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토록 많은 상사가 단순함을 원함에도 그런 결과를 제대로 갖다줄 수 있는 부하 직원은 거의 없다. 오히려 그들은 긴 파워포인트 프레젠테이션으로 상사에게 인상을 줄 수 있다고 오해한다.
- 아담 브라이언트(Adam Bryant)
돈 내고 쓰는 학교의 글쓰기 vs. 돈 받고 쓰는 직장의 글쓰기
저희 아버지는 스마트폰은 그럭저럭 사용하시지만, 컴퓨터와는 영 친숙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저에게 대신 정보 검색을 시키시는 경우가 종종 있지요. 아버지에게는 어려운 일이지만 저는 10–20분이면 할 수 있는 일이라 대부분 기꺼이 찾아드립니다. 하지만 제가 절대 해드리지 않는 일이 있습니다.
이번에 우리 부부동반 모임에서 해외여행을 가려고 하는데, 어디가 좋을지 한번 찾아볼래?
이번 명절에 1박 2일 정도 여행 갈 곳이 어디가 있을까?
오, 이런 질문을 받는 많은 효자 효녀분들. 재빨리 도망치세요! 결코, 부모님을 만족시킬 수 없을 분더러, 몇 번의 삽질 이후로 부모님께 화를 내는 자신을 발견할 겁니다. 해외여행과 1박 2일 여행에 선택지는 너무나, 정말 너무나 많으니까요. 저는 이 경우에 살짝 미소 지으며 대답합니다.
일단 모임 분들끼리 상의하셔서 가고 싶은 나라와 날짜를 정하시면 그때 제가 좋은 상품들을 종류별로 찾아드릴게요.
물론 나라가 정해진 후에도 상품은 수백 가지가 있지만, 부모님들은 대부분 패키지여행 신봉자시고, 선호하시는 여행사는 2–3곳입니다. 그중 가격과 포함 혜택을 상세하게 적은 10개 후보군을 드리면 됩니다. 한 페이지 요약본을 만드는 건 필수죠. 그 뒤에는 여행사가 열심히 만들어 놓은 상품 설명서를 인쇄해서 붙이면 됩니다. 저는 약 두 시간 정도의 노력을 통해 ‘역시 키워놓은 보람이 있는’ 딸내미로 등극합니다.
회사의 일, 특히 글쓰기도 이런 식입니다. 정보가 없는 게 문제가 아니라 그 많은 정보 중에 무엇을 써야 할지 도저히 감이 안 와서 문제죠. 컴퓨터 화면의 커서가 깜빡이는 걸 바라보면서 한숨을 쉬다 보면 어느새 시간은 쑥쑥 지나가고 팀장님이 얘기한 데드라인이 가까워 옵니다.
이걸 선택하면 다른 것이 빠졌다고 한 소리 들을 것 같고, 다 쓰려니 엄두가 안 납니다. 썼다 지웠다, 썼다 지우기를 반복하면서 2페이지를 끙끙대며 채우느라 야근하는 자신을 보면 자괴감이 들게 마련이죠. 분명히 대학교 때는 20페이지 리포트도 거뜬하게 썼는데 도대체 왜 이러는 걸까요?
게다가 간신히 작성해서 가면 상사는 첫 줄부터 마지막 줄까지 빼곡하게 지적합니다. 이걸 세 번쯤 반복하다 보면 세상에서 가장 무능한 사람이 된 듯한 생각이 들어요. 학기 말 수십 페이지 리포트를 몇 개씩 쓰던 사람이 회사에 들어가면 글쓰기가 퇴보하는 걸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학교에서의 글쓰기와 직장의 글쓰기는 강조점이 완전히 다르므로 연습하고 적응하는 데 시간이 걸리는 것뿐입니다. 학생 때는 ‘내가 얼마나 알고 내 생각이 얼마나 논리적인지 어필하는 게 관건’이었다고 하면 이제는 중심축이 바뀝니다. 상대방으로요.
그러니 간단한 현황 보고서 또는 기획서를 가지고 머리를 쥐어뜯는 분들, 안심하세요. 잦은 회식 술자리 때문에 머리가 나빠진 것도(약간의 영향은 있습니다), 나이가 들어서 센스가 떨어진 것도 아닙니다. 아직 상대방(The counterpart) 중심으로 쓰는 게 익숙하지 않아서 그래요. 기존에 비싼 돈을 내면서 제출한 글쓰기와 돈을 받으며 쓰는 글쓰기가 다른 건 당연하잖아요?
월급은 최저임금 수준, 2018년 최저시급을 적용해 월 157만 3,770원을 받는다고 가정하면, 하루를 꼬박 써서 작성한 문서의 가격은 7만 8,688원입니다. 일주일 내내 작성한 기획서라면 39만 원의 가치가 있어야겠네요. 이 글을 읽으시는 많은 분은 최저임금보다 더 많이 받는 직장인이시겠지요. 지금 일주일 동안 쓰신 그 보고서는 대략 60만 원짜리입니다. 갑자기 이 종이 쪼가리의 무게감이 느껴지지 않으시나요.
왜 쓰는지 처음부터 알고 시작합시다: 정보, 설득, 메시지
정보의 홍수 속에서 단순하게 글을 쓰려면 왜 쓰는지 처음부터 알고 써야 덜 고생스럽습니다. 『기획서 마스터』라는 책을 보면 문서의 사대천왕으로 기획서, 계획서, 제안서, 보고서를 나누었는데 체계적인 좋은 구분이라고 생각합니다. 회사마다 부르는 용어가 다르므로 저는 좀 더 일상 용어로 나누어보겠습니다.
글의 목적에 따라 회사의 글쓰기는 세 가지로 구분됩니다. 정보 설득, 메시지 전달로요.
첫 번째인 정보전달 목적은 난이도가 가장 쉬우며 많이 쓰는 형태입니다. 대부분의 현황 보고서가 여기에 해당합니다. 두 번째 설득을 위한 글쓰기는 기획서/제안서/계획서 등이 해당합니다. 첫 번째 글쓰기가 ‘현재의 상태’에 초점을 맞춘다면 설득의 글쓰기는 ‘미래의 행동’에 초점을 맞춥니다.
문제점을 발견하는 분석력과 뻔하지 않은 해결책을 제시하는 감각이 중요합니다. 마지막으로 메시지의 글쓰기는 연설문, 보도·홍보 자료, 강연 등이 해당합니다. 다수를 대상으로 하므로 핵심 키워드와 스토리를 엮어내는 능력이 중요합니다. 문장력을 기준으로 하면 가장 고난도입니다.
목적에 맞춰 쓰지 않으면 일이 복잡해집니다. 만약에 팀장이 ‘이번 달 임직원의 교육 프로그램 수료 현황’을 가져오라고 했다고 생각해봐요. 특별한 이유가 없는 한 아마도 목표 수료율 대비 현재 어느 정도까지 진척이 되었는지, 작년과 비교했을 때 문제가 없는 건지, 관리가 필요할 만큼 수료율이 떨어지는 사람들은 누구인지 정도가 궁금할 겁니다(정보의 글쓰기 필요).
그런데 의욕에 불타는 직원이 교육 프로그램 현황은 10% 정도로 간략히 언급하고, 회사 교육 연수의 장단점을 분석하고 향후 방향을 제안한 기획서(설득의 글쓰기)를 들고 오면 어떻게 될까요? 자그마치 일주일을 고민한 끝에 말이에요. 노력은 가상하지만, 비싼 돈을 들여 일주일 동안 예쁜 쓰레기를 만든 셈입니다. 심지어 팀장이 가장 궁금해 있는 분야는 내용이 부족한 판이라 다시 시켜야 합니다.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회사의 모바일 유통 전략(설득의 글쓰기)을 짜오라고 했는데 우리나라 및 해외 현황 조사, 강점과 약점, 분포 현황만 100페이지 써오면 그건 현황 파악 보고서(정보의 글쓰기)지 기획서나 제안서)가 아닙니다. 설득의 글쓰기는 상대방의 미래 행동을 바꾸는 게 초점인데 중계만 해서는, 또는 상대방의 이득이 아닌 자기 얘기만 해서는 아무 행동도 일어나지 않아요.
Case 1. 정부에 건의자료를 들고 찾아간 최 대리
“(보고서를 다 읽고 나서) 그래서 제가 무엇을 하면 되죠?”
“제가 이렇게 자세히 현실을 말씀드렸지 않습니까! 어떻게 해야 하는지는 저보다 더 잘 아실 것 아닌가요?”
“… 모르겠는데요.”
Case 2. 잠재 거래처의 구매 팀장에게 찾아간 송 팀장
“(보고서를 다 읽고 나서) 그래서 왜 제가 그 회사와 계약해야 하죠?”
“네? 지금까지 저희 회사의 훌륭한 점을 이렇게나 많이 말씀드렸지 않습니까?”
“아… 아뇨, 정말 좋은 회사인 것 같군요. 그런데… 왜 제가 그 회사와 계약해야 하죠?”
제안사항을 가지고 정부와 국회, 클라이언트를 찾아오는 많은 사람은 이런 대화를 몇 번이고 반복합니다. 상대방을 설득하러 와서 정보(현재 상황, 자기 얘기)만 잔뜩 적은 보고서를 내미는 거죠. 듣는 사람은 이렇게 생각하죠.
그래, 중요하다는 건 이제 알겠어. 그래서 뭘 해달라는 거지?
그래, 좋다는 건 이제 알겠어. 그래서 그게 왜 내게 도움이 된다는 거지?
하지만 한 시간이 지나도 그런 내용은 나오지 않아요. 놀랍게도 많은 사람이 이런 식의 보고서를 내밀고, 아무것도 얻지 못한 채 빈손으로 떠나갑니다.
원문: 박소연의 브런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