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병의 음료가 손에 들어오기까지 얼마나 많은 일이 있었는지 모른다
음료를 마시는 일만큼 즐거운 것. 그것은 음료를 사는 과정이다. 추운 겨울 자판기에서 뽑아 마시는 밀크커피라든지, 엄마의 친구가 매일 아침 가져다주던 형형색색의 즙이라든지, 구멍가게에 음료를 사러 갔다가 문이 닫혀 30분 동안 갇힌 일이라든지(…)
같은 음료를 마셔도 어디에서 샀는가에 따라 느낌이 다른 것은 이런 추억이 녹아있기 때문이다. 심지어 시대마다 우리가 음료를 구하는 방법도 변화해왔다. 오늘 마시즘은 시대별 음료 배달(유통)에 대한 이야기다. 우리는 어떻게 음료를 만나왔을까?
동네슈퍼의 시대: 에누리 없는 장사가 어디 있어 (~1980년대)
영화 ‘국제시장’에 나오는 잡화점은 음료를 판매하는 고전적인 공간이다. 보통 7평 이하의 소매점을 우리는 구멍가게, 슈퍼마켓(‘켙’으로 끝나면 고인물), 점빵, 상회 등 다양한 이름으로 부른다. 에디터가 들어갔다가 갇힌 곳도 이런 동네슈퍼였다. 워낙 존재감이 없어서 주인아주머니가 문을 잠그고 퇴근해버렸다. 맙소사 내가 과자집에 갇히다니!
동네슈퍼에는 ‘병 음료’가 메인스트림이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아직 캔이나 PET병이 만들어지기 전이니까. 공병을 여러 병 모아 가면 1병을 주는 ‘쿠폰제도’ 비슷한 역할도 했다. 그렇다. 단순한 형태의 유통이지만 그 안에 여러 제도가 있었다.
동네슈퍼에 음료의 종류나 형태의 다양성은 없어도 ‘에누리(에누리는 순우리말입니다)’는 가득했다. ‘에누리 없는 장사가 어딨어’란 말처럼 에누리는 동네슈퍼의 상징과도 같은 단어였다. 재미있는 것은 에누리가 판매자 입장에서는 ‘웃돈’을 말하고, 구매자에게는 ‘할인’이라고 해석된다는 것. 가격표를 무시하고 주인과 벌이는 치열한 신경전이나, 집주소를 담보로 벌이는 외상 시스템 등이 가능한 시대였다.
자판기의 시대: 음료계의 알파고 탄생 (1980~1990년대)
자판기(자동판매기)의 탄생은 오늘날 전기차 못지않은 충격이었다. ‘사람이 없는데 음료가 나오다니!’ 특히 일본의 60년대는 자판기 왕국이라고 불릴 정도로 자판기가 성행했다. 한국 역시 80년대부터 알음알음 퍼져 90년대에는 호황을 이루게 된다.
한국에서는 1977년 롯데가 일본 샤프사에서 사 온 20대의 자판기가 최초로 알려졌다. 당시 신문에는 ‘유통구조를 바꿀 혁신적인 기계’에서 ‘동전 인식을 과연 할 수 있을까’라는 우려가 공존했다. 맞는 말이기도 한 게 어릴 때 동전에 실을 끼우거나, 장난감 동전을 넣어도 봤으니까.
음료 자판기는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커피 자판기와 청량음료 자판기다. 커피 자판기는 한국 음료사에서 다방과 뜨거운 대결을 펼친 녀석이다. 커피계의 알파고 같은 이 녀석은 가격도 가격이지만, 접근성과 정확성에서 압도적인 스펙을 보여줬다.
청량음료 자판기는 ‘캔 음료’라는 장르를 만든 일등 공신이다. 미국에서도 청량음료가 캔에 들어간 것은 1964년(로얄 크라운 콜라) 때의 일이다. 한국에서 알루미늄 캔에 음료가 들어가는 것은 1980년대가 되어서야 진행되었는데, 주로 냉장 시스템을 갖춘 자판기에 들어갔다.
‘자판기에 왜 캔 음료가 들어갔을까?’ 굉장히 오래 궁금했는데 답은 간단했다. 공간 활용도가 가장 뛰어났기 때문이다. 거기에 내구성과 시각적으로 용량이 많아 보이는 효과도 있었다. 자판기 내부구조를 보면 음료를 벽돌처럼 하나하나를 쌓아두는 구조다. 캔이 아닌 병이었다면 버튼을 누르자마자 와장창 소리가 났겠지?
방문판매의 시대: 국민물병과 건강즙의 탄생 (1990~2000년대)
방문판매. 줄여서 ‘방판’은 한국 유통사의 특이점 중 하나다. 역(사)덕후라면 구한말 ‘보부상’ 이야기를 꺼낼 수 있다. 하지만 일단 1964년 ‘아모레퍼시픽’을 방판의 시작이라고 본다. 판매되는 제품들은 주로 화장품과 건강 관련 식품이었다. 일찍이 이 방판 시스템을 이용해 성장한 음료회사는 ‘야쿠르트’이기도 하다. 열일하는 어머니들의 노력이 지금의 기업들을 만들었다.
음료에서 방문판매가 꽃을 피운 시기는 1990년대다. 가정마다 경제력이 생기자마자 건강을 챙기기 시작했으니까. 지난 「아침 음료의 역사」에서도 말했지만 아침마다 믹서기로 녹즙 가는 소리 때문에 일어나야 했다. 믹서기가 여간 귀찮은 게 아니라는 깨달음을 얻고 나서는 완제품을 아침마다 받아 마셨다.
보통 가내수공업 내지는 자영업 수준의 녹즙시장은 1990년대 중반 풀무원녹즙이 생기고 거대해진다. 식품회사가 중간 유통을 통하지 않고 방문판매로 녹즙을 바로 보내니 ‘신선함’이라는 키워드를 잡게 되었다. 풀무원이라는 이름도 대장장이가 쇠 녹일 때 쓰는 도구 이름인데 유기농 식물 같은 뜻을 생각하는 사람이 더 많다. 제품의 특성도 그렇지만 방문판매의 덕분이 아니었을까?
손님맞이용 주스들도 방판의 시대에 호황을 이룬다. 특히 ‘국민물병’으로 추억되는 델몬트 유리병이 방문판매를 통해 널리 퍼졌다. 델몬트 유리병이 사라진 이유에 대해서 ‘떨어질 때 부상 때문에 그렇다’, ‘회수율이 낮아서 그렇다’ 등 말이 많지만 ‘방문판매의 시대’가 지났기 때문인 것이 크다. 마트에서 델몬트 유리병을 사서 들고 오기에는 너무 무겁잖아.
마트의 시대: IMF와 가성비의 콜라보 (1996~2017년)
우리가 가장 잘 아는 시대다. 한국 최초의 마트는 1993년에 생긴 ‘이마트’지만 보통 1996년 본격적으로 유통시장이 개방된 시기를 대형마트의 시작이라고 본다. 이마트와 홈플러스, 탑마트 등 대기업 자본으로 만들어진 마트들은 개인 자본으로 만들어진 동네슈퍼를 밀어낸다. 그리고 그 모든 경제를 1997년 IMF가 밀어낸다.
마트와 IMF의 불편한 동거에서 ‘가성비’의 시대가 태어난다. 여러 음료 회사들이 움츠러들고 망했던 음료계의 암흑기. 이때 선전한 음료가 빙그레의 ‘바나나맛 우유’다. 1974년생으로 여전히 변함없는 맛에 단지 모양이었던 이 음료는 ‘4개 묶음 멀티팩’으로 소비자의 지갑을 열었다. 1999년 300억 남짓인 매출이 2001년에는 650억 원까지 성장했다.
이후 마트의 음료 전략도 비슷하다. ‘묶음’으로 할인하는 것. 때문에 유리병(a.k.a 델몬트) 같은 무거운 재질보다는 가벼운 PET병이 환영받는다. 우리가 잘 아는 ‘만 원에 4캔’이라는 수입 맥주 전략도 다양성과 가성비를 갖춘 대형마트 전략의 연장선이었다.
그리고 이 거대한 마트는 작은 편의점 형식으로 분화되어 ‘편의점의 시대’를 열었다. 할인된 가격, 1+1의 묶음 판매, 가까운 거리에 24시간 영업이라는 다양한 기술은 가성비 시대의 끝판왕이라는 생각을 들게 만들었다. 2018년 최저임금 인상으로 수많은 편돌이 편순이 편의점 점장님이 사라지기 전까지는.
구독의 시대: 취향에 따라 음료를 받는다 (2015~)
유행은 돌고 도는 법. 방문판매가 돌아왔다. 다만 ‘구독(Subscription)’이라는 이름으로 바뀌었을 뿐이다. 마트와 편의점의 유통 열차에 타지 못하는 스타트업들이 일을 냈다. 2015년 ‘마켓컬리’의 새벽 배송(샛별배송)이 대표적이다. 빠른 배송과 신선한 식품, 그리고 더 신선한 브랜딩은 창업 당시 30억 매출의 마켓컬리를 지난해 1,571억 원을 기록하게 만들었다. 로또 몇 장을 1등에 당첨시켜야 나올 수 있는 금액인 걸까?
음료시장 역시 매장에서 구매하는 것에서 ‘발품’을 줄여주는 쪽으로 변화하고 있다. 수제맥주를 한 달에 2번 보내주는 ‘벨루가 브루어리’같은 스타트업도 있다. 기존 방문판매를 가진 조직들은 시스템을 고도화하고 있다. 야쿠르트의 경우는 보다 쉽게 주문을 해서 받을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들었고 ‘야쿠르트 아줌마’의 명칭을 ‘프레시 매니저’로 변경했다. 유통기한이 짧은 녹즙류를 파는 풀무원녹즙은 내부 배송시스템의 과정을 줄이고 신선도를 최적화 하는데 중점을 두고 있다. 녹즙 1병만 시켜도 원하는 배송지로 전달이 가능하다고 한다.
구독의 시대가 빛나는 것은 기존에 보기 힘든 ‘희귀한’ 음료, 혹은 유통기한이 적은 ‘신선도 위주의 음료’들을 쉽게 만나볼 수 있다는 것이다. 용량이나 포장 역시 자유로워서 ‘구독’이라는 말처럼 받아보는 재미도 있다. 만약 소비자들의 취향이 쌓이고 음료 구독 시스템이 발전한다면 주문할 필요 없이 음료가 오는 시대도 상상해볼 수 있다. 잠깐 이거 영화 〈마이너리티 리포트〉 내용 표절인데.
음료가 우리의 손에 들어오기까지
‘어떤 음료를 마실까?’라고 고민하는 순간부터 우리는 음료를 경험한다. 사람마다 음료를 마시는 때와 구매하는 곳이 다르듯이. 음료에는 일상의 어떤 맥락과 개인의 취향이 깊게 반영되어있다. 우리는 과연 어떤 시대의 음료 구매법 안에서 살고 있는 것일까. 또 다가오는 미래에는 어떤 방식으로 음료를 만나게 될까?
원문: 마시즘
참고
- 다가오는 유통혁명, 매일경제, 1978.07.05
- 1조원 산업의 매력, 1978.07.05
- 롯데칠성 캔포장 청량음료 본격생산, 매일경제, 1979.06.04
- 깡통용 사이다 콜라 개발, 매일경제, 1979.6.22
- 코피자동판매기 국내서 인기얻자 삼성, 롯데 등서 깡통 병 판매기 개발에 열, 경향신문, 1979.04.24
- 한양식품 캔 청량음료공장 준공, 매일경제, 1980.05.24
- 청량음료업계 성수기 맞아 판매활동 강화, 매일경제, 1980.4.19
- 자판기시장 불꽃 각축, 1992.7.11, 매일경제
- 36억 PE병으로 대체, 매일경제, 1993.2.8
- 신세계 이마트 개점, 동아일보, 1993.11.13
- 녹즙 풀무원도 시장참여, 경향신문, 1995.06,01
- 유통업계 대형할인점 돌풍, 경향신문, 1996.1.22
- 친근한 포장용기로 소비자만족 바나나우유(빙그레), 매일경제, 1998.7.15
- 가정배달 식품시장 꿈틀, 연합뉴스, 1999.1.15
- 튀는 전략 일등상품, 빙그레 ‘바나나맛 우유’, 조정애, 한국경제, 2002.4.16
- 생활 속 수학이야기 캔음료가 원기둥 모양인 이유, 임영주, 경향신문, 2008.2.18
- 건강을 미리 배달시키는 ‘건강전도사’, 이주현, 아시아경제, 2016..5
- 야쿠르트 아줌마 48년 만에 프레시 매니저로 이름 변경, 이재은, 조선비즈, 2019.3.7
- 마켓컬리 폭풍성장 4년 만에 매출 54배, 문수정, 국민일보, 2019.4.18
- 잠들기 전 주문, 새벽배송 유통패러다임 바꾼다, 김성원, 파이낸셜뉴스, 2019.4.19
- 2019 배달혁명, 김지은 박현구, 우먼센스, 2019.4.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