간과하게 하는지, 혹은 우리로부터 무언가를 앗아가는지에 관해서는 고민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새로운 삶의 방식은 늘 무언가를 주는 만큼, 무언가를 빼앗아가기 때문이다.
원문: 문화평론가 정지우의 페이스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