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딕 포스베리는 전설이 되었다
1968년, 멕시코 올림픽 높이뛰기 결승전이었다. 모든 이가 ‘옆으로’ 점프할 때, 혼자서만 바를 등지고 ‘누워서’ 뛰었다. 무명의 신인선수가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그것도 세계 신기록으로.
이후 높이뛰기 선수들이라면 누구나 포스베리를 따라 했다. 포스베리의 도약법은 그의 이름을 딴 ‘포스베리 플롭(배면뛰기)’이라 명명되었다. 그날 포스베리는 상식을 깼다. 새로운 상식이 되었다.
상식
사람들이 당연하다고 믿는 것이 상식(常識)이다. 모두가 의심 없이 받들고 있는 기준이다. 차별화는 ‘상식’을 깨는 데서 출발한다. IT 기업의 이름이 ‘Apple’이 되고, 보드카 병이 예술가들의 캔버스가 된 것처럼.
돈키호테는 상식 파괴의 아이콘이다. 일본의 오프라인 할인점이다. 일본 관광 시 필수코스로 꼽힌다. X마트가 2018년에 선보인 ‘삐에로쑈핑’이 대놓고 베낀 곳이기도 하다. 그럴 만하다. 돈키호테는 1989년 창업한 이래 한 번도 매출이 줄어든 적이 없는 브랜드니까. 500여 개의 매장에서 나오는 연 매출이 8조 원을 넘으니까. 일본의 장기불황기에 오히려 3,600배 성장했으니까.
지금의 돈키호테를 만든 비결은 하나다. 업계의 플레이어들과 거꾸로 행동했다. 상식을 깼다. 유통업계의 포스베리였다. 이제는 모두가 돈키호테의 방식을 따라 한다. 돈키호테는 상식이 되었다.
시작
남자는 개천에서 난 용이었다. 시골 촌뜨기가 도쿄의 명문 사립 게이오 대학에 입학했다. 부잣집 도련님들로 가득 찬 곳이었다. 촌놈은 외톨이가 되었다. 여자친구를 태우고 스포츠카를 모는 ‘게이오 보이’들을 볼 때마다 속에서 불이 났다. 남에게 지기 싫어하는 마음이 터무니없을 정도로 강한 남자였다.
평범한 회사원이 된다면 영원히 저 녀석들을 이길 수 없을 거야.
번지르르한 회사 대신 작은 부동산 회사에 입사했다. 굳이 대학을 나오지 않아도 들어갈 수 있는 곳이었다. 빠르게 실력을 키워 독립하겠다는 복안이었다. 입사 10개월 만에 1차 석유파동이 터졌다. 회사는 망했다. 청년의 패기는 꺾였다. 마작에 빠졌다. 노름판을 전전했다. 세월을 낭비했다. 정신을 차려보니 서른이었다. 앞으로 사람 구실을 하며 살 수 있을까. 할 줄 아는 것이 없었다. 기술도 없었다.
그때 눈에 띈 게 할인점이었다. 당시에 유행하던 업태였다. 할인점 계산대에 앉아있는 저 무뚝뚝한 사장님들보다는 내가 낫겠다. 더 잘 팔 수 있겠다. 딱 그 정도였다. 유통업에 대한 경험도 전무했다. 대신 행동이 민첩했다. 필사적으로 모은 자금 800만 엔(8,000만 원)을 털었다. 열여덟 평의 가게를 임대했다. ‘도둑시장’이라는 간판을 달았다.
도둑시장
정말 훔쳐 온 물건을 팔아서 가게 이름이 도둑시장인 거예요?
고객들은 자주 물었다. 의도한 바였다. 한 번 들으면 절대 잊을 수 없는 이름이어야 했다. 영세한 할인점에 고상한 이름은 사치였다. 다이에, 이토요카도 같은 대형체인점과 경쟁해야 했다. 뭐라도 튀어야 했다. 이름에서부터 시작했다.
‘도둑시장’이라는 이름에 딱 들어맞는 가게였다. 어디서 훔쳐 온 듯한 ‘사연 있는 물건’들로 가득했다. 기업들로부터 흠집 난 상품, 반품된 물건, 샘플 등을 헐값에 넘겨받았다. 기업의 장부상에는 재고 목록에서 제외된 아이템들이었다. 볼펜이나 일회용 라이터 따위를 10엔, 20엔에 내놓았다. 손님들의 입에서 나지막한 탄성이 흘러나왔다.
도둑시장은 ‘이상한 할인점’으로 소문이 났다. 지역의 명물로 자리 잡았다. 돈이 벌렸다. 두 번째 매장을 준비했다. 새로운 네이밍을 고심했다. 다시 한번 유통업계의 권위와 상식을 타파하리라. 결의를 담고 싶었다. 눈에 확 띄는 이름이어야 하는 건 불변의 진리였다. 스페인의 문호 세르반테스의 소설 속 주인공의 이름을 떠올렸다. 돈키호테였다.
아마추어
애초에 유통업계를 경험한 적이 없었다. 완벽한 아마추어였다. 수많은 시행착오는 통과의례였다. 아마추어가 좋은 점도 있었다. 업에 대한 고정관념에서 자유로웠다. 선발기업의 규칙으로 싸우지 않았다.
대신 고객을 보았다. 그들이 필요해하고, 원하는 것에만 집중했다. 돈키호테만의 독보적인 서비스를 제공했다. 돈키호테의 팬들이 늘어갔다. 훗날 돈키호테의 창업자 야스다 다카오는 이렇게 고백했다.
만약 내가 기존의 유통업체에서 일하다가 그 경험을 바탕으로 소매업을 시작했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생각만 해도 아찔하다.
무식해서 용감했다. 어마추어였기에 상식을 깰 수 있었다. 지금까지 돈키호테가 타파해온 굵직한 상식들을 소개한다.
심야시장
- 상식: 쇼핑은 낮에 한다
- 돈키호테: 쇼핑은 밤에도 할 수 있다, 오히려 더 신난다
1980년대, 일본의 상점들은 저녁에 문을 닫았다. 돈키호테는 정오까지 영업을 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밤에도 쇼핑하고 싶어하는 사람이 많다. 특히 젊은 층이 그랬다. ‘밤 시장’은 블루오션이었다. 이때는 손님들의 마음이 한결 여유로워졌다. ‘혹시 안 나올지도 모르는 볼펜 한 개 10엔’처럼 별거 아닌 POP 광고에도 빵 터졌다. 깐깐한 낮 시간 쇼핑과 달랐다.
돈키호테는 이후 20년 동안 일본의 밤 문화(?)를 이끌었다. 지금도 돈키호테는 밤에 더 사람이 몰린다. 매출이 가장 높은 황금 시간대는 저녁 8시부터 밤 12시까지다. 24시간 동안 영업을 하는 돈키호테 지점도 여러 곳이다.
압축진열 & POP
- 상식: 보기 좋게, 집기 편하게, 사기 쉽게
- 돈키호테: 완벽하게 정돈된 곳에 쇼핑의 즐거움이 있으랴
돈키호테에는 없는 물건이 없다. 과자, 맥주 같은 먹을 것에서부터 명품의류까지. 심지어 성인용품도 판다. 그런데 오만 가지 제품을 파는 매장이 생각보다 협소하다. 면적은 종합슈퍼마켓의 10분의 1 수준. 물류 창고도 없다. 모든 상품은 점포 안에 진열된다. 돈키호테의 트레이드마크 ‘압축진열’이다. 한 평당 100가지 이상의 품목이 꽉꽉 채워진다. 매장은 정글이 된다. 탐험의 시작이다. 득템을 노리는 고객들의 심장이 두근거린다.
돈키호테는 휘황찬란하다. POP는 홍수를 이룬다. 직원들이 쓴 펜글씨와 어설픈 그림이 매장을 두른다. 단지 튀려고 하는 행동이 아니다. 필요의 산물이다. 압축진열을 위해서는 물건을 거칠게 쌓아두어야 한다. 고객 입장에서 어떤 제품인지를 파악하기가 쉽지 않다. 그렇다고 설명표만 프린트해서 붙이는 건 드라이하다. 전혀 돈키호테스럽지 않다.
여기서 POP가 나선다. 제품 정보를 센스 있게 전달한다. ‘많이 팔릴수록 돈키호테는 적자’ ‘원가보다 싸기 때문에 종업원은 구입 불가!’ 매장 분위기를 띄워주는 효과는 덤이다. 고객들은 낄낄대며 돈키호테의 매력에 빠진다. 이제 POP가 없는 돈키호테는 상상이 되지 않는다.
경제학 교과서는 말한다. 소매 점포의 철칙은 ‘보기 좋게, 집기 편하게, 사기 쉽게’다. 돈키호테는 거꾸로 간다. 뒤죽박죽처럼 보이는 압축진열과 POP를 고수한다. 점포를 운영하는 입장에서는 굉장히 까다롭고 성가신 방법이다. 효율적인 관리가 애초에 불가능하다. 도난 발생으로 인한 로스율도 높다.
그러나 돈키호테는 이 모든 단점을 감수한다. 압축진열과 POP가 ‘재미없고’ ‘뻔한’ 경쟁사들과 구분해주니까. 고객들의 쇼핑의 재미를 배가시켜주는 장치들이니까. 돈키호테에게는 이것이 더 중요하다.
프렌차이즈와 거꾸로
- 상식: 본사의 방침을 각 지점에 전달한다
- 돈키호테: 주권은 현장에 있다
그날 밤 맥도날드 형제가 설명한 시스템은 너무나 단순하면서도 효율적이었다. 나는 그들의 사업에 홀딱 반하고 말았다.
- 로켓 CEO, 레이 크록
맥도날드 성공 신화의 주역 레이 크록의 증언이다. 1954년, 그가 맥도날드 레스토랑을 처음 방문한 날이었다. 주문한 햄버거가 30초도 되지 않아 나왔다. 맛에는 중독성이 있었다. 손님들이 끊임없이 밀려들었다. 그날 밤 레이 크록은 잠을 이루지 못했다.
비결은 맥도널드 형제가 만든 ‘스피드 시스템’이었다. 포드 자동차의 ‘어셈블리 라인’을 모방했다. 자동차를 제조하는 것처럼 햄버거를 만드는 모든 공정을 분업화했다. 이걸 본 레이 크록의 머리가 번쩍였다. 각각의 단계를 그대로 따르기만 한다면 누구든 환상적인 햄버거를 만들 수 있겠다.
행동으로 옮겼다. 맥도날드 프랜차이즈의 탄생이다. 맥도날드 매장은 빛의 속도로 퍼져나갔다. 현재 맥도날드는 전 세계 3만 5,000개 매장을 운영한다. 매일 6,800만 명의 손님이 방문한다.
프랜차이즈는 현대 소매업의 왕도라 불린다. 표준화와 효율화가 핵심이다. 모든 정보와 권한이 본사에 집중된다. 본사는 시스템과 방침을 설계한다. 각 점포는 본사의 매뉴얼에 따라 움직인다. 관리가 쉽다. 따르기도 편하다. 단점도 확실하다. 각 매장의 개성을 찾아볼 수 없다. 홍콩의 맥도날드와 서울의 맥도날드는 별 차이가 없다. 뻔하고 재미없다. 쉽게 질린다.
훗날 돈키호테는 맥도날드 같은 ‘본사 주도형’ 프랜차이즈에 반기를 들었다. 모든 권한을 현장에 일임했다. 상품 구매에서부터 가격 설정, 매장 구성까지 주권을 현장에 주었다. 매장의 담당자는 전적인 권한을 갖는다. 스스로 프랜차이즈의 본사가 된다.
처음부터 이러려고 했던 것은 아니다. 직원들을 ‘교육’시키는데 한계가 있었다. “대형 업체를 흉내 내지 맙시다.” “개성 있는 매장을 만듭니다.” 야스다 다카오 회장이 아무리 외쳐도 직원들은 움직이지 않았다. 창업자의 이상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 혼자 날뛰는 꼴이었다.
생각을 고쳐먹었다. 가르치지 말자. 직원들이 스스로 하게끔 만들자. 전권을 주었다. 구매에서 진열, 가격 책정, 판매까지 ‘하고 싶은 대로 하라’고 위임했다. 그때부터 직원들이 변했다.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했다. 일은 게임이 되었다. 스스로의 한계를 시험했다.
지금도 돈키호테 점장이 받는 급여의 50%는 성과급이다. 심지어 아르바이트생도 월급의 10%는 성과급으로 가져간다. 모두가 자발적으로 움직인다. 돈키호테 매장에는 유연한 공기가 흐른다. 에너지가 흘러넘친다. 돈키호테 성공의 동력이 된다.
에티튜드
투자를 잘하기 위해 로켓 과학자가 될 필요는 없다.
사람들이 공포감에 빠져 있을 때 욕심을 부려라. 사람들이 탐욕을 부릴 때에는 공포를 느껴라.
‘오마하의 현인’ 워런 버핏의 말이다. 투자의 원리는 간단하다. 좋은 기업의 주식을 발견한다. 쌀 때 산다. 비쌀 때 판다. 끝. 어렵지 않다. 제대로 따르는 이는 드물다. 대부분 시장이 흔들리면 주식을 처분한다. 상승장에서는 욕심을 낸다. 실제 가치보다 비싼 가격을 주고 주식을 산다. 결국 손해를 본다. 주식으로 재미를 봤다는 이는 언제나 소수다.
거꾸로 행동해야 한다. 차별화가 중요하다. 그것이 주식이든, 사업이든. 말은 쉽다. 막상 행동하려면 어렵다. 대세를 거스르는 건 누구에게나 힘겨운 일이니까.
결국, 필요한 건 ‘에티튜드’가 아닐까. ‘도둑시장’ ‘돈키호테’와 같은 터무니없는 이름을 지은 것. 남들이 영업을 마무리하는 저녁에 홀로 가게 문을 연 것. 매장을 정글처럼 만든 것. 프랜차이즈의 룰을 따르지 않은 것. 돈키호테는 이 모든 일을 물 흐르듯이 이루어냈다. 마치 몸에 밴 행동인 양. 무조건 남들과 다르게 행동하겠다는 에티튜드를 가지고 있었기에 그랬다.
사업을 잘하기 위해서 로켓 과학자가 될 필요는 없었다. 남다른 에티튜드 하나면 충분했다. 돈키호테가 증명했다. 돈키호테는 이름값을 했다.
원문: 브랜드보이의 브런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