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와 ‘시네마’
알폰소 쿠아론 감독의 아름다운 영화 <로마(Roma)>는 시네마(Cinema)라는 평가를 받습니다. 영화가 아니라 시네마. 시네마는 무엇을 의미할까요? 왜 <로마>는 영화가 아니라 굳이 시네마라는 평가를 받는 것일까요.
저는 시네마가 무엇인지 무 자르듯 명쾌하게 대답하지는 못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말해보면 어떨까요. 영화만이 할 수 있는 어떤 것. 영화라는 예술의 아이덴티티. 그 아이덴티티를 살려낸 소수의 영화가 시네마라고 말이죠. 시나 소설, 사진, 회화를 포함한 다른 어떤 예술 양식도 표현하지 못하지만 영화는 표현할 수 있는 어떤 것. 이것은 무엇일까요.
이견의 여지는 물론 있겠습니다만, 제 생각에 영화의 아이덴티티는 원근의 움직임입니다. <로마>의 인물들은 자주 원근으로 움직여요. 시네마(Cinema)는 움직임이라는 뜻의 그리스어 ‘Kinesis’에서 비롯된바, 아마도 그래서 <로마>가 시네마 인지도 모릅니다.
세상을 이루는 세 개의 축
우리는 3차원에 살고 있습니다. 3차원은 세 축으로 이루어져 있죠. 내가 서있는 곳에서 좌우로 멀어지는 가로축, 하늘로 멀어지는 세로축, 그리고 내 앞뒤로 저 멀리 깊어지는 원근축. 우리는 너비를 재고, 키를 재고, 거리를 잽니다. 세 축은 우리가 세상을 이해하는 도구라고 해도 될 것 같군요.
그런데 예술은 세상의 반영입니다. 그래서 사람이 만드는 예술은 이 세 가지 축에 반드시 속하게 됩니다. 고대 그리스 건축 양식을 보면 프리즈(Frieze)라는 것이 있는데, 아래 사진과 같습니다.
프리즈는 기둥 위 가로로 길게 장식된 부분을 말합니다. 현대에는 띠모양의 장식을 뜻하는 단어로 쓰이고 위의 사진과 같이 재해석되어 활용되기도 하죠. 역시 가로로 길게 장식됩니다. 대학교 때 미술사 수업을 들었습니다. 그때 교수님이 프리즈를 이렇게 설명하셨어요.
“프리즈를 보면 우리가 가로로 이야기를 풀어내는데 얼마나 익숙한지 깨닫게 됩니다. 이건 세상을 이해하는 가장 기본적인 시선이에요. 옛날엔 높은 빌딩들도 없었고 하늘을 날 수도 없었으니 사람들의 동선은 땅에 붙어 펼쳐지는 게 보통이었을 겁니다.
그 동선의 방향이 삶의 방향이고 이야기의 방향이 됩니다. 세로보다는 가로의 서사에 익숙했던 겁니다. 책을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넘기면서 보는 것도 일종의 프리즈 양식이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아하. 우리의 삶에 우리가 알지도 못했던 어떤 방향성이 존재한다는 재밌는 의견. 곧바로 저는 다양한 예술 양식들의 방향성을 생각해보았습니다. 과연 책은 가로로 읽는 게 익숙하죠.
과거엔 세로로 읽었던 적도 있었던 것 같지만 현대의 관점에선 대부분 책은 가로로 읽습니다. 더 정확히 말하면 책의 내용은 왼쪽 위에서 오른쪽 아래로 진행되죠. 소설은 좌상에서 우하로 진행하는 예술이라고 말해도 될 것 같습니다.
그래서일까요. 소설이라는 예술은 어떤 필연성으로 추락하거나 몰락하는 이야기입니다. 신형철 문학평론가는 세계에 맞서 기꺼이 몰락하기를 선택하는 인물 없이는 ‘소설적인 것’이 발생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소설은 상에서 하로 진행한다는 점에서 거대한 싱크홀을 향해 속수무책으로 추락하는 사람이거나, 좌에서 우로 진행한다는 점에서 정해진 종점을 향해 운명처럼 운행하는 기차입니다.
영화의 운동성
그렇다면 영화의 방향성은 어떨까요? 바로 여기서 원근의 축이 추가됩니다. 소설이 2차원이라면 영화는 3차원이죠. 가깝고 먼 방향성이 더해지는 것입니다. 기념비적인 영화로 여겨지는 뤼미에르 형제의 ‘라 시오타 역에서의 열차의 도착(L’Arrivée d’un train en gare de La Ciotat)’은 영화사에서 가장 초기에 만들어진 영화들 중 하나입니다.
상영시간이 50초 정도밖에 되지 않고, 멀리 있는 열차가 천천히 다가오다 멈추면 승객들이 하차하고 승차하는 것이 내용의 전부이지만, 이 영화는 분명히 원근의 움직임을 구현하고 있습니다.
사진이나 회화의 캔버스도 물론 원근을 표현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원근을 표현한 사진과 회화의 풍경은 고정되어 있는 반면, 영화의 인물과 사물은 원근으로 직접 움직이면서 운동성을 생생히 전달합니다. 운동성을 관객에게 전달할 수 있는 예술 양식은 영화가 대표적이죠.
물론 모든 동영상(Motion Picture)은 운동성을 전달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공간에서의 창의적인 움직임은 무성영화 시대에서부터 영화가 추구해오던 표현 양식입니다. 말하자면 운동성은 영화를 영화로서 존재하게 하는 가장 핵심적인 특징인 셈입니다. 시네마의 조건인 것이죠.
자, 그럼 <로마>가 시네마로 불리려면 그에 맞는 운동성이 있어야겠네요. 알폰소 쿠아론 감독의 전작들을 보신 분들이라면 그의 영화에서 카메라 움직임이 얼마나 역동적이고 또 창의적인지 아실 겁니다.
역시 이번에도 그렇습니다. <로마>는 자명한 시네마입니다. 영화를 보다 보면 어느 순간 느끼게 됩니다. 이 영화는 다른 영화들보다 원근의 폭이 깊고, 그 폭을 다채롭게 활용하고 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로마>에서 아름다운 장면들은 모두 원근의 폭이 깊은 장면들입니다. 멀리 있던 양 떼가 마치 튀어나올 듯이 화면 근거리로 가까워지거나, 화면 가까이 있던 인물이 저 멀리 출발하는 차에 올라타기 위해 화면 깊은 곳으로 달려가기도 합니다.
근거리에서 중심인물이 대화하고 움직이는 동안 원거리에 있는 사람들은 각자의 역사를 가지고 살아 움직입니다. 근거리와 원거리는 같은 하나의 세계로서 동시에 존재해요.
그렇기 때문에 <로마>를 본다는 것은 그때 그 시절의 넓은 공간을 경험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로마>는 알폰소 쿠아론 감독의 유년시절을 바탕으로 창작된 자전적 이야기이므로, 감독 자신의 옛 기억 속으로 관객을 불러들이는 것이 중요했습니다.
그래서 쿠아론 감독은 공간을 만들었습니다. 카메라는 그 공간을 누비며 근거리와 원거리를 인물이라는 바늘로 꿰맵니다. 그렇게 꿰매진 넓고 사려 깊은 공간에 관객을 초대합니다.
그러면 이렇게 이야기할 수도 있겠습니다. <로마>의 숨겨진 주인공은 당시 존재하던 공간 그 자체라고 말입니다. 실제로 알폰소 쿠아론 감독은 공간을 만드는데 적극적이었습니다.
알폰소 쿠아론 감독은 멕시코에 실제 존재하는 한 교차로(the intersection of Insurgentes and Baja California avenues)를 촬영하고자 했지만, 그곳에 방문해보니 역시나 예전 기억과는 너무나 달라져 있었습니다. 그래서 아예 교차로를 만들기로 합니다. 감독 기억 속의 예전 모습을 간직한 교차로를 말이죠.
알폰소 쿠아론 감독은 그의 프로덕션 디자이너인 유제니오 카발레로와 머리를 맞대고 70년대 초반의 멕시코 시티 모습을 복원하기 시작했습니다. <로마>의 제작팀은 콘크리트를 부어 도로를 만들고 건물을 세워 올리고 간판을 붙였습니다. 말 그대로 하나의 공간을 만든 셈입니다. 위의 장면은 유려한 동선과 그에 따른 압도적인 현장감을 전달합니다. 실제로 만든 공간이기 때문에 그럴 수 있었겠죠.
그런데 사실 이런 세 축으로 예술을 구분하는 방법은 지나치게 작위적입니다. 실제로 이렇게 구분되는 것도 아니고요. 세 축은 표현의 도구로서 활용될 뿐입니다.
예를 들어 제가 한국어도 하고 영어도 하고 불어도 한다고 했을 때, 저는 제 생각을 세 가지 각기 다른 방식으로 전달할 수 있는 셈입니다. 물론 많은 언어를 말할 수 있다는 것이 그 사람이 얼마나 유창한지를 결정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적어도 저는 다양한 언어적 도구를 손에 쥐고 있는 것이죠. 게다가 언어란 사고방식이기도 해서, 저는 세 가지 다른 회로로 사고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때때로 창의성은 다양한 사고의 가능성에서 비롯됩니다.
비로소, 시네마
영화도 마찬가지입니다. 영화 속 인물은 가로로, 세로로 움직일 수도 있고, 화면과 가까워지거나 멀어질 수도 있습니다. 세 방향으로 움직일 수 있는 다양한 표현의 가능성. 이건 영화라는 예술을 무한하게 만듭니다. 그리고 영화작가와 영화감독은 최대한의 창의성을 발휘해서 아름답고 생생한 동선을 만들어 낼 것입니다.
책이나 캔버스는 할 수 없습니다. 소설은 직선의 종착지로 독자를 몰아갈 것이고, 사진과 회화는 평면에 드러난 사건성으로 보는 이를 충격에 빠트리거나 깊은 생각에 잠기게 할 것입니다. 물론 그것들은 그것 나름의 예술성을 지닙니다. 그러나 종횡무진하는 운동성은 시네마라는 이름을 짊어진 영화만의 예술 표현 양식입니다.
그리고 <로마>는 바로 어떤 영화가 시네마가 되는지를 분명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의 감각을 뒤흔드는 움직임, 우리의 마음을 사로잡는 운동성을 보여주는 영화가 비로소 시네마가 됩니다. 영화의 정체성이 묻어나는 독창적인 예술이 되는 것입니다.
원문: Discus의 브런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