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의 존재 이유
국가는 무엇이며 왜 존재하는가? 경제학자가 국가에 대해 뭘 알겠느냐고 반문할지 모르나 경제학에서 국가만큼 중요한 ‘비경제적’ 행위자도 없다. 주류경제학은 그것을 쳐부숴야 할 원수로 보지만 ‘제도경제학’에 국가는 소중한 친구다. 원수든 친구든 어떻게 바라보든지 간에 모두에게 국가는 주요 관심 대상이 된다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경제학자들도 나름대로 국가의 존재 이유를 말해왔다. 유감스럽게도 경제학자들이 국가론을 연결하는 데 익숙하지 않지만, 실제로는 많은 경제학자가 국가의 존재를 암묵적으로 인정하고 있다. 예컨대, 경제학자들은 특정 재화의 ‘속성’(attribute)에서 국가의 필요성을 도출해낸다.
공공재 이론
공공재이론이 이에 해당한다. 가로등, 공원처럼 비배제성과 비경합성이라는 독특한 속성을 갖는 재화는 시장이 공급에 실패하는 재화다. 가로등에 대한 사회적 수요는 매우 크지만, 기업은 가격으로 특정인의 사용을 배제할 수 없다. 곧 가로등 사용에 대해 가격을 매길 수가 없다.
관리할 수 없거나 관리 비용이 너무 크기 때문이다. 모든 작은 골목에 계산원을 두다간 엄청난 비용을 감당하지 않을 수 없고, 큰 도로나 큰 골목에만 계산원을 두면 요리조리 피해 무임승차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를 비배제성(non-excludability)이라고 부른다.
이런 경우도 있다. 철수와 영이 앞에 빵 하나가 놓여 있다. 철수가 빵을 먹으면 영이는 더 이상 먹을 수 없다. 이때 두 사람은 빵의 이용을 두고 서로 경합을 벌이게 된다. 하지만 가로등의 경우는 다르다. 철수가 가로등의 불빛을 이용한다고 영이가 이용할 수 없는 건 아니다. 영이로 인해 가로등 불빛이 추가로 마모되지 않기 때문이다.
가로등을 앞에 두고 서로 경합할 필요가 없다. 그러니 가로등 이용을 위해 아무도 가격을 내지 않으려 한다. 앞의 비배제성과 달리 이를 비경합성(non-rivalry)이라고 부른다. 가격을 매길 수도 없고, 돈을 내려고 하지도 않으니 기업은 이윤은커녕 본전도 못 건진다. 그 때문에 시장은 그 재화의 공급을 중단하게 된다. 이를 ‘시장의 실패’라고 부른다. 곧, 시장은 이런 재화를 공급하는데 실패했다는 것이다.
시장이 공급하지 못하면 누가 공급해야 하나? 가로등은 만민에게 필요하다. 누군가는 이 ‘사회적 수요’에 응해야 하는데, 국가 말고는 대안이 없다. 결국, 공공재(public good)를 공급하기 위해 국가가 필요하다. 주류경제학의 공공재이론인데, 나는 이를 ‘경제적’ 공공재론이라고 부른다. 이 이론에 따르면 ‘특정 재화의 속성’이 국가의 존재를 필요로 한다.
많은 사람들, 곧 진보든 보수든 가리지 않고 이 이론을 절대적 진리로 받아들이고 있지만 국가의 존재를 설명할 때, 그건 절반의 진실만 말해 줄 뿐이다. 왜 그런가? 바로 이런 문제가 발생하기 때문이다.
곧, 기업에게 이윤이 발생하지 않아 기업이 이런 재화를 공급하지 않는다고 했는데, 반대로 이윤이 충분히 발생할 땐 어떻게 할 것인가? 다시 말해 누군가 높은 가격을 지급함으로써 이윤이 발생하면, 그 재화는 ‘시장’에 맡겨져야 하는가?
그렇지 않다. 가로등은 만인에게 필요하다. 가격을 치를 수 있는 부자는 물론 가격을 지급할 경제적 능력이 없는 가난한 자들에게 말이다. 경제적 계산 결과와 관계없이 그것은 그 자체로 공공재다. 이윤이 없기 때문에 국가가 공급하고, 이윤이 남기 때문에 시장이 공급해야 할 재화가 아니라, 어떤 경우에도 국가가 공급해야 할 재화다!
논리적 산물로서의 국가
공공재는 비배제성과 비경합성의 속성이 아니라 인권, 기본권, 안전 등 ‘사회적이고 도덕적인 욕구’를 충족해 주는 속성 때문에 국가가 공급한다. 이때 공공재는 공공의 이익과 공공선에 이바지한다.
전기, 수도, 의료, 치안, 국방은 공공선을 구현하기 위한 대표적 공공재다. 결국, 정확한 의미의 공공재란 공익과 공공선을 달성하기 위해 정부가 제공하는 재화다. 이건 ‘비경제적’ 공공재론으로서 주류경제학의 경제적 공공재론과는 다르다.
비경제적 공공재론에서 케인스경제학과 진화적 제도경제학 등 비주류경제학은 ‘비경제적’ 국가론을 제안한다. 곧, 국가는 경제적 계산과 경제적 동기가 아니라 사회적 연대, 문화적 결속 등 인간집단의 기본조건을 마련하는 동시에 인권, 정의 등 보편적 가치를 도모하기 위해 존재한다. 공공재는 이런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포기될 수 없는 필연적 수단이다.
많은 진보주의자들이 이런 주류경제학의 공공재이론에 따라 국가의 존재이유를 설명해왔다. SNS와 대중매체에 이런 공공재론에 포박된 많은 진보주의 경제평론가들이 너무 많다. 심지어 강론까지하고 다닌다! 그게 우리나라 경제학의 현주소다.
맑스말곤 진보경제학을 재대로 공부해 본 적이 없고 그럴 의지도 없던 사람들이다. 그들은 결국 조중동에서도 쉽게 얻어낼 수 있는, 익숙한(!) 신고전주의로 투항할 수밖에 없다! 이제 이 낙후된 이론을 벗어날 때가 되었다. ‘제도경제학의 비경제적 공공재이론’으로 빨리 옷을 갈아입어야 한다.
이 ‘비경제적 공공재이론’이 주류경제학의 경제적 공공재이론보다 국가의 존재이유를 더 명확히 설명해 준다는 점은 이론의 여지가 없다. 하지만, 이 역시 진보적 경제학의 국가이론으로선 여전히 미흡하다. 좀 더 보충되어야 한다. 뭐가 보충되어야 할까? 비경제적 공공재론의 국가론에는 국가를 설립한 주체, 곧 ‘행위자’가 없다. 이 이론에서 국가는 ‘논리적’ 산물일 뿐이다.
재화의 속성이나 사회생활에 대한 기본조건과 보편적 가치로부터 국가를 도출하는 사람들과 달리, 적지 않은 학자들이 ‘인간의 본성’에서 국가를 논리적으로 도출한다. 먼저, 인간의 이기적 속성은 만인에 의한 만인의 투쟁으로 이어진다. 이 때문에 이를 통제할 국가가 필요하다. 특정 전제로부터 논리적 방법에 따라 국가를 도출하는 점은 위와 같지만, 이 경우 재화의 속성이 아니라 ‘인간’의 속성이 실마리를 제공했다는 점이 다르다.
국가를 이해할 때, 객체보다 주체를 등장시키고, 물질보다 인간을 부각한 점은 이 접근방법의 미덕이다. 국가는 논리적 사유의 결과라기보다 ‘인간의 실천적 경험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국가는 소수 엘리트집단이 사유재산을 보호하기 위한 수단이라는 더글러스 노스 등 주류경제학의 국가론이 대표적이다.
마르크스의 생각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그에게 자본주의국가는 자본가계급이 노동자계급을 지배하는 수단이며, 자본가계급의 ‘위원회’일 뿐이다. 곧 기업의, 기업에 의한, 기업을 위한 ‘기업국가’다. 이때 이들이 주목한 주체와 인간은 엘리트와 자본가계급이다. 근대국가는 소수 엘리트와 자본가계급에 의해 건설됐다.
구체적 경험을 통해 확인하는 국가
하지만 근대국가의 발생과정을 실제로 들여다보면 그리 간단하지 않다. 이제, 추상적인 사유를 벗어나 구체적 경험을 통해 국가를 확인해 보자. 논리적 도출방식 대신 ‘역사적 실증방식’을 채택하는 것이다.
경제사학자 앤 데이비스(Ann E. Davis)는 11~13세기 이탈리아의 국가형성과정을 연구하였다. 그에 의하면 플로렌스(피렌체), 베니스(베네치아), 제노아(제노바) 등 도시국가를 방어하기 위해 군주는 먼저 상인 가문과 타협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나아가 세금을 징수할 때 길드조직과 논의해야 했으며, 시민들로 구성되는 민병대의 지원을 받지 않으면 안 됐다. 여기서 토론과 정치참여는 필수였다.
나아가 ‘시민 인문주의자’(civic-humanist)들은 시민적 덕성을 설파하며 교육했다. 공화주의 이념과 공익과 공동선의 도덕적 개념은 도시국가의 구성원으로부터 공동체 헌신에 대한 내적 동기를 불러 일으켰다. 이런 ‘시민적 문화’는 ‘보이지 않는 접착제’가 되어 공동체의 결속을 이루어내었다. 이 접착제가 없었더라면 5백년 후 애덤 스미스가 본 ‘보이지 않는 손’은 작동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처럼 엘리트는 물론 상인과 동업조합 등 경제적 주체, 일반 시민 더 나아가 지식인, 곧 각계각층의 사람들이 국가형성과정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것이다. 이 과정에서 ‘공공의 이익’과 ‘공동선’이라는 개념이 등장했다. 입법, 행정, 사법 등 공적체제는 이렇게 합의된 가치를 보장하기 위해 마련됐고, 이런 업무를 수행하기 위해 행정 관료, 치안인력, 그리고 법률가 등 ‘전문공무원’이 등장했다.
물론 지역마다 똑같은 과정으로 전개된 것은 아니다. 다른 지역에서는 한 집단이 폭력으로 다른 집단들을 제압함으로써 독재국가로 진화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기서도 피지배 집단의 동의 없이 지배체제는 유지될 수 없었다. 더 나아가 그것마저 장기간 허용되지 않았다. 근대사회에서 이런 일이 자주 일어났는데 영국 명예혁명, 프랑스 대혁명, 미국 시민혁명, 러시아 혁명은 대표 사례다. 그리하여 마침내 ‘근대국가’가 등장하였다.
근대국가는 이처럼 다양한 계급과 세력들이 이해관계와 시민적 덕성을 두고 투쟁하고 토론하는 과정에서 형성됐다. 11~13세기 이탈리아에서 군주와 엘리트만의 도시국가가 아니라 모든 시민들의 국가였듯이 18세기 이후 근대국가도 엘리트와 지배자의 국가가 아니라 모든 이들의 국가였다. 따라서 노동자만의 국가가 아닌 것처럼 기업가만의 국가도 아닌 것이다. 그것은 공공의 이익과 공공선을 향한 집단의지의 산물이다.
근대국가는 소수 엘리트나 기업의 국가가 아니라 모든 이들의 국가, 곧 ‘국민국가’다. 국가를 세운 자는 ‘국민’이요, 공익과 공동선을 이루어내기 위해 설립된 것이 국민국가다. 근대사회의 국민국가는 국민의 안위를 위해 존재한다. 그것은 다양한 공공재는 물론 공익과 공동선도 지켜나가야 한다.
우리는 어떤가? 나는 강점된 나라의 독립을 위해 기업들이 싸웠다는 얘기를 많이 들어보지 못했다. 오히려 박정희 등 한 줌의 엘리트와 적지 않은 수의 기업들은 독립된 나라를 열망하지 않았다. 3·1 운동의 민중 함성, 의병과 동학 농민군의 붉은 피, 그리고 만주벌판의 풍찬노숙 독립군, 이들에 군자금을 조달한 민족자본가! 실로 대한민국은 국민이 세운 국민국가다.
하지만 이들이 열망한 것은 ‘독립국가’만이 아니었다. 사장님들만을 위한 국가, 이윤이 생기면 공공재를 기업에 넘겨줘도 되는 국가, 각자도생해야 하는 국가가 아니라 공공재를 충분히 공급하는 국가, 정의와 공동선이 강물처럼 흐르는 국가, 그리하여 도탄에 빠진 민중과 위기에 처한 국민을 지켜주는 국가였다. 이게 이들이 바라던 나라요, 국가였다.
이명박 정부에 의해 ‘기업국가’로 타락하고 박근혜에 의해 ‘독재국가’로 개조될 위기에 처했던 이 위대한 국민국가가 문재인 정부 들어 그 본질을 되찾아 가고 있어 다행이다. 이번 강원도 산불재난은 제도경제학의 입장에서 볼 때 무엇이 국가이며, 왜 국가가 존재하는 지를 잘 보여준 사례에 속한다.
마치며
문재인 정부는 촛불시민들의 땀으로 등장한 나라라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 나라는 논리적 사유에 의해 ‘도출’되지 않고 참여와 투쟁, 곧 실천에 의해 ‘건설’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한다. 국가는 본래 논리적으로 도출되지 않았다. 그것은 각계각층 국민의 투쟁과 토론, 곧 정치적 참여를 통해 힘겹게 만들어진 역사적 산물이다. 그리고 기억하라, 대한민국의 국가는 기업국가가 아니라 국민국가이며, 이 국민국가를 위해 뜨겁게 흘렸던 선열들의 피와 눈물을! 그리고 촛불로 밝혔던 그 추웠던 겨울밤을.
원문: 한성안 교수의 경제학 광장
참고자료
- 『경제학 위의 오늘』(한성안, 2017, 왕의 서재) 중 ‘제도경제학의 국가론’
- ‘국민국가를 되찾자’(<한성안의 경제산책>, 한겨레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