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말, 그리고 구한말 많은 사람들이 ‘최초’를 장식해. 최초의 유학생, 최초의 신식학교 입학자, 최초로 신식 결혼식 올린 사람, 최초의 유학생, 최초의 변호사, 최초의 광고자 등등 바야흐로 나라의 문을 열어젖힌 나라에 밀려드는 근대의 파도 속에서 허다한 ‘최초’가 양산됐고 그들은 오늘날 다양한 분야의 시원이 된다. 그 와중에 최초의 여의사의 이름도 알아 둬라. 박에스더.
언젠가 산하의 오역에서도 얘기했지만 그녀의 본명은 김점동이다. 이름이 에스더가 된 것이야 학살의 위기에서 자신의 민족을 구한 현명한 성경 속 페르시아 왕비 에스더의 이름을 땄으려니 하지만 성이 박씨가 된 것은 결혼하면 성을 버리고 남편의 성을 따르는 서양식 습관 때문이었지. 이름은 없어도 성은 간직하던 한국 풍습까지 버리고 굳이 서양식을 따라야 했느냐 물을 수도 있을 텐데 나는 거기에는 이유가 있다고 생각해. 뭐냐고? 들어 봐.
김점동은 1877년 서울에서 광산 김씨 김홍택의 딸 넷 가운데 셋째 딸로 태어난 그녀는 일단 그 시대의 다른 여자들에 비해서는 행운아였어. 아버지 집 근처에 아펜셀러를 비롯한 감리교 선교사들이 근거지를 마련한 것이지. 김홍택은 그들의 고용인이 됐고 당연히 서양 문물에 빨리 눈을 뜨게 돼. 여자들을 위한 학교 이화학당이 설립됐다는 말을 들은 그는 자신의 딸 가운데 총기가 있어 뵈는 셋째 딸을 그곳에 넣기로 하지. 그조차 대단한 일이었어. 서양 선교사들이 아이 눈알을 빼 삶아 먹는다는 흉흉한 소문이 돌던 시절, 설립자 스크랜턴은 병자나 버려진 아이들을 데려와 공부시키던 상황이었거든. 김점동은 네 번째 입학생이었지만 아버지 손에 이끌려 온 경우로는 최초였어.
아버지가 끌고는 왔지만 열 살 난 김점동도 얼마나 무서웠겠어, 스스로 술회하길 스크랜턴이 난로 옆으로 오라고 하니까 아 저 여자가 드디어 나를 구워먹으려는구나 생각했다고 하는군 . 하지만 곧 그녀는 타고난 총기를 발휘하기 시작해. 세례명을 에스더로 받은 그녀는 영어에 발군의 실력을 드러냈고 곧 서양 선교사들과 ‘프리 토킹’이 어렵지 않기에 이르지. 스크랜턴은 남녀유별의 조선 사회에서 여성들이 제대로 된 치료도 못받는 것을 가슴 아파하다가 보구여관이라는 여성 전용 병원을 세워, 김점동은 여기서 통역을 맡지.
통역은 기꺼이 했지만 피가 튀기고 살을 째는 의사 일은 질색을 했는데 어느 날 언청이 소녀를 훌륭히 고쳐 내는 의사의 솜씨를 보고는 마음을 180도로 바꿔 버려. “이게 내 갈 길이로구나.” 그때 나이 15세였지. 그런데 그녀가 의사의 길로 매진하기에는 장애물이 너무 많았어.
우선 여자 나이 이팔 청춘 16세는 당시로서는 ‘결혼적령기’였거든. 그 나이를 넘어서면 뭔가 자신에 문제가 있거나 부모가 문제가 있거나 둘 중 하나였지. 당연히 김점동의 집안에서도 성화를 부리게 돼 “의사는 뭔 의사. 빨리 시집이나 가거라” 그 뿐만 아니라 환자들까지 이상하게 물어 보지. “아니 왜 처자는 시집을 안 가우?” 마침내 김점동의 어머니가 선교사들에게 폭탄선언을 해.
“여러분들이 에스더의 신랑감을 찾아주지 않으면 하나님을 믿지 않는 남자라도 결혼을 시킬 수 밖에 없어요!”
기껏 살뜰하게 키워 놓은 저 영어도 잘하고 능력도 있는 조선 여성을 제사상 차리고 불씨 지키는 조선 며느리로 만들기는 싫었던 선교사들도 발벗고 나선다. 그때 김점동과 함께 일하던 여의사 로제타의 남편 윌리엄 홀이 한 사람을 소개한다. “박유산이라는 조선 청년이 있어요.”
그는 원래 윌리엄 홀의 마부로 고용된 사람이었어. 그는 홀과 함께 여행하면서 기독교에 감화됐고 세례를 받았지. 홀이 물었대. “하나님을 섬기는 여자가 좋겠느냐. 바느질 잘하고 음식 잘하는 신부가 좋겠느냐. ” 박유산은 전자라고 대답했고 이만하면 됐다고 그를 신랑감으로 들이민 거지. 하지만 그래도 서울에서 행세깨나 하던 김점동의 집안에선 눈꼬리가 올라갔어. 아버지가 훈장이라고는 하지만 집 나온 떠돌이에 선교사 마부하던 친구를…… 그러나 김점동은 이렇게 말한다.
“저는 남자를 결코 좋아하지 않을 뿐 아니라 바느질도 잘 못합니다. 그러나 우리 관습은 결혼을 해야 합니다. 이 점은 저도 어쩔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박씨를 저의 남편으로 삼고자 하시면 저의 어머니가 그를 좋아하지 않는다 해도 저는 그의 아내가 될 것입니다. 그의 지체가 높고 낮음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고 어머님께 말씀드리겠습니다. 저는 부자거나 가난하거나 지체가 높고 낮음을 개의치 않습니다.”
즉,박유산이 좋아서 결혼을 결심한 게 아니라 관습에 맞설 용기까지는 없었던 나머지 마지못해 한 선택이었어. 둘은 1893년 5월 결혼한다. 김점동. 우리 나이로 열 일곱. 박유산 나이 스물 여섯. 그런데 둘을 결혼시키는데 큰 공을 세운 윌리엄 홀이 병에 걸려 세상을 떠났고 아내 로제타 셔우드 홀은 미국으로 돌아갈 것을 결심해. 그때 김점동은 그 동안의 염원이던 의학 공부를 위해 미국에 데려가 줄 것을 청했고 김점동과 박유산 부부는 미국행을 하게 돼.
부부는 둘 다 공부에 뜻이 있었다고 해. 박유산도 아무렴 청운의 뜻이 없었겠어. 천하의 역적으로 몰렸던 서재필이 미국인 의사가 돼서는 의기양양하게 금의환향하는 것도 봤을 테고 태평양까지 건너와서 자신도 뭔가 해 보고 싶었겠지. 하지만 박유산은 공부를 포기해. 당시 조선 남자들과도 다르고 오늘날의 남자들에 비해도 좀 특별한 선택을 한 거지. 아내의 재능과 의지를 믿은 그는 농장과 식당에서 일하며 아내를 뒷바라지한다.
특이한 건 그는 그렇게 미국에서 일하면서도 상투를 자르지 않았다고 해. 이미 조선에도 단발령이 선포된 뒤였고 머리를 깎는 게 개화의 상징인 양 여겨질 때였는데 말이야. 이유가 뭐였을까? 기독교인이 신체발부 수지부모를 신조로 삼았을 것 같지는 않고. 혹시 그건 아니었을까? 아내에게 던지는 무언의 메시지 같은 거. 즉 “조선을 잊지 말라.”는 호소가 아니었을까. 서재필처럼 미국인 의사로 우리말까지 잊고 살아가지 말고 반드시 조선으로 돌아가자는 그런……
부창부수. 너무 힘들게 공부하는 것이 안스러우니 그냥 조선으로 돌아오라는 로제타 홀의 권유에 박에스더는 이렇게 답했다. “제가 지금 여기에서 이것을 포기하면 다른 기회가 오지 않을 것을 알고 있습니다. 저는 최선을 다해 노력할 것이고, 최선을 다한 후에도 도저히 배울 수가 없다면 그때 포기하겠습니다. 그 이전에는 결코 포기할 수 없습니다.” 이건 박에스더 혼자만의 대답은 아니었을 거야. 그 편지를 쓰는 박에스더(미국에서는 당연히 이름이 박에스더가 됐겠지) 옆에는 땀에 젖은 상투를 매만지면서 “암 포기할 수 없고 말고.” 중얼거리는 박유산이 있었을 테니까.
그렇게 4년이 흘러 졸업을 눈앞에 두지만 고된 노동에 지친 박유산은 그만 폐결핵에 걸리고 아내가 졸업시험을 치르기 3주 전에 그만 숨을 거두고 말아. 남편의 묘비명에는 이런 성경 구절이 써 있단다. 마태복음 25장 35절. “내가 나그네였을 때 나를 영접하였고…”
내 생각에 이 구절은 부인 박에스더가 고른 게 틀림없을 거야. 결혼을 안 할 수도, 할 수도 없던 열 여섯 살 꿈 많은 조선 처녀의 암울함이 떠올랐겠지. 그 정처없고 오갈데도 없는 나그네 신세의 손을 잡아 준 남편, 자신의 꿈을 포기하고 아내의 꿈을 ‘영접’했던 남편의 죽음에 박에스더는 어떤 심경이었을까.
그녀는 의사가 되자마자 조선으로 달려가. 그리고 남편에게 해 주지 못한 보답을 조선의 여성들에게 베풀어. 병원에서 환자들만 본 게 아니라 나귀를 타고 두메산골로 찾아갔고 돌팔이일지언정 남자 의사 한 번 보지 못하고 죽어가던 여성들의 손을 잡아 주지. 하지만 10년간 과로와 혹사를 거듭하던 그녀의 육체에도 남편을 죽인 폐결핵이 찾아든다. 그리고 나이 서른 넷의 한창 나이에 그녀는 서둘러 남편의 뒤를 따르게 돼. 1910년 4월 13일의 일이지.
한국 최초의 여자 의사 박에스더 부부는 그렇게 모두 폐결핵의 희생자가 됐지만 그 부부의 삶을 지켜봤던 로제타와 윌리엄의 아들 셔우드 홀은 이모같이 지낸 박에스더에게 약속했다고 해.
“반드시 결핵 전문의가 되어 조선의 결핵 환자들을 돕겠어요”
우리가 어렸을 때 많이 샀던 ‘크리스마스 실’은 이 셔우드 홀이 만든 거다. 홀 가문은 3대에 걸쳐 조선과 한국을 도왔고 그들은 지금도 양화진 외국인 묘지에 잠들어 있다. 아마도 그들은 조선에서의 한평생 박에스더와 박유산 부부를 떠올리며 살았을 거야. “에스더는 날마다 새로운 인생을 배우게 한다”던 로제타 홀의 감탄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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