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Aeon의 「Will we ever know the difference between a wolf and a dog?」를 번역한 글입니다. 글쓴이 카트자 페티넨(Katja Pettinen)은 캐나다의 마운트 로얄 대학교의 문화인류학자입니다.
캐나다 록키 산맥 근방에 살다 보면 대자연을 마주할 일이 자주 생깁니다. 제가 사는 캘거리에서 한 시간만 차를 타고 나가면 핸드폰도 터지지 않고 인적을 찾기 어려운 야생 한복판에 서죠. 야생에서는 당연히 수많은 야생동물을 만납니다. 그 가운데는 코요테나 늑대처럼 북미 대륙에 서식하는 수많은 갯과 동물(canid)도 있습니다.
제가 다른 사람과 같이 야생으로 나가는 일은 거의 없지만, 반대로 갯과에 속하는 또 다른 동물인 제 반려견은 거의 매번 저와 함께 록키 산맥으로 산책을 갑니다. 학명은 훨씬 복잡하지만 제게는 소중한 가족인 만큼 제가 부를 수 있는 ‘유니’라는 이름의 반려견입니다.
북위 42도보다 높은 추운 지방에 고도도 높은 산악 지역이다 보니 이곳에는 눈이 많이 내립니다. 보통 초가을 무렵부터 눈이 내리기 시작하죠. 유니와 저는 상대적으로 따뜻한 여름에도 자주 야생을 누비지만, 각자 겨울과도 인연이 있습니다. 유니는 핀란드 사미개(Finnish Lapphund) 종으로 스칸디나비아 북부에서 시작된 종이고, 저도 조상을 따라가 보면 스칸디나비아 남부 혈통이라고 합니다. 둘 다 추운 지방 출신인 셈이죠.
겨울에 록키 산맥의 자연을 보러 가면 웅장한 풍광이 가장 먼저 두 눈을 사로잡습니다. 후각이 발달한 개인 유니는 여기저기 냄새를 맡으며 신나게 뛰어다닙니다. 물론 가끔 눈 위에 난 발자국을 쫓아 가기도 하지만요. 저와 유니의 발자국이 나란히 날 때도 있고, 늑대가 지나간 발자국과 유니가 남긴 발자국이 만날 때도 있습니다. 아직 늑대 무리를 직접 만난 적은 없지만,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늑대가 울부짖는 소리는 가끔 듣습니다.
우리는 어려서부터 늑대를 비롯한 야생의 갯과 동물을 경계하고 두려워해야 한다고 듣고 배우며 자랐습니다. (인간이 길들이지 못한) 들개와 늑대는 잔인한 사냥꾼이자 언제든지 인간을 해칠 수 있는 존재로 묘사되곤 하죠. 실제로 록키 산맥 근방에 사는 한 주민은 유니와 산책을 나가는 저를 보고 잘못해서 굶주린 늑대라도 만나는 날에는 뼈도 못 추릴지 모른다고 걱정해주기도 했습니다.
유니와 제가 인간의 언어로 대화 나눌 수는 없지만, 유니의 모습을 보면 야생에서 뛰어놀면서 갑자기 누가 나타날까 봐 걱정하거나 두려워하는 기색은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핀란드 사미개는 원래 스칸디나비아 지방에서 순록을 치는 유목민들이 순록떼를 보호하고 인도하기 위해 훈련한 종입니다. 유니의 핏속에 사미개 종의 유전자가 있는 한 기본적으로 침입자로부터 무언가를 지키려는 성향이 있어서 더 씩씩해 보이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개는 지구상의 수많은 동물 가운데 아마도 사람과 가장 많이 부대끼고 특수한 관계를 맺으며 함께 진화해온 동물일 겁니다. 오랜 시간 실로 다양한 상황에서 개와 사람은 서로 돕고 의지하며 공존하는 법을 익혀 왔습니다. 하지만 이는 유전자 분석으로는 잘 드러나지 않는 역사고, 고고학적 증거도 변변치 못한 주장입니다.
특히 개의 조상들이 지금의 늑대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는 점을 생각하면 더욱 그렇습니다. 다시 말해 인간이 개를 가축으로 길 들이고 공존하기 시작한 시점이 곧 개와 늑대가 유전적으로 갈라지기 시작한 시점일 수 있다는 겁니다. 실제로 개와 늑대, 코요테는 같은 과에 속하는 동물인 만큼 넓게 보면 같은 동물이라고 불러도 손색이 없습니다. 동물을 분류하는 기준이 존재론의 측면에서 말하면 유전적 기준만 있는 것도 아닐 테고요.
멀리 갈 것도 없이 현생 인류와 인류의 조상이 유전적으로 얼마나 가까웠는지, 반대로 어떤 차이로 인해 지금처럼 갈라져 결국은 호모 사피엔스만 살아남게 됐는지 생각해보면 개와 늑대의 분화에도 적잖은 시사점을 얻을 수 있습니다. 생물학자들이 찾아낸 증거를 보면 인간과 네안데르탈인은 유전적으로 크게 다르지 않았고, 어느 단계까지 꽤 활발히 교잡했으며, 우리의 유전자 가운데 네안데르탈인의 유전자가 남아있는 이유도 그 때문입니다.
반면에 진화인류학자들은 유럽과 유라시아 대륙의 구석기 시대 유적에서 발굴한 네안데르탈인의 유골을 분석해 네안데르탈인과 현생 인류는 어디가 어떻게 달랐다고 지적하기도 합니다. 심지어 현생 인류는 개의 조상들을 가축으로 길들여 부린 반면 네안데르탈인은 그러지 못해서 빙하기를 견뎌내지 못했다는 연구도 있었습니다.
늑대와 개를 분류하는 문제와 씨름하다 보면 어떤 차이에 의미를 부여하느냐에 관한 분류학의 고전적인 문제에 직면합니다. 늑대와 개를 사실상 같은 동물로 볼지, 아니면 현생 인류와 네안데르탈인처럼 명백히 다른 종으로 볼지부터 결정해야 합니다. 이 문제는 사실 과학적으로 정답과 오답이 명백히 나뉘지 않는 난제입니다. 같은 동물로 볼 수도 있고, 다른 종으로 볼 수도 있는 상황이기 때문이죠.
그래서 우리는 일종의 개념적 프레임을 가지고 문제에 접근해야 합니다. 그런 개념적 프레임 가운데 하나가 생물기호학(biosemiotics)으로, 생물기호학은 어떤 생물을 관찰할 때 유전적으로 중요한 특징이나 생물학적 징표에 가중치를 두어 해석하는 방법입니다. 엄격한 자연과학적 방법론이라기보다는 생물학과 철학, 혹은 생물학과 문화적인 해석을 두루 포섭하는 학제간 연구방법이기도 합니다.
생물기호학은 생태계에 존재하는 다양한 흔적의 기원을 찾고 의미를 밝혀내는 데 유용합니다. 특히 다양한 개체들의 상호작용을 통해 그 의미가 어떻게 받아들여지는지도 생물기호학이 다루는 영역이죠. 눈 위에 찍힌 발자국을 보면 사람은 어떤 동물이 어느 방향으로 언제 걸어갔는지 유추합니다. 개들은 눈에 보이는 발자국보다 냄새를 맡아가며 상황을 유추하겠지만, 사람은 냄새를 맡아서는 상황을 재구성하기 어렵죠.
보이는 게 다가 아니라 사람도 다른 감각을 동원할 때도 있지만, 종에 따라 주로 쓰는 감각이 다른 건 분명한 사실입니다. 어쨌든 여기서 이야기하려 하는 개념은 바로 주변 환경을 뜻하는 ‘움벨트(umwelt)’라는 개념입니다. 생물은 주변 환경과도 끊임없이 상호작용하며 개체의 특징을 만들어가고 발달합니다. 개에게는 후각을 통해 모은 정보가 주변 환경을 분석하는 데 훨씬 중요하고 정확합니다. 반대로 사람은 시각 정보가 가장 큰 역할을 하죠.
사람은 계통 발생(phylogenetic) 측면에서나 개체 발생(ontogeny) 측면에서나 상당히 독특한 종인데, 두 가지 모두 특정 동물종이나 개체의 차이를 구분하는 데 중요한 기준으로 삼을 수 있습니다. 개 이야기로 다시 돌아와 보면 지금 인간의 반려견으로 지구상에 번성하고 있는 개들은 처음 갯과 동물에서 인간에게 길든 가축으로, 그리고 다시 육종을 거쳐 선별된 개들로 계통이 세분화됐습니다. 종의 기본적인 특징도 자연히 바뀌었죠.
늑대를 비롯한 야생의 갯과 동물의 특징 가운데 여전히 오늘날 우리의 반려견에게도 남아있는 것들이 있습니다. 잘 알다시피 개들은 고도로 발달한 후각으로 주변 환경을 파악하고, 기본적으로 육식을 하며, 대단히 사회적인 동물입니다. 갯과 동물의 사회성을 인간이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지 가끔 의심쩍을 때도 있는데, 대표적으로 우리가 ‘외로운 늑대’라는 표현을 쓸 때가 그렇습니다. 사실 무리지어 생활하는 늑대는 무척 사회성이 강한 동물입니다. 우리 조상들이 개를 가축으로 길들이며 이들의 사회성을 보고 배워 인류가 사회성을 길렀다고 주장하는 생태학자가 있을 정도입니다.
인간이 개라는 종에 적응하며 공존하는 방법을 익히고 적응한 것처럼 개도 인간과 공존하는 법을 익혔습니다. 공동 진화의 관점에서 보면 사회성이 뛰어난 동물인 개가 다른 종 가운데 가장 친근하고 서로 의지하는 인간을 반려종의 대상으로 선택했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반려견들은 늑대처럼 끊임없이 냄새를 맡으며 주변 환경을 탐색하지만, 음식을 얻는 방법이나 공존하는 대상을 골라 환경에 적응한 방법은 야생에 있는 늑대와 매우 달라졌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이제 늑대와 개는 완전히 다른 종이라 할 수 있습니다.
다만 이런 차이를 절대적인 것으로 간주하는 것은 개와 늑대의 특징을 종합적으로 이해하는 데 크게 도움 되지 않습니다. 한 개체는 진화의 산물이기도 하지만, 자라난 환경의 영향도 있다는 게 중요하기 때문이죠. 개체를 종으로 섣불리 치환하는 우를 범해서는 안 됩니다. 생물기호학도 개체별로 나타나는 특정 행동이 아니라 진화 과정에서 어느 종에 뿌리내린 특징의 종합적인 차이를 읽어내는 데 유용하게 쓰일 수 있습니다. 그중 하나가 개는 인간과 친밀한 관계를 발전시켜온 반면 늑대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는 점이 되겠죠.
개의 입장에서 볼 때 이렇게 진화한 것이 반드시 득이 되었는지도 사실 토론해볼 만한 주제일 겁니다. 어쨌든 저는 그런 과정을 거쳐 제 인생에 등장한 유니라는 개체와 친밀한 관계를 맺고 록키산맥의 자연을 함께 거닐며 감정을 나눌 수 있게 돼 기쁩니다. 대체로 목줄을 하지 않고 자연을 뛰노는 유니와 제 앞에 굶주린 늑대 무리가 나타날 걱정은 오늘도 크게 하지는 않습니다.
원문: 뉴스페퍼민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