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
영화 〈로얄 테넌바움〉을 보신 분 계신가요?
휠라의 이듬해 커뮤니케이션 방향을 논의하는 회의였다. 휠라 코리아가 클라이언트였던 2013년이었다. 영화 〈로얄 테넌바움〉 이야기를 꺼냈다. ‘미장센의 거장’ 웨스 앤더슨 감독의 2002년도 작품이었다. ‘스타일의 교과서’라 불릴 만큼 독보적인 ‘룩’들로 가득한 영화였다.
기네스 펠트로는 라코스테 원피스 위에 퍼코트를 걸쳤다. 벤 스틸러는 새빨간 아디다스 삼선 트레이닝 복을 입었다. 그리고, 루크 윌슨은 휠라였다. 휠라의 줄무늬 피케 셔츠에 헤어밴드를 더했다. 새로 나온 신상 휠라 제품이 아니었다. 전설적인 테니스 스타 비에른 보리가 코트에서 착용하던 ‘클래식한’ 휠라였다.
비에른 보리가 누구던가. 볼보(자동차), 아바(팝가수)와 더불어 1970년대 ‘스웨덴의 대표적인 수출품’으로 꼽히던 남자, 휠라의 초창기 광고모델로 활약했던 사나이 아니던가. 비에른 보리의 아이코닉(Iconic)한 휠라 룩이 로얄 테넌바움에서 부활했다. 30여 년의 세월이 흘렀어도 촌스럽지 않았다. 도리어 더욱 트렌디하게 느껴졌다. 그날 회의에서 말했다.
휠라가 가야 할 방향이 이 영화에 담겨 있다고 생각합니다. 휠라의 클래식한 유산을 현대적으로 해석해서 보여주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나의 의견은 제안서 끄트머리에 조그마하게 실렸다. 몇 년 후, 휠라 코리아의 입사 면접장에 앉아 있었다. 조금 전 복도에서 보았던 이미지를 소환했다.
휠라의 잠재력은 본사 복도에 놓인 저 이미지들이 말해준다고 믿습니다. 비에른 보리의 테니스 셔츠, 그랜트 힐의 농구화, 알베르토 톰보의 스키 점퍼… 휠라에 입사하게 된다면 휠라의 역사 아카이브를 활용해서 마케팅을 해보고 싶습니다. 성공시킬 자신이 있습니다.
면접보다 신앙고백에 가까운 시간이었다. 나 같은 ‘휠라 신도’가 채용되지 않을 리 없다고 확신했다. 보기 좋게 낙방했다. 전화를 걸어 이유를 물었으나 답을 듣지 못했다. 휠라와의 인연은 여기까지라고 생각했다.
또 몇 년의 세월이 흘렀다. 거짓말 같은 소식이 들렸다. 고샤 루브친스키와 휠라가 협업했단다. 들리는 말로는 고샤가 먼저 나서서 휠라에 제안했다. 고샤는 휠라의 ‘클래식’에 꽂혔다. 그만의 색을 덧칠했다. 휠라의 저 유명한 빅사이즈 로고와 구소련의 감성이 충돌했다. 익숙하면서도 생경한 ‘쥐겨주는’ 휠라가 탄생했다.
이때가 휠라의 터닝포인트였다. 비욘세, 리아나, 켄달 제너, 에이셉 라키 같은 스타들이 휠라를 입기 시작했다. 한동안 갈피를 잡지 못하던 휠라도 변신에 돌입했다. 과거의 유산에서 가능성을 찾기 시작했다. 브랜드의 레트로한 매력을 뽐냈다. 내가 예전에 회의실에서, 면접장에서 상상했던 휠라의 모습이 눈 앞에 펼쳐지고 있었다.
심지어 휠라는 클래식을 활용하는 데서 그치지 않았다. 제품의 가격을 파격적으로 낮추었다, 백화점을 떠나 ABC마트 같은 편집숍에 입점했다. 듣도 보도 못한 ‘희한한’ 협업으로 밀레니얼 세대의 관심을 사로잡았다. 휠라가 다시 뜬다는 말이 여기저기서 들렸다.
휠라의 오랜 신도는 믿음의 행동을 취했다. 가진 돈을 털어서 휠라 코리아의 주식을 샀다. 주변 사람들에게도 휠라 주식을 ‘전파’했다. 날이 갈수록, 거리에서 휠라 로고를 발견하는 일이 수월해졌다. 휠라를 판매하는 매장마다 요사이 휠라 때문에 난리라고 했다. 휠라의 매출은 급격한 상승곡선을 그렸다. 주가는 사상 최대치를 경신했다. 마침내, 휠라는 부활했다. 휠라 신도의 믿음은 열매를 맺었다.
휠라의 탄생
휠라의 시작은 미약했다. 1911년, 모직물로 유명한 이탈리아 비엘라에 터를 잡았다. 휠라 3형제의 가내수공업으로 출발했다. 첫째는 숙녀복과 양복지, 둘째는 니트를 비롯한 스포츠용품, 셋째는 패션 액세서리 제품을 만들었다. 친척들과 친구들이 일을 도왔다.
휠라가 한 단계 도약한 건 1972년이었다. 스포츠카로 유명한 자동차 기업 ‘피아트’가 휠라를 인수했다. 피아트가 보기에 휠라는 알프스산맥 인근에서 놀만 한 브랜드가 아니었다. ‘이탈리아의 자존심’으로 성장할 수 있는 브랜드였다. 휠라의 새로운 로고에 자신들의 의지를 담았다. 파랑은 차가운 포도주를, 빨강은 뜨거운 태양을 상징했다. 휠라 로고는 전 세계를 물들이기 시작했다.
휠라의 전략은 고급화였다. 휠라 특유의 깨끗한 이미지를 가지고 ‘이탈리아산 명품 브랜드’로 포지셔닝했다. 소비자에게도 ‘럭셔리하게’ 다가섰다. 테니스나 스키처럼 ‘비싼’ 스포츠 종목의 선수들을 모델로 기용했다. 대표적인 인물이 비에른 보리였다.
결국, 휠라가 파는 건 옷이 아니라 ‘꿈’이었다. 이탈리아산 ‘로망’이었다. 부담스러운 가격대임에도 무섭게 팔려나갔다. 미국과 유럽의 부유층 사이에서 ‘클래식 스포츠웨어’로 자리매김했다. 대한민국의 고위 공무원, 의사, 변호사들도 해외여행을 갈 적에 F자 로고가 새겨진 티셔츠를 사 들고 왔다.
휠라는 대한민국에도 진출했다. 휠라 코리아 법인이 세워졌다. 초대 대표는 윤윤수라는 남자였다. 미국에서 신발 세일즈로 잔뼈가 굵은 남자였다. 20여년 뒤에 휠라 그룹의 주인이 될 남자였다.
윤윤수
지각인생이었다. 서울대 의대에 진학하려 삼수를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한국 외대에 입학해서는 컨닝이 발각되어 1년 정학처분까지 받았다. 사회생활을 시작한 나이가 서른이었다. 친구들 사이에서 그는 ‘꺼진 불’로 통했다.
JC페니 입사가 인생의 전환점이었다. 세일즈맨으로서의 재능이 만개했다. 카투사에서 3년동안 갈고 닦은 영어실력이 든든한 무기였다. 삼성전자 전자레인지의 첫 미국 수출도 그가 성사시켰다. 1970년대에 이뤄낸 680억원짜리 딜이었다. 이후 신발업체 화승의 수출 담당 이사로 스카우트됐다. 그룹 내 최연소 임원이었다. 늦깎이 사원에서 출발해 이사 직함을 얻기까지 8년이 걸렸다. 친구들 사이에서는 ‘꺼진 불도 다시 봐야 한다’는 말이 돌았다.
미국 출장 중에 휠라를 처음 접했다. 본능적으로 이 브랜드의 잠재력을 직감했다. 미국 내 휠라 라이선스를 가진 호머 알티스라는 남자를 찾아가 제안했다. 내가 한국에서 휠라 운동화를 만들어 올 테니 미국에서 같이 팔아보시겠습니까. “Made in Korea” 마크를 단 휠라 운동화가 그렇게 세상에 나왔다.
그의 말마따나 ‘고구마 구워 놓은 것처럼 못생긴’ 운동화는 미국에서 대히트를 쳤다. 특히나 흑인들이 휠라의 ‘어글리 슈즈’에 열광했다. 휠라의 운동화 부문 매출은 곧 의류 부문의 매출을 추월했다. 휠라는 나이키, 리복과 더불어 미국 내 3대 스포츠 브랜드로 우뚝 섰다. 그즈음 이탈리아의 휠라 본사에서 윤윤수를 호출했다. 당신이 대한민국에 휠라 코리아를 설립해주었으면 합니다. 1991년이었다.
휠라 코리아
한국에 진출한 첫해부터 휠라 돌풍을 일으켰다. 휠라 매장에 입장하려는 고객들을 줄 세워야 할 정도였다. 휠라 코리아는 세계에서 가장 돈을 잘 버는 법인이 되었다. 휠라의 엔리코 프레시 회장이 “휠라가 태어난 곳은 이탈리아지만, 휠라를 꽃피운 곳은 한국”이라고 극찬할 정도였다.
휠라 코리아가 성장하면서 윤윤수 대표에게도 파격적인 대우가 따랐다. 설립 첫해에 5억 원이던 그의 연봉은 1992년 8억 원, 1993년 10억 원, 1994년 12억 원, 1995년 14억 원으로 상승했다. 1996년에는 무려 18억 원의 연봉을 받았다. 당시 은행장들의 연봉이 1억 원이던 시절이었다.
‘샐러리맨의 신화’ ‘돈 버는 마술사’라는 별명이 그를 따라다녔다. 그가 집필한 『내가 연봉 18억을 받는 이유』라는 도발적인(?) 제목의 책도 베스트셀러에 올랐다. 그럼에도, 그는 여전히 배가 고팠다.
새우가 고래를 삼키다
전례가 없는 ‘사건’이었다. 2007년, 휠라 코리아는 휠라의 글로벌 본사를 전격 인수했다. 당시 휠라 그룹은 연 6,000만 달러의 적자를 낼 정도로 심각한 경영난에 빠져 있었다. 윤윤수 대표는 휠라의 구원투수가 되기로 마음을 먹었다. 일생일대의 승부수를 띄웠다.
4억 5,000만 달러에 달하는 인수자금을 조달해야 했다. 여태껏 그만한 돈을 쌓아두었을 리 없었다. 윤윤수 대표는 ‘희한한’ 아이디어를 냈다.
휠라의 상표권 라이선스를 각국의 휠라 법인에게 할인가에 넘기자. 대신 로열티를 선납으로 받자.
휠라 브라질, 휠라 저팬 등의 법인을 찾아가 부단히 설득했다. 가까스로 인수자금이 모였다. 그렇게 ‘이탈리아의 자존심’ 휠라를 품었다. 그의 표현대로 ‘대한민국 역사상 조공을 받는 첫 번째 사례’였다.
휠라다움
2011년부터가 고비였다. 휠라의 실적이 계속 감소했다. 2016년에는 영업이익이 마이너스로 돌아섰다. 악화한 실적보다도 심각한 것은 따로 있었다. ‘휠라다움’의 상실이었다. 언제부턴가 휠라는 시류에 편승한 제품만 출시했다.
‘토닝화’가 유행했을 때는 미세 전류가 흐른다는 ‘이온 토닝화’를 내놨다. ‘맨발 보행’이 주목받자 발가락 모양의 ‘스켈레토즈화’를 출시했다. 아웃도어 열풍이 불었을 때는 ‘트레킹화’를 내놓았다. 결과적으로, 어느 것 하나 휠라스럽지 않았다. 모두 휠라 브랜드에 독이 되는 제품들이었다. 휠라는 아재들만 찾는 ‘올드한’ 브랜드가 되어 있었다.
2015년을 브랜드 리뉴얼의 원년으로 삼았다. 잃어버린 20~30대를 붙잡는 것이 급선무였다. 브랜드 이름만 빼고 다 바꾸기로 했다. 휠라의 변화를 이끌 선장은 외부에서 수혈했다. 유명 디자이너 정구호가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영입되었다. 정구호는 휠라 브랜드의 지향점부터 분명히 정했다. 헤리티지였다. 휠라가 100년동안 쌓아온 찬란한 유산이었다. 다른 브랜드들이 흉내 낼 수 없는 독보적인 경쟁우위였다.
헤리티지를 시대에 맞게 응용한 제품을 선보였다. 매장 인테리어도 전부 바꿨다. 마케팅 비용도 대대적으로 지출했다. 이제, 휠라가 성장하기만 하면 ‘해피엔딩’이 될 터였다. 결과는 예상 밖이었다. ‘달라진’ 휠라는 팔리지 않았다. 20~30대는 여전히 휠라에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40~50대 충성고객들은 이탈했다. 정구호 발(發) 마법은 없었다. 휠라는 정구호와의 계약을 연장하지 않았다. 새드엔딩이었다.
역지사지
‘헤리티지’를 맹신했다. 과거의 휠라를 최신 트랜드에 맞게 변주하면 쉽게 소비자의 지지를 얻을 거라 생각했다. 장기하가 만든 노래 제목 그대로였다.
그건 니 생각이고
헤리티지는 분명 휠라의 강점이었다. 헤리티지를 쥐고 흔들어야 한다는 것도 ‘이론적으로는’ 맞았다. 딱 거기까지였다. 소비자는 이론만으로 움직이지 않았다. 휠라의 변신을 ‘체감’할 수 있는 그 이상이 필요했다. 타깃으로 삼은 ‘밀레니얼 세대’를 다시 들여다보았다. 이들이 어떠한 부류인지, 어떤 생각을 하며 사는지 알고자 했다. 그들 입장에 서보려 했다.
결국 역지사지였다. 아집에서 벗어나 상대방이 진짜 원하는 것을 발견하는 것이었다. 2016년 하반기부터 역지사지의 결과물들을 내놓았다. 휠라의 옛 디자인을 복각(復刻)한 제품이었다. 헤리티지 제품이라는 점은 1년 전과 동일했다. 그러나 타깃의 니즈를 철저히 반영했다는 점에서 이전과 달랐다. 이 차이가 휠라의 부활을 이끌었다.
가격을 역지사지하다
밀레니얼 세대는 10~30대였다. 가격에 예민할 수밖에 없는 연령대였다. 휠라는 이들이 부담 없이 소화할 수 있는 가격대까지 내려보기로 했다. 프리미엄 브랜드로서 쉽지 않은 결단이었다.
생산단가를 낮출 수 있는 새로운 협력업체를 찾아 나섰다. 중국 푸젠성 진장 지역에는 ‘휠라 글로벌 소싱센터’를 지었다. 그 결과, ‘코트 디럭스’ ‘디스럽터2’ ‘바리케이드XT97’ 같은 휠라의 어글리 슈즈들을 무려 ‘6만 9,000원’에 출시할 수 있었다. 경쟁 브랜드가 내놓은 비슷한 사양의 운동화들은 대부분 10~20만 원 대였다. 휠라는 가성비 갑 운동화의 대명사로 떠올랐다.
그제서야 밀레니얼 세대가 반응했다. 휠라의 운동화 대부분이 밀리언셀러 타이틀을 달았다. 휠라의 디스럽터2는 출시된 후 1년 반 동안 전 세계에서 1,000만 켤레 이상 팔렸다.
유통채널을 역지사지하다
과거에는 백화점, 대리점 같은 소매점 판매를 고집했다. 중 장년층이 타깃일 때는 그 전략이 맞았다. 밀레니얼 세대에게는 통하지 않는 방식이었다. 이들은 백화점에서 쇼핑하지 않았다. ABC마트 같은 편집숍에서 옷과 신발을 구입했다.
휠라는 기존의 유통망을 개편했다. 홀세일본부를 신설해 도매 유통 채널을 개척했다. 백화점에 대한 의존도를 낮추고 ABC마트, 폴더, 슈마커 등 10~20대가 많이 찾는 편집숍 위주로 제품을 공급했다. 무신사 같은 온라인 채널도 적극적으로 공략했다. 40~50대 고객의 이탈은 감수했다.
휠라 제품을 찾는 고객들이 늘어날수록 편집샵에서 더 좋은 부스를 배정받았다. 공간도 점점 넓어졌다. 나이키, 아디다스와 견주어도 손색이 없는 스폿이었다. 휠라 브랜드의 홍보가 저절로 이루어졌다. 판매가 또 다른 판매를 부르는 선순환이었다. 역시나, 물고기를 잡기 위해선 물고기가 모여있는 바다로 가는 것이 맞았다. 산에 머물러 있을 것이 아니라.
협업으로 역지사지하다
가야금 연주자 고(故) 황병기 선생은 옛 것이 굳어졌다면 그것은 ‘전통’이라기보다 ‘골동품’이라고 했다. 휠라의 헤리티지도 그 자체로는 골동품이었다. 헤리티지가 ‘메인 반찬’이라면, 브랜드가 새롭게 보일 수 있는 ‘색다른 반찬’도 있어야 했다.
협업만 한 카드가 없었다. 그것도 뻔하지 않은, 의외의 상대와의 협업이라야 시너지가 날 터였다. 메로나, 펩시, 베네피트, 포켓몬, 츄파춥스 같은 엉뚱한 브랜드를 협업 상대로 골랐다. 신의 한 수였다. 이들과의 터무니없는(?) 협업은 SNS에서 꼬리에 꼬리를 물고 퍼져나갔다.
우왁굳과의 협업은 그 절정이었다. 유명 게임 방송 BJ와 신발 브랜드의 ‘이상한’ 그러나 ‘참신한’ 만남이었다. 결과는 대성공. 우왁굳과 두 차례의 협업을 진행하면서 완판은 기본이었다. 휠라는 밤샘 노숙까지 해야지만 살 수 있는 브랜드의 반열에 올랐다.
러시아 출신의 디자이너 ‘고샤 루브친스키’, 일본의 패션 브랜드 ‘Have a good time’, 칼 라거펠트가 이끄는 ‘펜디’와의 협업은 패션 브랜드로서 휠라의 격을 높여주었다. 이제 휠라는 ‘협업의 장인’이라고 불린다. 과거와 현재를 자유자재로 넘나드는 브랜드다. 골동품이 될 새가 없다.
클래식이 새로움이 되려면
혹자는 지난 몇 년 동안 불어 닥친 레트로 열풍이 휠라를 살렸다고 간단히 평한다. 반만 맞는 이야기다. 레트로 트렌드는 분명 휠라에 날개를 달아주었지만 부활을 위한 충분조건은 아니었다. 리복, 푸마, 엘레세, 카파처럼 유구한 역사를 가진 브랜드들을 보면 알 수 있다. 이들 중 그 어떤 브랜드도 휠라에 비견될만한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으니까.
휠라의 헤리티지는 출발점이었다. 고객의 입장에 서서 역지사지하는 데까지 나아가야 했다. 휠라의 유산을 상대방이 체감할 수 있게끔 만드는 것이 관건이었다. 이를 위해 휠라는 가격을 낮추고, 유통채널을 개편하고, 협업으로 새로움을 주었다. 휠라 스스로 옳다고 생각하는 방식이 아니라, 밀레니얼 세대들이 진짜로 원하는 것을 주었다.
그제서야 휠라의 클래식이 새로움으로 받아들여졌다. 휠라는 이 역지사지의 비밀을 깨닫기까지 상당히 오랜 시간을 돌아왔다. 그 비밀을 아는 브랜드는 지금도 많지 않다.
원문: 브랜드보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