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 경산의 한 대학에서 중국어를 전공하는 박정린(20·가명) 씨는 고등학교 3학년 때 받은 충격 때문에 모교를 찾아가지 않는다.
졸업한 선배들이 후배들을 응원하러 왔는데, 그 중에 학창시절 ‘핵인싸(무리와 잘 어울려 분위기를 이끄는 사람)’였던 언니가 있었어요. 그런데 그 언니가 계속 자기가 다니는 대학교 이름을 안 밝히려고 하는 거예요. 한참 머뭇거리다 (지방에 있는) 대학 이름을 말했는데 말 그대로 교실이 ‘갑분싸(갑자기 분위기 싸해짐)’가 됐어요. 그 선배는 결국 울음까지 터뜨리고 말았어요. 나도 모교에 가면 그런 상황을 겪을까 봐 못 찾아가겠어요.
암묵적이거나 노골적이거나, 상처 주는 멸시의 언어
부산 소재 한 사립대를 졸업한 이원기(26·가명) 씨는 대학시절 서울의 한 지상파 방송사에서 주최한 대학생 홍보서포터즈 워크숍에 참석했다가 마음에 큰 상처를 입었다. 서울의 한 명문대에 다니는 참가자가 “학교가 어디냐”고 물어 알려줬더니, 웃음을 터뜨리며 이렇게 말했기 때문이다.
부산에 부산대 말고 다른 학교가 있었냐?
당시 워크숍에 온 30여 명 중 대부분이 서울·경기도권 대학생이었고 나머지 지역에서 온 사람은 5명뿐이었다. 이 씨는 “군대 전역한지 얼마 안 돼서 가뜩이나 사회에 적응하지 못할 때였는데 그 말이 굉장히 수치스러운 기억으로 남아 있다”며 “지금 같았으면 한방 먹여주는 건데…”라고 말끝을 흐렸다.
한국어와 한국문화가 좋아 충북의 한 사립대 대학원에 유학 온 인도네시아 유학생 아르요노 디다(24) 씨도 지방대생이란 이유로 불쾌한 경험을 했다. 수업과제로 모국을 소개하는 기사를 써서 온라인 신문에 올렸는데 ‘듣보 지잡대 돌대가리’ ‘○○대 따위’ ‘○○대가 어디 있는지 전혀 모르겠다’ 등 학교 비하 댓글이 잔뜩 달린 것이다.
아르요노 씨는 “인도네시아에도 대학 간 우열은 있지만 지방대 출신이라는 이유만으로 멸시와 조롱을 받는 일은 없다”며 “우리 학교가 어떤 곳인지 정확하게 모르면서 마구 악성 댓글을 단 사람들에게 큰 상처를 입었다”고 말했다.
편견·차별 넘어 혐오의 대상이 된 지방대
어우, 지잡대 냄새.
지난 2016년 10월 서울대 대나무숲(익명 고발창구) 페이스북에는 ‘지방대생인 친구와 쇼핑몰에서 놀다가 충격적인 일을 당했다’는 서울대생의 글이 올라왔다. 글쓴이가 한 지방대의 문양이 들어간 후드티셔츠를 입은 친구와 떠들었더니 서울 소재 한 대학교 과잠바(학과명이 들어간 윗옷)를 입은 행인이 얼굴을 찌푸리며 ‘지잡대 냄새’라고 말했다는 사연이었다.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수천 건이나 공유된 이 이야기는 당시 언론에도 보도돼 공분을 일으켰다.
지방대가 편견과 차별을 넘어 혐오의 대상이 되고 있다. 홍성수(43) 숙명여대 법학과 교수는 지난해 펴낸 책 『말이 칼이 될 때』에서 혐오를 ‘감정적으로 싫은 것을 넘어서 어떤 집단에 속하는 사람들의 고유한 정체성을 부정하거나 차별하고 배제하려는 태도’로 정의했다.
또 혐오표현을 ‘어떤 개인‧집단에 대해 그들이 소수자로서의 속성을 가졌다는 이유로 멸시‧모욕‧위협하거나 그들에 대한 차별, 적의, 폭력을 선동하는 표현’이라고 설명했다. 이 기준에 따르면 지방대에 대한 편견과 차별을 강화하는 태도와 표현 역시 혐오와 혐오표현으로 볼 수 있다.
지방대 출신이 전체 대학 졸업자 중 다수(서울 포함 수도권 37%, 지방권 63%)를 차지하는데도 소수자에 대한 혐오표현이 성립할 수 있을까? 홍 교수는 “그렇다”고 말한다. 그는 지난 11일 세명대 저널리즘연구소 전화인터뷰에서 “소수자성은 단순히 숫자가 많고 적음을 따지는 게 아니라 한 사회에서 지속적으로 차별 받고 소외돼 온 맥락을 고려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어 “지방대생 역시 수적으로는 다수지만 한국 사회에서 심각하게 소외받는 소수자로서의 성격을 지닌다”며 “따라서 지방대생에 대한 부정적 시선을 통해 차별을 조장하는 표현은 충분히 혐오표현으로 볼 수 있다”고 강조했다.
‘지잡대’ 표현은 ‘은폐된 형태의 심각한 폭력’
지방대를 혐오하는 표현으로 대표적인 것은 ‘지잡대’다. 이는 ‘지방에 있는 잡스러운 대학’의 줄임말로 2000년대 중반 이후 인터넷을 통해 널리 퍼졌다. 원래 지방 소재 대학 중 제대로 된 교육과 재정 지원이 이뤄지지 않는 일부 부실대학을 가리켰지만 점차 수도권을 제외한 지방 소재 대학 전체, 나아가 서울 소재 학교를 제외한 전체 대학을 뜻하는 말로 범위가 넓어졌다.
인터넷 사용자들이 자발적으로 참여해 만드는 온라인 백과사전 중 공익재단이 관리하는 위키백과(한국판 위키피디아)에 비해 표현이 거칠고 공신력이 떨어지는 몇몇 위키는 ‘지잡대’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지방에 있는 대학교면 의약학 계열, 지역거점국립대, 특수목적대, 과학기술원과 포항공대, 교육대를 제외하고 죄다 지잡대라고 도매로 묶어서 비하하는 경향이 있다.
- 나무위키
넓은 의미의 지잡대에는 수도권도 포함된다.
- 구스위키
어떤 사람은 수도권까지를 마지노선로 잡는 한편 인서울 바깥은 지잡이라고 단정 짓는 사람도 있다.
- 디시위키
공식 석상에서 수도권 대학이 지잡대로 거론된 사례도 있다. 국내 중증 외상센터 확충에 기여해 온 이국종 아주대 교수는 2017년 12월 국회 세미나에서 “(‘아덴만의 영웅’ 석해균 원장 치료 당시) 아주대 같은 지잡대 병원에서 별것도 아닌 환자를 데려다 쇼를 한다고 의료계에서 뒷이야기가 심했다”고 토로했다. 아주대는 경기도 수원에 있다.
학력차별이 심한 일본에도 최하위권 대학을 뜻하는 ‘에프(F)랭크 대학’이라는 용어가 있지만 한국의 지잡대처럼 지방대를 싸잡아 비하하는 말은 없다.
박재연 아주대 국어국문학과 교수는 지잡대와 같은 줄임말 신어에 대해 분석한 논문 ‘한국어 줄임말 비어의 어휘론과 화용론(2017)’에서 “이런 류의 신어들은 오직 모욕을 위해 매우 구체적인 대상을 새롭게 범주화하며 그 대상을 부당하게 멸시하고, 존재 자체로 심각한 폭력을 행사한다”고 단언했다.
그는 “그러면서도 이들은 줄임말 형식을 띰으로써 수수께끼 풀이의 재미를 주어 그 폭력성을 은폐한다”고 덧붙였다. 무신경하게 쓰는 지잡대라는 말이 누군가에게는 심각한 폭력이 될 수 있다는 얘기다.
학교와 학원에서 키우는 혐오의 싹
역설적이게도 지방대 혐오의 싹이 자라는 곳은 학생들이 공부하는 곳, 학교와 학원이다. 명문대 진학에 초점을 맞추는 입시중심 교육 속에서 지방대는 ‘실패’ 혹은 ‘낙오’의 동의어로 각인된다.
경북 경산의 한 사립대 대학원생 서지혜(23·가명·건축학) 씨는 “고등학교 때 화학 선생님은 자신이 ‘개천에서 난 용’이라며 자기처럼 좋은 대학을 나와야 번듯한 직업을 가질 수 있다고 입버릇처럼 말했다”고 회고했다. 그는 “선생님이 특정대학 이름을 대며 그곳이 인간답게 살 수 있는 ‘마지노선’이고 나머지는 실패한 인생이라고 끊임없이 세뇌시켰다”고 덧붙였다.
서 씨는 또 “다른 선생님들도 ‘지방대 가면 불효자’ ‘등골브레이커(부모님의 등골을 부러뜨리는 사람)’ ‘내 자식이 그런 대학 간다면 머리채 잡았다’ 등 모욕적 표현을 썼다”며 “공부하라는 뜻인 건 알겠는데 그렇게까지 해야 했나 싶다”고 말했다.
입시강사들도 마찬가지다. ‘공부 자극’을 핑계로 지방대를 노골적으로 비하하고 명문대를 과도하게 우상화하는 경우가 많다. ‘서울대생 3,000여명을 인터뷰해 최고의 공부법을 찾아냈다’며 사교육기업 스터디코드를 운영하는 조남호 대표는 2012년 ‘왜 공부해야 하는가’ 영상에서 “공부하는 이유는 오직 스카이(서울·고려·연세대) 대학 간판을 따기 위한 것”이라며 지방대를 비하했다.
지방대 간 애들은 어때, 뻔하지 않아? 학교 다닐 때도 학원 땡땡이 치고 노래방 가고 논 애들이 회사 와서도 똑같은 거 아냐? […]
대한민국에서 너네가 무슨 꿈을 갖든 간에 서울·연·고대를 나오지 않으면 나중에 억울한 일을 당해. 어떤 억울한 일? 너네 원서가 발에 채여서 오른쪽으로 쓰레기통으로 들어가는 거야. […]
지방대생들은 놀 수 있게 없게? 지방대생들 어때? 고등학교 때 진짜 잘 놀았던 애들이잖아. 대학 가면 왜 못 노는 줄 알아? 1학년 때부터 취업 공부해. 나 서울대 나왔잖아. 아까 말했지. 나 1학년 때 미팅만 하고 놀았어.
이 유튜브 영상은 수험생들 사이에서 ‘공부 자극 영상’으로 알려지며 76만이 넘는 조회수를 기록했으나 논란이 일자 삭제됐다.
‘우리 지잡대 맞다’ 스스로 비하하는 경우도
학창시절 교사와 강사 등에게서 ‘혐오의 말폭탄’을 맞고 지방대에 진학한 학생들은 자기 비하와 자격지심에 빠지기도 한다. 김진영(24·가명) 씨는 경북 경산의 한 사립대를 다니다 자퇴한 후 공무원 시험을 준비한다.
김 씨는 “재수학원 다닐 때 모의고사 끝나고 재수생들끼리 ‘지잡대, 그것도 학교냐? 등록금 아깝다’ ‘거기 갈 바엔 공무원 공부한다’는 비하 발언을 진지하게 나누는 걸 들었다”고 말했다. 그는 “실제로 ‘인(in)서울’ 못하고 지방대에 가게 되면 학교에 안 다니고 바로 공무원 공부를 시작하는 경우도 많다”고 전했다.
경북 경산의 한 사립대에서 사학을 전공하는 이은재(21·가명) 씨도 교내에서 친구들이 스스로 ‘지잡대’라고 비하하는 모습을 자주 봤다. 이 씨는 “지방대에서 비리가 터지거나 학생들이 물의를 일으켜 뉴스에 나오면 ‘지잡대 클라스’라는 (수준이 낮음을 자조하는) 말을 쓴다”고 말했다.
또 학교 커뮤니티에 ‘우리 학교가 지잡대냐, 아니냐’ 하는 글이 올라오면 각자 나름의 기준을 대며 ‘그렇다’ ‘아니다’ 치열한 논쟁을 벌이기도 한다고. 이 씨는 외부 사람들이 ‘너희 학교 지잡대야’ 하면 대놓고 싫어하면서도 스스로는 ‘지잡대’로 비하하는 학생들의 심리에 대해 “우리 학교는 까도 내가 깐다는 생각이 있는 것”이라고 풀이했다.
원문: 단비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