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14년 전에 지방 국립대를 나왔습니다. 어학연수는커녕 학비와 생활비를 벌며 학교 다니기도 급급했습니다. 다행히 매 학기 전액 장학금을 받고 다녀서 생활비만 벌면 되었습니다만, 힘든 시절이었죠. 대학생 때를 돌이켜보면 가장 아쉬운 건 동아리 후배들 술 한번 못 사준 것입니다. 운동복에 낡은 자전거, 족구 정도가 대학생활 추억의 전부네요. 암울했습니다만 취업을 하면 삶이 좀 나아질 거라 생각하며 살았더랬죠.
호기롭게도 취준생 주제에 저는 회사에 대한 기준이 명확했습니다. 꽤나 시간이 흐른 지금 생각해 봐도 웃긴데요. 이렇게 된 데는 제 얼리어답터 기질이 컸습니다. 지금이야 스마트폰이 당연하지만 예전 PDA폰 시절에는 뚱뚱하고 큰 폰을 들고 다니면 이상하게 보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효리폰, 권상우 폰, 문근영 폰 등등이 유행하던 시절이었죠. 장학금 받았다고 친척이 주신 100만 원으로 LG의 PDA폰 SC8000을 사서 너무 재밌게 쓰던 터라, 저는 이것 관련된 일을 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기준이,
- PDA폰을 만드는 회사나, 통신사
- ERP 관련 회사 (회계+전산)
- 1, 2가 안 되면 회계 쪽 일을 할 수 있는 (취업 후 회계사 공부를 자연스럽게 할 수 있는) 회사
이렇게 마음먹었습니다. 지금도 그런 것 같은데, 대부분의 하반기 공채를 준비하는 취준생들은 8월 말까지 토익점수를 만들어 두고 9월부터 공채 일정에 따라 자소서 기계가 됩니다. 저도 위 조건에 맞는 회사를 위해 자소서를 몇 군데 썼고 운 좋게도 9월 초에 바로 어느 중견기업에 합격했습니다.
현대자동차의 1차 벤더였던 그곳은 자동차 부품을 만드는 회사였는데 탄탄하고 적어도 현대차가 망하기 전에는 안 망할 것 같았습니다. 결정적으로 마음에 든 점은 회계팀으로 입사했는데 정원이 3명이고 매월 업무가 딱딱 정해진 루틴 한 것이었습니다. 근무지는 지방이긴 하지만 독하게 회사에서 공부하면 회계사도 될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중소기업치고는 2005년경 3,500만 원을 초봉으로 주었으니 조건도 나쁘지 않았습니다. 아침 일찍 공장으로 출근해서 공짜로 주는 밥 세 끼 다 먹으며 종일 일과 공부만 하다 자취방에 와서 자는 생활을 하면 되었죠. 공장 근로자들은 식사가 큰 낙이기 때문에, 웬만한 공장 있는 근무지는 식사가 다 잘 나왔습니다
그냥 눌러앉아도 되었겠지만, 3번 조건을 확보했으니 1번과 2번을 노려보기로 했습니다. 9월 초에 취업이 되어 버린 통에 마음이 많이 느슨해졌지만 기왕이면 하고 싶었던 일에 욕심이 생겼습니다.
생각보다 빨리 취업이 된 탓에 급히 내려오느라 자취방에는 옷 몇 가지와 집에서 가져간 중고 노트북이 전부였습니다. 퇴근하고 집에 캔맥주를 사 들고 가서 대형 통신사 K사의 원서를 쓰기 시작했습니다. 급히 내려가서 인터넷도 되지 않는 환경이라 2G PDA폰으로 테더링을 해서 인터넷을 했었죠.
그때 K사의 공채는 두 가지 방식 중 택 1 하는 것이었습니다. 일반전형과 지역전형인데요. 일반전형은 바로 서울과 본사에서 일할 수 있었고 지역전형은 지역에서 몇 년을 근무해야 했습니다. 대신 지역에서 대학을 나온 사람을 우대해 주었습니다. 그날 캔맥주를 홀짝거리며 원서를 쓴 탓에 저는 이걸 못 보고 원서를 일반전형으로 써 버립니다. 지역전형으로 했다면 저처럼 지거국(지방 거점 국립대) 출신은 훨씬 쉬웠을지도 모르는데, 여기서 꽤 큰 삶의 분기점이 생겼습니다. 이 이야기는 다른 글에서 자세히 쓰겠습니다.
해외 어학연수도, 심지어 비행기를 타 본 적도 없고 봉사활동이나 공모전도 해보지 못하고 먹고살기 바빴던 저는 지원서에도 쓸 콘텐츠가 많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냥 학생 때 돈 벌었던 이야기를 적었습니다. 알바 이야기가 대부분이었는데 뭔가 구구절절했던 기억이 납니다.
입사지원서를 업로드하고 나서 까맣게 잊어버리고 현 직장 OJT에 한창이던 어느 날, 서류합격 문자를 받았습니다. 이 회사는 무슨 생각으로 날 통과시킨 건가… 사람 구하기가 그렇게 힘들었던 것인가… 희한하다 여기며 면접을 준비하려 했습니다만, 지방인 데다 낮에는 회사에서 일을 하다 보니 논술이며 면접 준비를 할 수가 없더군요. 다음 카페 취업뽀개기 등에서 합격한 사람들끼리 모여서 스터디하느라 바쁜 것을 보며 속만 타들어 갔습니다.
시간은 순식간에 흘러 면접 날이 찾아왔습니다. 회사에는 졸업논문을 내러 학교에 가야 한다고 휴가를 내고 길을 떠났습니다. K사 본사는 웅장하기 그지없었습니다. 산속 공장에 있다가 나와서 보니 이건 뭐 시골쥐가 따로 없더군요. 면접장까지 찾아가면서 감탄사를 연발했습니다. 막 K사를 다니는 사람들이 위대해 보이고, 얼마나 대단한 사람들이 이런 데서 일을 하나 궁금했습니다. 얼굴에 나 시골쥐요… 써 붙인 채 면접장인 강당에 들어갔습니다.
매트릭스의 스미스 요원들도 아니고, 똑같이 옷을 입은 남녀 수백 명이 강당을 채운 모습은 장관이었습니다. 남녀 구분 없이 짙은색 상하의 정장, 밝은 색 와이셔츠. CTRL C, V를 연타하고 싶은 그런 느낌. 사람이 많아 놀라는 제게 면접 진행하는 분이 넌지시 말해줍니다.
이건 오전팀이고, 오후에 또 있고, 내일도 있어요~
대충 경쟁률을 계산해보니 당장 떨어져도 크게 부끄럽지 않은 숫자여서 오히려 마음이 편해지더군요. 제가 여기까지 온 게 어디냐 싶은데 면접비도 5만 원이나 주고 점심도 준다고 하니 감사하기까지 합니다. 거기다 대기실의 커피는 모두 스타벅스입니다. 안 되더라도 하루 잘 구경하다 가자…라는 생각으로 긴장을 풀며 시작했습니다.
시작은 한 시간 동안 시험지를 나눠주고 출제되는 주제에 대해 논술 고사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지금도 생생히 생각나는 주제는 바로, “외모지상주의는 계속될 것인가”였습니다. 14년 전 일을 잘 기억하는 이유는 이 주제가 이후의 조별 토론에서 그대로 쓰였기 때문입니다. 물론 논술고사 때는 ‘이 주제로 토론도 한다’는 사실은 모른 채, 저는 외모지상주의는 앞으로도 영원히 계속될 것이라는 주장을 구구절절이 써 올렸습니다. 여담이지만 그때 예상이 맞았던 것인지 10년 넘게 지나는 동안 이 사회는 외모에 더 집착하게 된 듯합니다.
이어진 조별 토론에서는 3:3으로 나눠 외모지상주의 긍정파와 부정파로 토론을 했습니다. 저는 진행자 역할도 자원해서 맡았습니다. 진행자는 잘하면 돋보이지만 매끄럽지 못하면 점수를 더 잃기 십상입니다. 거기에 진행에 신경 쓰다 보면 자신의 주장을 잘 펼치기도 힘듭니다. 그럼에도 진행자를 자원한 것은 순간적으로 ‘이 주제는 긍정도, 부정도 모두 가능한 정답이 없는 주제’라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외모가 경쟁력이 되는 것은 엄연한 현실입니다. 외모 때문에 사회적 비용이 소요되고 사람들이 본질을 보지 못하는 것도 사실입니다. 어떤 주장을 해도 결론이 명확히 나긴 어렵습니다. 때문에 결정적인 한 칼을 내밀 수 없다면 매끄러운 진행이 점수를 얻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습니다. 거기에 엄격한 시간제한이 있었으니 명확한 결론은 어느 조도 내지 못할 것 같았습니다. 제 예상대로 논쟁은 각자의 주장을 펼치는 것 외에 결론 없이 끝났습니다.
첫날 이걸로 끝이었으면 좋았겠지만 하이라이트가 있었으니 바로 3:1 압박 면접입니다. 요즘은 덜한 것 같지만 그때는 압박 면접이라는 것이 유행이었습니다. 공격적인 분위기와 무례하다 싶은 질문들로 면접자의 멘털을 흔드는 것이죠. 그런 상황에서 대처를 보겠다는 것인데 취지는 이해하나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어서 긴장이 좀 되었습니다.
논술과 조별 면접이 나쁘지 않았기 때문에 ‘혹시 나도?’라는 희망을 품고 면접실로 들어갔습니다. 표정에 ‘엄근진’을 장착한 최소 부장은 되어 보이는 어르신들이 험상궂은 표정으로 저를 반겼습니다.
이 아저씨들과 50분을 대화하라니, 면접비 5만 원은 너무 적은 것이었습니다… 서류를 굳은 표정으로 보시던 면접관들은 더 굳은 표정으로 저를 보며 바로 공격을 시작했습니다.
- 이력서를 보니 그냥 학교만 열심히 다닌 것 아니냐
- 상경계열이면 금융 자격증도 많이들 따던데 뭐 했나
- (겨우) 이 점수 나온 토익 외에 다른 외국어 자격은 없나
- 우리가 왜 당신을 뽑아야 하나. 객관적으로 인재가 많이 왔다. 설명해 보라
- 지방에서 학교 나오면 훨씬 더 특출 난 무언가 있어야 하지 않겠나
- 아르바이트할 시간에 기초적인 스펙을 더 쌓았어야 할 것 같다
- 학점 때문에 서류가 통과된 것 같은데 학점은 기초다
쏟아지는 공격에 대해 최선을 다해 방어해 보았습니다만, 타노스에게 두들겨 맞는 아이언맨 마냥 제 멘탈 갑옷이 하나둘씩 떨어져 나갔습니다. 그래도 최선을 다해 답변했습니다. 전액 장학금 받고 생활비 버느라 힘들었지만 19세 이후로 부모님께 돈을 받은 게 없다, 문과임에도 IT를 좋아해서 대학의 대규모 전산실을 관리하고 홈페이지 제작사업도 했다 등등… 그러나 타노스는, 아니 면접관들은 강했습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제게 결정타를 날린 것은 말이 아니라 바로 ‘침묵’이었습니다. 50분의 면접 시간 중 25분가량이 지나자 면접관들이 더 이상 질문을 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표정에서 읽을 수 있었습니다.
나는 너에게 더 궁금한 것이 없다.
그 순간 제 마음속의 무언가가 끊어졌습니다. 저는 활짝 웃으면서 면접관들을 바라보며 말했습니다.
“저를 안 뽑아 주셔도 됩니다.”
“…?”
“대신 저도 제가 하고 싶은 말을 좀 하고 가도 될까요?”
몇 초간 정적이 흘렀습니다. 면접관 3분은 황당하다는 듯 서로 마주 보더니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해 보라고 했습니다. 저는 담담히 말했습니다.
아마도 오늘이 지나면 살면서 이처럼 높은 K사 고위직 분들을 만날 일이 또 있을지 모르겠다. K사 서비스를 좋아하고 많이 사용하지만 이 회사는 이런 식으로는 영원히 2등일 것이다. 절 뽑지 않아도 좋으니 지금 제가 드리는 말을 잘 듣고 유관부서에 전달해서 개선해 주면 좋겠다. 나중에 바뀐 걸 보며 멀리서나마 뿌듯하게 여기겠다.
남은 25분 동안 저는 K사의 유선 인터넷 모뎀 장비의 문제점을 시작으로, 유선과 무선의 과금체계와 납부방법의 문제점, 동일 회사의 상품임에도 Single Sign On이 안 되던 이슈, 무선 인터넷 데이터 무제한 요금제를 편법으로 이용하는 방법, 월드패스카드라는 선불상품권을 악용하는 방법, 막 시작했던 스마트 디바이스 라인업의 문제점에 대해서 담담이 짚어주었습니다.
특히 K사가 경쟁사에 비해 앞서있던 WIFI 서비스인 네스팟(Nespot)에 대해서는 강한 질책을 했습니다. 기기인증방식이나 전화국에서 고객 상담 방식, MAC 변형을 통한 우회루트의 남용 등등 당장 고쳐야 할 문제가 많은데 손을 놓은 점이 그랬고 단말과 번들링 방식에 대해서도 비판했습니다. 실제 유저들이 원하는 것이 무엇이니 어떻게 개선해 나가면 좋을 것인지도 충고해 주었습니다.
아쉬운 게 있으면 주눅이 들고 눈치를 보게 되는 게 사람입니다. 그러나 ‘이 면접은 절대 못 붙는다’라는 판단이 선 취준생이라면 상황이 다릅니다. 그냥 고객이니까요(그리고 이판사판). 제가 생각하는 문제점을 진심을 담아, 다소 격렬하게 짚어주었습니다.
중간중간 의견을 주던 면접관들의 얼굴은 점차 붉어졌습니다. 실은 그런 게 아니라며 반박을 하시길래 숫자를 들이대며 다투기도 했습니다. 저는 K사의 B2C 서비스 전반에 대해서라면 어떤 논쟁도 자신이 있었습니다. 다 제가 좋아서 써보고 연구한 것들이었으니까요.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저는 가난한 고학생인데 얼리어답터였습니다. 학교 식당 2,000원짜리로 세 끼를 해결하던 놈이 100만 원짜리 PDA를 샀습니다. 거짓말 안 보태고, 지금의 체감 가치로는 1억 원짜리 외제 차를 사는 것과 비슷한 느낌입니다. 그만큼 큰 지출이었습니다.
여러분도 1억짜리 외제 차를 지금 구입한다면 정말 열심히 알아보고 공부하지 않을까요? 당시 PDA 폰이 너무 사고 싶었던 저는 해외 포럼부터 국내 모든 커뮤니티까지 2002년부터 외우다시피 드나들며 공부했습니다. 이게 그냥 하면 공부지만 좋아서 하면 놀이가 됩니다. 시간 날 때마다 투데이즈 피피씨(todaysppc) 등 사이트를 눈팅하며 놀았습니다. 4년을 쭉 그랬으니 덕후의 반열에 올랐습니다.
PDA폰을 가지고 놀다 보니 무선 데이터 요금제에 대해서도 훤히 알게 되고 (그 당시에는 JUNE, MagicN 등 괴이한 이름과 비싼 요금제로 무선 데이터를 사람들이 두려워했습니다) 통신 요금을 어떻게든 줄이려 하다 보니 가정의 인터넷 요금제에 대해서도 연구하고, 전화국 창구를 밥 먹듯 드나들었습니다. 창구직원과 싸우기도 많이 싸웠습니다.
너무 옛날이 되어 사람들 기억 속에 없지만, 당사 K사는 유선 인터넷망을 기반으로 이미 와이파이망을 갖춘 상황이었습니다. 경쟁사인 1위 S사는 그런 자산이 없다 보니 지금 생각하면 말도 안 되는 악행을 꽤나 오랫동안 했습니다. 바로 자사를 통해 출시되는 기기에서는 와이파이 모듈을 삭제하고 출시하는 것이죠. 당시 통신시장은 제조사보다 통신사가 훨씬 막강한 권한이 있어서 이런 게 가능했습니다.
JUNE 등의 무선 인터넷은 호갱 고객을 양산해서 통신사 배를 불리는 데 일조하던 터라, S사로서는 훨씬 더 빠른 데다가 무료인 와이파이가 보편화되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을 것입니다. 면접 말미에 저는 상세히 이 부분을 짚으며 대응 방안을 일러주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얼굴이 화끈거립니다. 얼마나 당돌하고 웃겨 보였을지.
폭풍 같은 25분이 지났습니다. 면접관들이나 저나 얼굴이 붉어진 상태. 감정도 격양된 상태입니다. 그래도 속이 후련했습니다. 깍듯하게 인사를 마치고 나오면서 저는 부모님께 전화를 드렸습니다. 떨어진 것 같으니 공장 가서 열심히 회계 공부하겠다고요. 어머니는 다시는 K사 상품을 쓰지 않겠다고 하셨고, 저는 그렇게까진 하지 말자고 했습니다.
또 열심히 공장에서 OJT를 하는데, 다시 문자가 왔습니다. 실무면접을 통과했으니 임원면접을 보러 오랍니다. 면접관과 욕설만 안 했지 엄청난 설전을 벌이고 온 마당에 합격이라니. 이건 뭔가 이상하다… 합격자를 랜덤으로 산출하는 것인가… 별별 생각이 다 들었습니다. 시골 공장에서 제가 내린 결론은, ‘면접을 하도 이상하게 봤으니 좀 더 물어보고 결정하겠다는 건가 보다’였습니다.
임원면접일이 되었습니다. 면접비는 또 5만 원입니다. 상경하면서 속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때 못한 PR을 할 기회가 있으면 잘하고 이미지 개선도 좀 해야지, 묻는 말에만 착하게 대답해야지… 면접관과 싸운 기분처럼 찜찜한 게 없습니다. 반성하고 올라왔습니다.
임원면접은 임원 3분과 면접자 6명이 40분간 대화하게 됩니다. 모여있는 사람들은 여전히 스미스 요원 복장입니다. 같은 조가 된 5명의 면면을 보니 다들 얼굴에 ‘똑똑/스마트/총명’이라고 쓰여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과 경쟁해야 하는 것을 걱정하며 들어갔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한 명씩 자기소개를 시키는데 스펙과 경력이 엄청납니다. 일단 6명 중 4명이 S 대였습니다. 독일어로 자기소개를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인턴 경력들은 다들 어떻게 그렇게 글로벌 대기업에서 했으며 학생 때 한 활동들은 어찌나 다들 굉장한지.
듣고 있으니 마음이 또 편해집니다. 떨어져도 자연스러울 것 같은 이 편안함이란 시몬스 저리 가라입니다. 한 명씩 자기소개를 한 후, 면접관들이 마음대로 특정인에게 질문을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어째 진행되는 게 이상했습니다. 저를 제외한 다른 사람들에게 질문이 많은 것 같았습니다.
특히 S대 법대를 나와서 영화감독이 되고자 몇 년을 노력했다는 30대 초반의 어떤 분이 기억에 남습니다. 면접관들은 집요하게 왜 사법고시 준비를 안 했느냐, 영화업계에서 배운 게 무엇이냐, 입사한다면 어떻게 회사에 기여하고 싶으냐를 물었습니다. 그분을 필두로 다른 4명에게도 고루 질문이 돌아갑니다. 궁금한 게 많으셨나 봅니다. 그런데 왜 제게는 궁금한 게 없으셨던 건지 모르겠습니다.
40분의 면접 시간 동안 다른 지원자 5명이 질문 소나기를 받는데, 제게는 발언 기회가 딱 2번 있었습니다. 처음의 ‘자기소개’와 마지막에 ‘하고 싶은 말’입니다. 물론 6명 공통으로 주어진 항목이었습니다. 즉 제게는 40분간 아무도, 어떤 것도 질문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끝나고, 인사를 마치고 나왔습니다.
속으로 느낌이 왔습니다. 더불어 강한 분노가 치밀어 올랐습니다. 야… 이 회사 진짜 너무하네. 이럴 거면 면접에 왜 부르나? 지역균형 면접 봤다는 숫자 채우기 같은 건가. 난 대체 뭐였던 거지라는 분노. K사 본사 계단을 내려오며 또 부모님께 전화를 드렸습니다. 이번에야말로 확실히 떨어진 것 같다고. 앞으로 K사 서비스 하나도 쓰지 말자고.
그로부터 얼마 뒤, 최종 합격 메일과 문자를 받았습니다. 기대가 1도 없었기 때문에 정말 놀랐습니다. 1차 면접 때는 싸웠고, 2차 면접 때는 공기와 같은 존재감을 뽐냈는데 합격 일리 가요. 한동안 전산오류를 의심했습니다. 그래서 당시 있던 회사에 말도 못 했습니다.
신체검사를 받고 오리엔테이션을 가서야 오류가 아님을 알았습니다. 이쯤 되면 비하인드 스토리가 너무 궁금해집니다. 당시에는 대체 왜 제가 뽑혔던 건지 알 도리가 없었습니다. 한참이나 시간이 흐른 뒤 건너 건너로 겨우 듣게 되었습니다. 1차 실무면접에서 면접관들은 저와 언성을 높였음에도 매우 후한 점수를 주었다는 것을요.
점수가 너무 높아서 임원면접 때는 임원들이 다른 사람에게 시간을 더 투자했던 것이었습니다. 제가 속했던 조 6명 중 합격한 사람은 저와 다른 한 명이었습니다. S대 법대를 나와 질문을 많이 받았던 그분은 오리엔테이션 때 없었습니다. 그때의 면접은 결국 떨어뜨리기 전 확인 과정이었던 듯합니다.
14년이 지난 지금 그때를 돌이켜보면 재미있기도 하고 스릴 넘치기도 한 기억입니다. 그때 그분들이 왜 그렇게 생각했나 그리고 지금의 나라면 그때의 날 과연 뽑을까 가끔 생각해 봅니다. 결과적으로 저는 그 흔한 K사 대비 서적 하나 안 보고 붙었습니다. 그냥 덕후였을 뿐인데요.
그 덕후는 입사하고 현장에서 2년간 영업을 하다가 그토록 원하던 신사업부서로 자리를 옮깁니다. 입사 전에도 본인이 좋아하는 것만 찾아다녔는데 입사 후에도 운 좋게 그런 일을 할 수 있었습니다.
덕후는 카드 체리피킹 마니아이기도 했습니다. 돈이 없다 보니 한 푼이라도 아껴보려고 시간 날 때마다 카드 연구를 했습니다. 지금 카드회사를 다니는 것도 마냥 우연은 아닙니다. 세상에 없던 카드를 만들어보며 재미있게 지냅니다. 여기까지 오는데도 나름의 드라마틱한 스토리가 있지만, 현직자이다 보니 아마 이 이야기는 먼 훗날에야 쓸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제가 회사 생활을 언급하면서 항상 빼놓지 않는 키워드는 “재미”입니다. 제가 쭉 그걸 찾아 살았기 때문입니다. 앞으로도 재밌는 것을 하고 살고 싶습니다. 14년 전 덕심 가득했던 청년은 지금 중년의 덕후가 되어 과거를 회상해 봅니다. 59년 후 100세가 되어 눈을 감을 때도 재미있게 살았다고 유언을 남기고 가고 싶습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