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행복 설계(Happiness By Design)』의 저자 폴 돌란의 두 번째 책 『Happy Ever After: Escaping the Myth of the Perfect Life』에서 발췌, 편집 후 The Guardian에 게재한 「The money, job, marriage myth: are you happy yet?」을 번역한 글입니다.
어떻게 살아야 할까? 어떤 삶이 좋은 삶일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시중에 무수히 많이 널려 있습니다. 야망을 품고, 부자가 되어야 하며, 성공을 향해 꾸준히 달려가야 합니다. 교육은 미래를 위한 투자니 게을리하지 말 것, 결혼하고 아이를 낳아 단란한 가정을 꾸리는 것도 필수입니다. 물론 결혼은 일부일처제의 관습에 따라 사랑하는 사람 한 명하고만 해야 하죠.
이것저것 해야 할 일이 많기는 하지만, 어쨌든 복잡한 세상을 묵묵히 헤쳐나갈 길잡이처럼 사용하다 보면 좀 더 편하게 삶을 살게 해주는 지침입니다. 어쩌면 이 조언들을 따라가다 보면 행복을 찾을 수도 있을 겁니다.
하지만 이런 소위 ‘다 겪어보고 하는 진심 어린 조언’들은 진심에서 비롯됐을 가능성이 크더라도 오늘날, 지금을 살아가는 내가 길잡이로 삼기에는 적절하지 않은 옛날 관습에 기댄 말일 때가 많습니다. 옛날에는 지혜로운 길잡이였을지 몰라도 요즘 세상에는 맞지 않는 말일 때도 많죠.
그래서 간혹 행복을 찾아가는 등불이 되어주어야 할 조언들이 한없이 불편하고 쓸데없는 부담을 주며, 불화를 낳기도 합니다. 과감하게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런 류의 조언은 득 보다 실이 많은, 안 하느니만 못할 때가 더 많습니다.
제가 겪은 이야기로 글을 시작해보려 합니다. 평범한 서민 가정에서 태어나 교육을 받고 대학교 교수가 된 제가 학자란 모름지기 어떻게 행동해야 한다는 시선과 압력, 조언을 맞닥뜨렸던 이야기들이죠. 유쾌하게 마무리되기 어려운 상황은 생각보다 자주 일어납니다.
2년 전의 일입니다. 웨일스의 헤이온와이에서 열린 철학/음악 축제(HowTheLightGetsIn festival)에서 “감정이냐 이성이냐”를 주제로 한 토론에 참석했습니다. 흥미로운 토론을 마치고 배를 좀 채우려고 나왔는데, 50대로 보이는 한 남자가 제게 말을 걸었습니다. 저의 첫 번째 책 『행복 설계(Happiness By Design)』를 정말 재미있게 읽었다며 기분 좋게 말을 시작한 그 남자는 대뜸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나저나 교수님은 왜 서민층, 노동자 계급 출신 영웅이라는 걸 자꾸 드러내려 하는 거죠? 책에서도 그랬고, 사실 지금도 그러고 있잖아요.
보통 영웅이 되는 건 기분 좋은 일이니 마다할 이유가 잘 없지만, 이 상황에서는 영웅 앞에 붙는 수식어도 좀 어울리지 않아 보였고, 제가 무언가 대단한 잘못이라도 저지른 것처럼 삐딱하게 말하는데 기분이 좋지 않았습니다.
그 남자는 그러거나 말거나 일장 연설을 늘어놓기 시작했습니다. 어느 정도 지위에 오르고 나면 행동거지를 바꿔야 한다는 류의 이야기였습니다. 대표적으로 지적해주신 것이 말하는 중간에 비속어를 쓰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한 시간 정도 진행된 그 날 토론에서도 두 차례 정도 “fuck”이란 단어를 쓰기는 했습니다. 그런데 왜 제가 비속어를 쓰면 안 되는 건지 들어보니 이 사람의 논리는 비속어를 쓴다는 건 그만큼 상황을 고급스럽고 우아하게 표현하는 데 필요한 어휘력이 부족하다는 뜻이고 지능이 낮다는 걸 만천하에 광고하는 거라는 것이었습니다.
그 사람이 그렇게 주장한 것이지 사실 비속어를 쓰는 것과 지능 사이에 정말 상관관계가 있는지는 과학적으로 입증된 적이 없습니다. 물론 누군가를 해치려는 의도가 명백한 상황에서 섞여 나오는 욕설은 위험하고 해롭죠.
그러나 흥분된 감정을 전달하거나 무언가를 강조하고 싶을 때 사용하는 비속어는 다릅니다. 이럴 때는 감정 표현의 맛을 살리고 원하는 것을 효과적으로 강조하는 데 아주 유용하죠. 그러니 욕설이나 비속어를 쓰는 게 무조건 나쁘다는 생각은 한마디로 헛소리입니다.
다시 저를 다짜고짜 가르치려 들었던 50대 남자 이야기로 돌아가 보죠. 이 남자는 런던정경대학교의 교수라는 제 사회적 지위를 생각하면 저를 존경하고 롤모델로 삼으려는 많은 사람을 생각해서라도 더 좋은 본보기가 되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모름지기 중산층의 번듯한 직업을 가진 자는 어떻게 행동해야 한다는 식의 사회적, 문화적 담론을 그대로 읊은 겁니다.
저는 이런 종류의 사회적 담론이 시절이 바뀌는 동안 그 오랜 시간을 견뎌냈다는 사실에 적잖이 놀라곤 합니다. 오히려 권력 구조, 문화, 법, 가족, 언론, 역사적 사례와 일화, 심지어 진화론을 차용한 설명, 자연선택 이론을 들먹이면서까지 이런 담론은 강화되어 사실상의 규범이 되었습니다.
이 담론은 우리 안에 타고난 욕망을 일정 부분 채워줄 뿐 아니라 복잡한 세상을 살아가는 데 길잡이로 삼을 만한 원칙과 일련의 사고방식을 세우고 다져줍니다. 즉 어떻게 살아야 할지 잘 모르겠거나 혼란스럽고 고민이 될 때 이 담론을 살펴보면 언제나 단순하지만 명확한 정답, 고민 없이 따라가면 그만인 쉬운 길이 있는 겁니다.
‘그래, 다들 저렇게 살아온 덕분에 굳어진 관습이니 나도 저 길을 따라가면 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 수밖에 없죠. 사람들은 담론을 받아들이고 그 길을 따라가려 할 뿐 아니라, 그 길을 벗어나 다른 길로 가려는 사람들을 만류하고 제지하기도 합니다. 저에게 교수가 욕설이나 해서 되겠냐고 나무라던 그 남자처럼 말이죠.
이 사람이 제 말투와 행동을 보고 나타낸 반응을 보면서 저는 우리 모두를 불행하게 만드는 커다란 덫을 떠올립니다. 저는 여기에 담론의 덫(narrative traps)이라는 이름을 붙였습니다. 담론의 덫에 빠지면 이 세상에 완벽한 삶이라는 게 존재한다, 어떻게 사느냐에는 정답과 오답이 있다는 착각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게 됩니다.
부와 성공에 관한 사회적 담론이 대표적입니다. 채워도 채워도 끝이 없는 것들이죠. 그런데 이 두 가지를 이루지 못하면 사람들은 한없이 불안하고 우울해하며 쉽사리 절망에 빠집니다. 그렇다고 부와 성공을 좇지 말자고 제안할 생각은 전혀 없습니다.
다만 저는 부와 성공에 관한 사회적 담론이 지금 내가 얼마나 부유한지, 얼마나 많은 것을 이루고 성공했는지에 관계없이 누구나 더 많은 부를, 더 큰 성공을 원하도록 내몰기 때문에 문제라는 점을 분명히 지적하고 싶습니다.
지금 행복하더라도 돈이 좀 더 있으면, 다음 단계의 성공을 이루면 더 행복해질 거라는 가정이 끝없는 욕망의 굴레를 만듭니다. 이 가정은 틀렸습니다. 재산이 많아질수록, 성공을 이룰수록 얻게 되는 행복의 크기는 점점 더 작아지고, 어느 순간부터는 전혀 행복하지 않거나 오히려 불행해지기 마련이기 때문이죠. 행복으로 가는 지름길은 오히려 “더 많이” 대신 “이 정도면 됐어”라며 욕망의 굴레를 멈춰 세우는 데 있을지도 모릅니다.
영국 통계청은 영국인 표본 20만 명을 대상으로 지난 2011년부터 매년 얼마나 행복한지를 조사했습니다. 이 조사 결과를 보면 조사 대상의 약 1%는 아주 불행한 삶을 산다고 말합니다. 표본이 영국 인구 전체의 분포를 잘 반영해 선정됐다고 가정하면 전체 영국인 가운데 약 50만 명이 끔찍한 삶을 산다는 말이 됩니다. 경제적으로 궁핍하면 아주 불행한 1%에 속할 가능성이 커집니다.
구체적으로는 주급 400파운드, 연봉으로 환산하면 2만 파운드(약 2,940만 원)가 일종의 마지노선이 됩니다. 주목해야 하는 점은 이보다 많이 벌면 그 순간부터 (행복의) 한계효용 체감의 법칙이 적용된다는 점입니다. 즉 주급 400파운드가 (영국 물가를 고려했을 때) 생필품을 사고 기본적인 생활을 영위할 수 있는 최저 생활임금이라면, 그보다 돈을 벌면 더 벌수록 사람들이 행복해지는 건 맞지만 행복해지는 정도는 줄어든다는 거죠.
미국인의 삶을 엿볼 수 있는 미국 시간 활용 조사(American Time Use Survey)에서도 비슷한 결과가 나타납니다. 사람들이 얼마나 행복하다고 답하는지와 소득을 비교해보면 소득이 비교적 낮은 구간에서는 소득이 오를수록 행복하다는 답변도 같이 늘어나지만, 고소득층 구간에서는 소득과 행복의 상관관계가 매우 옅어지거나 오히려 반대로 나타나기도 합니다. 돈이 많아지는데 오히려 불행해지는 겁니다.
또한 연봉이 10만 달러가 넘는 사람이 연봉이 2만 5,000달러보다 낮은 사람보다 딱히 더 행복하지 않은 것으로 나타나 부자가 가난한 사람보다 행복할 거라는 통념의 근거도 생각보다 탄탄하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고소득층은 어떤 일을 하든 좀처럼 뚜렷한 목표를 세우지 못하는 사람이 많았습니다. 아마도 원하는 걸 다 가진 삶을 살다 보니 무엇을 하든 대단하지 않은 일로 여겨지고, 그래서 의미를 부여하기 힘들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돈을 많이 벌고 부자가 될수록 돈을 더 버는 데 시간과 노력을 더 들이게 된다는 아이러니한 사실은 실제 사람들의 생활 패턴을 분석한 데이터에서도 고스란히 나타납니다. 돈을 많이 벌게 되면 그만큼 일도 더 많이 하고 출퇴근 시간이 길어지는 것도 감수합니다. 문제는 그러는 사이 희생하게 되는 시간이 여가나 가족, 친구들과 보내는 시간 등 주로 행복과 직결되는 데 쓰던 시간이라는 겁니다.
부자가 되면 알아서 행복해질 거라는 생각은 부자가 되는 과정을 고려하지 않은 채 부자가 되고 난 결과만 본 반쪽짜리 계산입니다. 많은 돈으로 살 수 있는 것, 할 수 있는 일만 생각했지 그 돈을 손에 넣는 과정을 간과한 겁니다.
그런데도 중산층으로 분류할 수 있는 연봉 5만 파운드 소득 구간에 있는 사람들은 여전히 담론의 덫에서 전혀 헤어나오지 못합니다. 지금 힘들고 불행하더라도 돈을 더 많이 벌면 행복이 찾아올 거라는 기대를 버리지 않죠.
막연한 기대를 넘어 거의 신념에 가까운 수준입니다. 연봉 5만 파운드를 받게 된 사람 중에 “이 정도면 됐어”라며, 돈 말고 행복을 진지하게 추구하기 시작하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요? 거의 없을 겁니다. 그만큼 담론의 덫이 우리 모두를 옭아매는지도 모릅니다.
의식주를 해결하는 데는 부족함이 없을 만큼 돈을 번다면, 담론의 덫에서 과감하게 벗어나 돈을 더 벌 궁리 말고 다른 것을 좇아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예를 들어 내 돈을 벌 궁리 대신 최저 생계 수준에 못 미치는 힘겨운 삶을 살아가는 이들을 돕는 데 시간과 품을 들여보는 건 어떨까요? 남을 돕는 일은 행복으로 가는 가장 효과적인 지름길입니다. 아마도 그 효과는 곧바로 나타날 겁니다.
“이 정도면 됐어”라는 자세로 돈과 부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나는 길에는 사실 수많은 장애물이 있습니다. 가족을 먹여 살려야 한다는 중압감, 사회적인 평판이나 다른 사람과의 비교에서 오는 압력이 그런 것들이죠. 특히 소셜미디어를 통해 남들이 사는 모습이 너무 쉽고 빠르게, 여과 없이 전달되는 세상에서는 남과 비교하다 우울해지거나 불안해지기는 쉬워도 사회적인 압박이나 기대치를 떨쳐내는 일은 너무도 어렵습니다.
또한 실제로 돈을 더 벌기 위해 악착같이 살지 않더라도 “이 정도면 됐어”라고 선언하는 것은 다른 문제입니다. 할 수 있는 것을 다 바쳐 더 많은 것을 이루고 소유하고자 열심히 사는 삶보다 어딘가 단조롭고 나약해 보이기 때문이죠. 그러나 먹고 사는 걱정은 안 해도 되는 수준임을 인정하는 것은 다른 무엇보다도 나를 옭아맨 굴레를 벗어던지는 해방의 열쇠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끊임없이 돈과 부를 좇는 삶의 문제점은 또 있습니다. 바로 다른 사람들의 행복을 평가하고 재단할 때 그 사람이 얼마나 가졌느냐를 잣대로 삼게 되는 겁니다. 이 관점에서 보면 더 많이 벌려고 열심히 살지 않는 사람은 야망이 없거나 게으른 사람이 됩니다. 이내 우리네 세상은 나보다 조금이라도 더 가진 사람과 비교하며 그 사람보다 가진 것이 적어서, 또는 목표로 한 재산을 모으지 못해서 불행한 사람들로 가득한 끔찍한 세상이 되고 맙니다.
그러니 스스로 지금 삶에 만족하며 행복하다고 말하는 사람들에게 굳이 돈의 잣대를 들이대며 게으르다거나 야망이 없다는 평가를 해서는 안 됩니다. 더 많은 부를 추구해야 행복해진다는 ‘담론의 덫’은 근거가 빈약한 환상일 뿐 아니라 더 많은 부를 원하지 않는 사람들을 게으른 사람, 패배자로 낙인찍어서 더 큰 문제입니다.
발상을 바꿔야 합니다. 돈을 더 벌겠다며 많은 것을 희생하는 대신 사회적으로 가치 있는 일, 개인보다 공동체를 위하는 일에 품을 들이는 사람들에게 큰 박수를 보내야 합니다. 그런 사람들이야말로 존경받을 만한 사람입니다.
부를 향한 욕망은 밑 빠진 독과도 같습니다. 절대 채울 수 없을뿐더러 필요한 것 이상의 상품을 계속 사서 쓰게 되는데, 이는 지구를 병들게 하는 온실가스를 더 많이 배출하고 자연 그대로 둬도 되는 땅도 개발해 인간의 편리를 위한 상품을 만드는 데 쓰게 하며 각종 원자재와 수자원도 더 쓰게 합니다. 얼마든지 다시 쓰고 채워 쓸 수 있는데도 새것에 중독된 현대인의 삶은 엄청나게 낭비하는 습관을 낳았고, 이는 심각한 환경 문제로 이어졌습니다.
돈은 필요한 만큼만 있으면 된다는 중요한 진리를 부모는 어려서부터 자식들에게 가르쳐야 합니다. 정책 결정자라면 우리나라 최고 부자 순위를 발표해 모두가 부러워하(다가 결국엔 불행하)게 하는 것보다 우리나라 최고 납세자를 공개해 그 사람을 더 우러러보게 하는 건 어떨까요?
구글에 세계 최대 갑부 순위를 쳐보면 제프 베조스, 빌 게이츠를 비롯해 억만장자들의 이름과 재산이 검색 결과로 뜹니다. 하지만 세계 최대 납세자 순위를 검색한 결과는 신통치 않습니다. 각국의 세율을 비교한 자료 정도가 나올 뿐이었습니다. 만약 우리의 사고회로가 남과 경쟁하고 비교하는 것으로 굳어져 있다면, 좀 더 의미 있고, 모두가 행복할 수 있는 내용으로 경쟁하고 비교할 수 있도록 담론을 만들어가는 것이 모두의 행복에 좀 더 도움이 될 겁니다.
원문: 뉴스페퍼민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