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 박봉이고 힘든 일을 뭐 하러 할까? 나 같으면 절대 안 해.”
“그러게 말이야.”
얼마 전 우연히 카페에 있다가 들은 옆 테이블의 말이다. 젊은 남녀는 누군가의 직업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다. 나는 할 일이 있어 금방 자리를 옮겼기에 그들의 이야기를 오래 듣지는 않았지만 저 두 줄의 대사만큼은 계속 머리를 맴돌았다. 아마 대부분 박봉이고 힘든 일을 계속하는 이유는 다른 일을 할 수 없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가 삶에서 현실적인 조건을 손쉽게 바꿀 수 있는 때란 그리 길지 않다. 흔히 자신이 하는 일이 자기와 어울리는지 알려면 적어도 그 일을 몇 년은 해봐야 할 것이다. 그쯤 되면 세상 돌아가는 것도 보이고 내가 무슨 일을 하고 싶은지, 어떤 일을 하며 살고 싶은지 조금은 알게 될 법도 하다. 그러나 그 정도가 되면 이미 그 분야에서 발을 뺄 수 없게 되는 경우가 많다.
어느덧 신입사원 나이는 지났고, 그나마 사회생활 하며 얻은 몇 년의 경력이나 전문성은 그 분야에서만 쓸모가 있고, 집에는 아이가 태어나 유치원이나 학교에 들어갈 때쯤 된 경우가 아마 태반일 것이다. 그러고 나면 이제 다른 방법이 없는 것이다. 어떻게든 해왔던 일을 계속하는 것 외에는 말이다. 다른 분야 혹은 업종으로 삶을 바꾸려면 자격증이라도 하나 새로 따든지 해야 할 것이다.
그러지 않고 다른 분야에 들어가 새로이 처음부터 수습 단계를 밟아나가는 일이란 힘든 건 둘째 치고 사회가 허락하지 않는다. 20대만 하더라도 대개 주변 사람들이 서로 비슷한 듯 느껴지기도 하지만 30–40대가 될수록 그런 기준은 엄격해진다. 나이에 맞는 경력과 전문성을 갖출 것 이란 사회의 잔혹한 기준은 점점 더 심해진다.
새로운 분야로 나아가기 위한 준비 과정도 만만치 않다. 이미 책임져야 할 가정이 있다면 그동안 감당해야 할 모든 현실적인 문제는 어찌할 것이며, 또 보장도 없이 새로운 영토로 나아간다는 것도 두렵다. 혼자라면 도전도 모험도 해볼 만할지 모르겠으나 책임져야 할 관계가 맺어진 순간부터 더 철저한 계획과 판단 없이는 새로운 무언가를 하기는 더욱 어려워진다. 그러니 결국 저 물음에 당사자 본인이라도 그렇게 대답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게 말이야.
종종 삶에서의 두 번째 길을 개척하는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 그들은 보통 직장을 다니면서도 직장 이후의 시간을 활용한다. 잠을 줄여서라도 다른 분야로 나아가기 위해 필사적으로 공부를 하든 사업을 준비하든 글을 쓰든 어떻게든 시간을 투자하려 한다. 그러나 그런 경우도 자신의 모든 여유 같은 걸 포기하거나, 함께 사는 사람이 희생하는 듯 보였다.
또한 대개는 다소 젊은 사람이 많았다. 그들 중에서는 그런 시도를 실패한 사람도 보았고 나름 삶의 전환에 성공한 사람도 보았는데 후자는 그리 많이 보진 못했다. 알고 보면 많은 삶이 생각보다 일찍 결정지어지는 셈이다. 그러니 타인의 삶에 어떤 관대함을 가져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모든 건 자기의 선택이고 자유의지이고 바보처럼 스스로 그런 선택을 해서 그런 삶을 사는 게 아닌 것이다.
삶은 대체로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되는 것이다. 어쩌다 보니 발을 뺄 수 없게 되고 끌려들어 가고 자기가 진정으로 원한다고는 말하지 못할 그런 삶을 살게 되기도 하는 것이다. 선택할 수 있는 시간은 생각보다 길지 않고 대개는 현명한 선택을 할 수 있기 전에, 충분히 고민해보고 선택할 수 있기 전에, 이런저런 것들을 알게 되기 전에 선택할 수밖에 없는 입장에 있다. 나 또한 이제는 선택폭이 무척 좁아졌다는 걸 느끼기도 한다.
그렇다고 해서 어느덧 선택해버린 자신의 삶을 너무 부정할 필요는 또 없을 것이다. 다들 그렇게 살아간다. 오히려 진정한 차이란 각자의 어찌할 수 없는 선택 속에서도 삶의 틈새를 누리는 기술에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기도 한다. 삶에서 극적인 전환을 할 수 있는 선택권이란 점점 사라져간다고 한들 여전히 그 속의 하루하루를 바꿀 선택권은 아마 주어져 있기도 할 것이다. 자유란 그렇게 미약한 것이고 소소한 것이지만, 그 작은 자유가 삶의 큰 차이를 만드는 것이라 생각해본다. 그렇게 위로하며 살아간다.
원문: 문화평론가 정지우의 페이스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