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의 탄생
나는 악의 탄생이란 다른게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자신이 가진 능력으로 감당할 수 없는 자리에 가는 것이다. 사실 누구나 칭찬을 듣고 싶어하지 욕을 먹고 싶어하지 않는다. 능력이 충분해서 정당하게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다면 악당이 될 이유가 없다. 그건 바보다. 쉽고 당당한 길이 있는데 뭐하러 위험한 길을 가서 숨기고 싶은 약점을 만드는가. 실력으로 백점맞을 수 있는데 컨닝페이퍼를 만드는 거나 마찬가지가 아닌가.
그런데도 악은 흔히 탄생한다. 그건 첫째로 우리의 욕심이 증가하기 때문이다. 아무리 대단한 능력을 가지고 있어도 우리의 욕심은 그보다 커질 수 있다. 그러다 보면 결국 욕심을 능력으로 채울 수 없는 지점이 온다. 그리고 악이 탄생하는 것이다.
본래는 아주 여유있고 좋은 사람으로 살 수 있었던 사람이 갑자기 결핍으로 가득 찬 불행한 사람이 되고 만다. 그리고 결국에는 지독한 악당이 되고 만다. 만악의 시작에는 결국 우리의 욕심이 있다.
그런데 이런 이유 말고 또다른 악의 탄생이 오늘날 아주 흔하게 일어나고 있다. 그것은 바로 세습이다. 부모는 자식에게 기대를 가진다. 그래서 가능하다면 부모 자신이 가진 능력으로 자식을 더 좋은 자리에 보내주고 싶어한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타고난 재능은 부모가 바꾸지 못한다. 교육으로 키워줄 수 있는 능력에도 한계가 있다. 성공에는 운도 중요한데 운을 물려 줄 수 있는 부모는 없다. 부모의 기대치가 낮다면 자식으로서는 그 기대치를 채우는 일이 비교적 쉬울 테지만 부모의 기대치가 클 경우 그 기대치를 채우기란 쉽지 않다.
그리고 많은 부모들은 자식이 그들의 기대치를 채우지 못하는 것을 이해할 수가 없다. 부모는 자신에 비하면 엄청나게 좋은 환경을 제공했다. 뿐만 아니라 많은 부모들은 스스로가 그렇게 많은 것을 기대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내가 뭘 큰 걸 요구했냐? 겨우 이걸 하라는게 그렇게 힘드냐?”
대개 이런 말을 반복하게 된다. 좋은 부모건 나쁜 부모건 자식에게 관심이 있는 부모라면 어쩔 수가 없다. 대부분의 사람은 자기가 모든 것을 보고 알고 있지 못하다는 것을 잊어버린다. 그래서 자신의 일은 어렵게만 보이고 남의 일은 쉽게만 보인다.
자신의 성공은 모두 노력 덕분이지 운이 좋았던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는 것이다. 이것은 부모 자식간에도 적용된다. 그래서 자식은 부모가 쉽게 뭔가를 얻었다고 생각하고 부모는 자식이 노력이 부족하다고 생각하기 쉽다.
세습이 만들어내는 악당
이렇게 보면 세상이 그다지 빨리 바뀌지 않았던 시대에는 오히려 세습이 악당을 만들지 않았다는 생각이 든다. 농사꾼 아들은 농사꾼이 되고 왕의 아들은 왕이 되던 시절을 생각해보자. 과잉 지식의 시대가 아니었으니, 자식이 부모의 직업을 물려받을 때 쯤이면 그럭저럭 부모의 일을 해낼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니까 우동집 자식은 그럭저럭 우동을 만들고 세탁소집 자식은 그럭저럭 세탁소일을 할 수 있었을 수도 있다.
그런데 오늘날 교수 아들이라고 교수를 할 수 있을까? 사장 아들은 사장을 할 수가 있을까? 정치가의 아들은 정치가를 할 수가 있을까? 앞서 말한 것처럼 악당이 되지 않고 그렇게 할 수 있을까? 경쟁은 치열하고 지식의 양은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급변하는 이 시대에 세습이 잘될 리가 없다.
우리는 최근 대한항공 일가에게서 이 문제를 봤다. 박정희 일가에게서도 봤다. 문제는 결국 능력이 되지 않는 신세대가 자신에게 걸맞지 않는 자리를 세습받으려고 하는데서 생긴다. 그들은 부모가 하던 대로 하면 된다고 자연스럽게 생각한다.
조현아나 조현민은 과거의 썩어빠진 한국 재벌들이 기업하는 것을 보고 자신도 계속 그렇게 하면 된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박근혜는 자신의 아버지가 정치하는 것을 보고 자신도 그렇게 정치하면 된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신세대의 대부분은 부모의 일을 모두 이해하지 못하고 부모를 과소평가한다. 즉 부모가 뭔가를 아주 쉽게만 해내고 있다고 착각하는 것이다. 거기에 자기가 보지 못하는 노력과 능력이 있었다거나 운이 좋았다는 사실을 이해하는 사람은 드물다.
그러니까 세습이 이뤄지면 문제가 커지는 것이다. 그들은 요즘 젊은 사람과 60대는 다른 방식으로 사고한다는 것을 모른다. 최순실같은 사람은 박정희 일가의 행태를 보면서 자신의 자식에게 특혜를 주는 것정도는 당연히 아무 문제도 생기지 않을거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미국에게 원조를 받으며 극빈국가로 살던 시대와 지금은 다르다. 시스템은 훨씬 더 정확한 행동과 책임을 요구한다. 30년전에는 땅콩회항 보다 더한 것을 해도 문제가 생기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같은 일을 하면 문제가 된다. 왜냐면 소달구지를 운전하는 방법과 항공기를 운전하는 방법은 같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사회가 그만큼 달라진 것이다.
우리 세대의 질문
이 문제는 생각하면 아주 중요한 그리고 심각한 문제다. 조현아와 박근혜만의 문제가 아니고 심지어 재벌들만의 문제도 아니다. 한국은 정치 경제 문화적으로 성장했다. 그리고 현대 한국을 살고 있는 우리는 심각한 질문을 받고 있다. 그것은 바로 다음과 같다.
내 자식만 생각할 것인가 아니면 다음 세대의 행복 전체를 생각할 것인가?
우리는 스스로가 가진 것을 오직 자식에게만 물려 주려고 한다. 그러나 그것은 쉽지 않다. 게다가 물려주는데 성공해도 자식의 인생을 망치기 쉽다. 왜냐하면 자식은 그를 물려받을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능력이 안되는데 물려받으면 내가 말한대로 악당이 되는 수밖에 없다. 세상이 자신의 능력없음을 알까봐, 자신의 능력 없음을 숨기기 위해 그 자식은 무리를 하게 된다. 우리나라에 가득한 권위주의나 갑질은 상당부분 이렇게 해서 만들어 진 것이다.
다른 아이들은 점심값도 없지만 내 자식만 초호화 사교육비 들여서 좋은 대학보내겠다고 하는 것도 세습이다. 돈들여 스펙만들고 있는 인맥 없는 인맥 끌어다가 내 자식만 좋은 회사에 취직시키겠다고 하는 것도 세습이다.
그런데 이런 일들은 모두 그다지 효율이 좋지 않다. 들인 시간과 에너지와 돈에 비해 결과는 잘 안나온다. 그래서 사교육비와 대학등록금 등에 엄청난 돈이 들어간다. 내가 아는 사람 중에는 그 돈으로 땅이나 사서 목장이나 하게 하겠다고 하는 사람이 있었다.
박사학위가 있는 고학력자가 자식을 대학에 보내지 않겠다고 말하는 것이다. 물론 목장은 하기 쉬운 것이겠는가만은 무의미하게 돈을 쓰는 것보다는 그 돈으로 건물을 사서 임대업을 하거나 창업을 하는 것이 더 바람직해 보일 때도 있다.
무엇보다 그 효율적이지 못한 세습과정의 끝에 자식의 인생이 행복하지 않거나 망한다면 더욱 말이 안 되지 않겠는가. 그런데 한국은 재벌 3세를 넘어 재벌 4세가 등장하고 있다. 아이 키우는 일이 힘들어서 출산률은 재앙수준으로 낮다.
이런 현실을 생각하면 고작 급식비정도가지고 나라망한다고 투표까지 강행했던 오세훈 서울시장이 현임 박원순 시장의 바로 전 시장이라는 사실이 믿기 힘들 지경이다. 지금은 그 급식을 먹을 아이들이 없어서 나라가 망할 것같은데 말이다.
마치며
이 글의 결론은 이렇다. 복지 망국론이니 하는 소리가 세상에 있지만 세습망국론이 훨씬 더 설득력 있다. 내 자식만 어떻게 해보겠다는 생각이 본인들의 인생, 자식들의 인생 나아가 한국 사회 전체를 위협하는 것이다.
그를 벗어나 성실하게 살았을 때, 아주 잘살지는 않아도 그럭저럭 행복하게 사는 사회를 만든다면 내 자식도 그럭저럭 잘 살것이다. 세상 젊은이들 모두에게 살 길을 만들어 주면 내 자식이 살아갈 길도 쉬워질 것이다. 그런 세상이라고 해서 뭔가를 많이 가진 부모를 가진 사람이 득이 없는 것도 아니다.
그리고 효율이 떨어지는 세습과는 달리 복지는 다함께 하면 효율이 좋다. 즉 생각보다 쉽게 된다. 최순실이 자기 딸 하나 키우겠다고 피운 난리를 보라. 그렇게 손실된 사회적 자원이 청년들을 돕는데 쓰였다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혜택을 봤을까? 그렇다고 정유라는 행복한 딸이 되었는가? 엄마가 밉다고 하지 않는가.
우리가 이 점을 깊이 숙고하지 않으면 세습망국론은 결국 한국의 발전원동력을 망가뜨릴 것이다. 이미 수없이 그렇게 했다. 재능있는 아이들을 사장시켜가면서 세습으로 성장하는 아이들, 그들이 부모에게 물려받은 돈으로 갑질이나 해대는 사회가 언제까지 발전할 수 있을까. 박근혜, 조현아, 조현민이 나라와 회사를 망치는 걸 보고도 우리는 그걸 부정할 수 있을까? 그럴 수 없다. 우리는 이걸 기억해야 한다.
원문: 나를 지키는 공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