꿉꿉한 날씨를 뚫고 충무로에 도착해 안드레이 즈비아긴체프 감독의 〈러브리스(Loveless)〉를 봤다. 영화를 다 보고 느낀 거지만 이날 날씨와 장소, 그리고 영화가 참 잘 들어맞았다는 것. 사랑이 사라졌다? 사라졌다고 할 만한 사랑이 이 영화에서 애초에 존재하긴 했던 것일까?
나무에 올라가 보는 아이. 누군가 집을 보러 온 것이 어떤 상황을 의미하는지 알아챈 아이의 퉁명스러운 태도. 냉장고 위의 작은 텔레비전. 라디오와 텔레비전을 통해 전파되는 시대상. 질 스타인, 버락 오바마, 미트 롬니의 이름을 러시아 영화 속 낯선 맥락에서 조우하는 희유한 경험.
아울러 우크라이나 사태를 환기해내는 러시아 출신 감독의 기지까지, 몰입할 수밖에 없게 만드는 장치가 곳곳에 기다린다.
섹스, 그리고 불안
제냐는 안톤과 잠자리를 가진 후 그의 사랑을 자꾸 확인하려고 한다. 사랑에 대한 확신이 깃든 표현을 갈구하며 몸부림친다. 자신을 사랑하는 것에 대해 재차 질문을 던지면서.
보리스의 아이를 가진 마샤의 상황, 심리적 상태도 딱히 달라 보이지 않는다. 임신 중에도 뜨겁게 서로를 탐닉하는 보리스와 마샤. 그럼에도 격렬한 정사 장면 후에 보는 건 마샤의 불안과 눈물이다. 그녀는 겁이 난다고 말한다. 자신을 달래는 보리스에게 던지는 마샤의 말은,
전처한테도 그랬겠지.
〈러브리스〉는 섹스 장면조차 어딘가 어둡고 보는 사람마저 갑갑하게 한다. 이 두 쌍의 잠자리에는 ‘불안’이라는 정서가 공통적으로 내재한다. 그렇다, 불안. 독일의 작가 에바 마리아 추어호르스트는 말한다.
불안은 감각을 마비시키고 몸에 갑옷을 두르기 때문에 섹스에는 독이나 마찬가지다.
제냐와 안톤, 보리스와 마샤는 이 ‘독’을 끝까지 제거하지 못한다.
아들을 상대에게 떠넘기기 바쁜 제냐와 보리스. 아직 12살밖에 안 된 어린 아들을 집에 혼자 두고 제냐와 보리스는 각각 정인의 품에 안긴다. 아직 이혼 절차가 마무리되지 않았음에도 자식을 무책임하게 방기한 것이다. 〈러브리스〉를 끝까지 보다 보면, 새로운 두 쌍의 삶 역시 영화 제목과 진배없어지는 것을 알 수 있다. 알랭 드 보통의 일갈이 생각나는 건 왜일까.
결혼을 사랑, 섹스, 가족이라는 우리의 모든 희망에 대한 완벽한 해결책으로 보는 것이 순진한 착각이라면, 마찬가지로 외도가 결혼생활의 모든 좌절을 해소해줄 효과적인 해결방법이라는 생각도 순진한 착각이라는 것이다.
불안이 사라지지 않은, 깊은 사랑의 결여가 상수가 된 건조함. 숨이 막힌다. 제냐와 관객은 아무리 뛰어도 극복할 수 없는 답답함을 동시에 느낀다. 그녀가 입은 옷에 프린트된 국가명 ‘러시아’는 퍽이나 은유적이다.
노모포비아 Nomophobia
제냐와 보리스, 특히 제냐에게 이런 말을 해주고 싶을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스마트폰 좀 그만 봐!
아이랑 있을 때든, 마음이 식어버린 보리스와 이야기할 때든, 심지어 새로운 사랑의 대상과 있을 때도 제냐의 눈이 가장 오래 머무르는 곳은 자신의 스마트폰이다. ‘확인 강박’에 시달리는 건지 아니면 습관적으로 보는 건지 주야장천 스마트폰만 본다.
필시 그녀는 노모포비아(Nomophobia)에 사로잡힌 듯하다. 노모포비아는 말 그대로 휴대전화가 내 손에 없으면, 혹은 휴대전화를 보지 않으면 불안하고 더 나아가서 공포감까지 품는 것을 말한다. 국내 웹상에서는 최근엔 이를 ‘폰연일체(Phone然一體)’라고 재미있게 표현하기도 하다.
그녀의 입장에서는 원치 않은 ‘결과물’인 아들 알료사, 불행의 원인인 남편 보리스보다 자신이 원하는 화면만 간편하게 보여주는 스마트폰에 더 마음이 가는 것이다. 이 사랑 없는 분위기에서 가장 애착을 갖는 대상이 고작 스마트폰인 게 한편으로는 안쓰럽기도 하다.
관료적 대응
가출한 애를 일일이 찾을 수 없다는 말이 녹을 먹고사는 사람의 입에서 나온다. 한 군데 더 들러야 한다는 말에 이들의 직업관(?)이 유감없이 드러난다. 통계는 희망적이라는 말도 잊지 않는다. 아이를 잃어버린 부모에게 통계를 운운하는 경찰에 할 말이 없어진다.
국가기관이 아닌 봉사단체의 성격에 가까운 수색구조단체에 연락해보라는 것을 ‘조언’이랍시고 해주는 러시아 경찰의 모습. 이 관료적 대응에 래퍼처럼 빠른 속도로 판결문을 읽어대던 한 법조인의 얼굴이 스친다. 안드레이 즈비아긴체프의 〈리바이어던〉 속에 나왔던 그 기계와 같았던 판사 말이다.
병리적 커뮤니케이션
으아아아악!
제냐가 소리를 지른다. 우리가 흔히 ‘소리를 지른다’고 표현할 때 생각하는 범위를 훌쩍 넘어선, 발광에 가깝다. 그녀의 요구는 간단하다. 창문을 닫으라는 것. 이 정도 이유로 발광까지 피우는 제냐의 모습은 분명 병적이다. 그 모습을 보고도, 기실 대단치 않은 요구에도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끝까지 응하지 않은 보리스 역시 문제적이다.
커뮤니케이션을 논하기엔 이미 너무 멀리 온, 비명만 남아버린 이 둘의 관계. 사랑의 결핍이 일상이 되고 불안의 지속이 평시가 된 감옥에 유폐된 당신의 수인번호는 몇 번인가. 힘없이 쓰러진 나무. 흰색과 빨간색이 교차된 끈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는다.
원문: 석혜탁 칼럼니스트의 브런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