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치원: 떨리는 첫 경험
동요 <허수아비 아저씨>를 즐겨 부르던 아이가 있다. 소풍 가는 버스. 아이는 다른 친구들처럼 엄마와 함께 앉아 선생님이 골라주는 노래를 입 모아 불렀다. 준비된 행사가 끝나자 선생님은 자리를 돌며 아이들을 인터뷰했다. 누군가는 좋아하는 음식을 얘기했고, 누군가는 가족을 소개했다. 노래를 부른 친구도 있고, 뜬금없이 웅변을 한 녀석도 있다.
아이의 차례가 되었다. 선생님이 자신을 향해 다가오자 아이는 평소와 다른 묘한 기분을 느꼈다. 더운 듯 추운 듯 피부가 간질거리면서 심장이 빠르게 뛰는 느낌. 코앞으로 마이크가 다가왔고, 선생님이 뭔가를 물었다. 아이는 말을 하고 싶지 않았다. 자신을 더웠다가 춥게, 그러다가 숨이 차게 만드는 그 상황을 멈추고 싶었을 뿐이다.
공백의 시간이 길어지자 엄마는 아이에게 평소에 자주 부르던 <허수아비 아저씨>를 불러보면 어떻겠느냐고 했다. 마지못해 마이크를 받았다. 노래는 아슬아슬 첫 소절을 넘기는가 싶더니 이내 다 타버린 성냥처럼 사그라졌다. 아이는 엄마의 품으로 고개를 묻었다. 이후로는 그 노래를 즐겨 부르지 않았다.
꿈에서 우연히 엿들었던 얘기마냥 희미한 장면. 하지만 유치원생의 손엔 너무 컸던, 그래서인지 가냘프게 떨렸던 마이크는 빛바랜 사진처럼 지워지지 않고 기억에 남아 있다. 그 사진 속에서 마이크를 잡고 있던 아이는 분명히 나다.
초등학교: 염소 울음소리의 시작
[평소 세심하고 조용한데 이따금 활기찬 모습이 나타남. 교우 관계가 원만함.]
초등학교 생활기록부 내용이다. 조용하면서 활기찬 모습은 어떤 것일까. ‘이따금’ 나타나는 모습을 왜 굳이 기록했는지 의아했다. 한편으론 나를 활기차고 관계가 원만한 사람으로 표현해준 것이 내심 좋았다. 세심하고 조용한 것만으론 뭔가 부실했던 문장이, 잘 완성된 것처럼 보였다.
“앞에서 두 번째. 일어나서 읽어봐.”
4학년 첫 수업시간. 선생님께서 교과서 내용을 돌아가며 읽게 하셨다. 그 출발은 나였다. 아직 환경에 대한 적응이 덜 된 상태. 허수아비처럼 서서 책 속의 글자들을 음절로 꺼내기 시작했다. 떨리는 손을 움켜쥐자 음절이 흔들거렸다. 글자들이 염소 울음처럼 흐느끼며 쏟아져 나왔다. 활기찬 모습 같은 건 없었다.
고등학교: 흑역사가 남긴 요령
부모님께선 사회적이고 외향적인 성향과 어떤 상황에서도 담대한 태도, 특히 자신을 나타내거나 의견을 주장하는 능력을 중요하게 생각하셨다. 이해한다. 당시엔 그런 사람들이 주요한 역할을 하는 것처럼 보였다. 또래 대부분의 아이들이 외향성을 중요하게 생각했고, 나 역시 부모님의 바람을 훌륭한 사람의 기준으로 삼았다. 그런 모습을 내 일부로 부지런히 담아냈다.
‘훌륭한 사람’을 표방하는 장치들은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쯤 꽤 견고하게 갖춰졌다. 난 그럴싸하게 과감했고 눈에 띄게 사회적이었다. 그 모습을 만들기 위해 많은 산을 넘었다.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어설픈 순간과 좌절 그리고 흑역사를 남겼다. 나름의 요령을 얻었다.
낯선 상황을 대범한 척 넘겨내곤, 성공했다며 홀로 환호했다. 염소 울음의 연장선에 있는 경험은 모두 실패로 기록했다. 실패할 확률이 높은 상황은 능숙하게 피했다. 성공할 확률이 높은 상황은 굳이 부딪쳤다. 많은 사람 앞에 몸을 던졌다. 요령은 점점 더 발전했고, 대범한 세계의 외현은 확장됐다.
대학교 – 성격심리학 수업: 익숙해진다는 것
눈의 가로 세로가 작고 피부가 하얗고 조금은 동그란 얼굴의 교수였다. 그녀는 조용하고 차분하게 수업을 진행했다. 내향성에 대한 주제에선 자신의 경험을 사례로 덧붙였다. 학생이 갑작스러운 질문을 하거나 예상 밖의 상황이 생기면 얼굴이 붉어진다거나 말이 끊겼다. 그럴 때마다 “내가 좀 당황을 잘해요”라고 말하고는 수업을 이었다.
그리고 내가 늘 실패로 기록해왔던 ‘염소 울음의 연장선’을 그대로 드러내면서도 끝까지 자신의 메시지를 전달했다. 이상하게도 긴장을 드러내는데 오히려 안정돼 보였다. 그녀는 종강의 순간까지 자신의 교육 내용으로 강의를 꽉 채웠다.
비결이 궁금했다. 그녀가 가진 요령을 나만의 세계에 더하고 싶었다. 아니 어쩌면, 그 세계를 유지하는 데 드는 막대한 피로에 지쳐가고 있었던 것 같기도 하다. 종강 후 그녀를 찾아가 물었다. 여러 사람 앞에서도 긴장하지 않는 법을 알고 싶다고, 나도 사실 당신과 같은 성격이라고. 그녀가 답했다.
“정말 나와 같은 성격이라면 그게 사라질 가능성은 없다. 난 많은 수업을 진행했음에도 여전히 긴장이 된다. 다만 이것이 잘못된 것 같진 않다. 긴장은 당연한 것이다. 내가 안정돼 보였다면 그건 긴장하는 내 모습에 스스로 익숙해졌기 때문이다.”
사회인: 자신감에 관한 오해
연말 모임, 간만에 친구들과 모여 앉았다. 나름의 고초를 헤치고 온, 조금은 달라진 얼굴들을 하고 있었다. 반가움에 한 잔, 누군가의 승진에 두 잔, 오지 못한 이의 아픈 소식에 세 잔, 알코올이 혈관 곳곳을 헤집었고 우린 어릴 적 모습이 되어 소란스레 이야기꽃을 피웠다.
난 저 자신감이 너무 부러워.
얼큰해진 친구가 말했다. 그의 별명은 ‘톡톡’이다. 평소엔 말수가 적은 편이지만 술에 취하면 아껴뒀던 말을 한다. 이때 꼭 술잔으로 상 바닥을 톡톡 치기 때문에 붙여진 별명이다. 톡톡이 부럽다고 가리킨 방향에는 또 다른 친구가 있었다. 갈색 구불 머리로 덮인 둥그렇고 누런 얼굴에 작은 눈, 코와 함께 유독 크고 두꺼운 게 붙어 있었으니 입술이다. 예상 가능하게도 별명은 ‘순대’다. 그가 윗 순대 아랫 순대를 부지런히 출렁이며 얘기를 하고 있다.
“순대 저 자식은 아무 데서나 저 하고 싶은 대로 행동하거나 말을 하잖아. 기죽고 그런 게 없어.”
톡톡은 순대를 아련히 바라보며 말했다. 그 말을 들으며 조금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나에겐 톡톡이 평소 조용하지만 좀 더 안정되고 자신감 있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에게는 타인의 이야기를 끝까지 들어줄 수 있는 여유가 있다.
반면 순대는 상대방이 누구든 자신을 피력한다. 무턱대고 떠오르는 단어를 나열할 때가 많았고, 그 행동에는 상황의 공백을 견디지 못하는 초조함 같은 게 있었다. 톡톡에게 굳이 필요한 모습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런 그가 순대를 부러워한다니. 무슨 말일까. 그에게 물었다.
“네가 보기엔 저게 자신감이야?”
“저게 자신감이지, 아니면 뭐가 자신감이냐.”
“자신감이 왜 필요하다고 생각하는데?”
“그래야 기회를 잡고 성공할 수 있잖아.”
“자신감이 있어야 성공한다고? 왜?”
“몰라. 너도 자신감 있는 성격이라 몰라.”
당혹스러웠다. 친구의 날 선 반응보다 나에 대한 인상이 더. 나는 하루에도 몇 번씩 당황하고 후회하는 소심인이기 때문이다. 왜 톡톡의 눈에는 대범인인 순대와 소심인인 내가 모두 자신감 있어 보였을까. 그가 원하는 자신감이란 정확히 뭘까.
수상한 수상소감
“저는 말을 잘 못합니다.” 그는 더듬거리며 말을 이어갔다. “영화 처음 할 때, 사람들이 다 반대했어요. 저 같은 사람, 저기… 주인공 써서 흥행이 되겠냐고… 어… 제가 스무 살 때 처음 연극 시작할 때도 형, 누나들이 다 반대했어요. 넌 소심해서 안 된다고. 연습할 때 떨고 울고 난리였는데… 그분들 다 그만두고 저 혼자 남아 있거든요… (중략) 야, 이렇게 뚱뚱하고 못생긴 사람도 상 받는다? 꿈 포기하지 마라, 얘들아. 더 노력하는 배우가 되겠습니다. 칭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곽도원의 수상소감이다. 그는 청룡영화제 톱스타상을 수상하며 어렵사리 소감을 뱉었다. 사실 그날 그는 청룡영화제의 다른 시상도 맡았다. 역시나 더듬거리는가 하면, 다른 사람의 대본을 읽거나 횡설수설하다가 말했다. “아수라장입니다… 아주. 아이고.”
그는 소심인이다. 자신감이 없다는 것을 스스로 알고 있다. 정확히는 ‘어떤 순간에 자신을 발휘해야 하는지’ 알고 있다. 그는 자신이 원하는 분야에 끊임없이 도전했고, 현재는 대한민국의 대표적인 연기파 배우로 자리 잡았다.
정해진 대본, 예상한 장소, 수많은 연습, 그는 필름 속에서 자신의 강점을 유감없이 발휘한다. 하지만 예능 방송에 출연할 때, 시상대에 오를 때, 무대 인사를 할 때, 여전히 당황하고 긴장한다. 그는 성공했고, 소심하다.
소심함 덕분에 성공한 것들
소심한 그가 어떻게 성공했지? 하는 의문이 들었다면, 톡톡과 같은 관점을 가지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 그는 소심한 성격에도 ‘불구하고’ 성공한 것이 아니라 소심함 ‘덕분에’ 성공한 것이기 때이다. 아래는 소심한 성격이 아니었다면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을 것들이다.
- 중력의 법칙
- 상대성의 법칙
- 쇼팽의 <녹턴>
- 찰리 브라운
- 구글
- 해리포터
- 피터팬
- V3백신 프로그램
- 영화 〈곡성〉의 종구
성공을 자신감과 일직선상에 두는 사람들이 많다. 우리는 어떤 상황에서든 능숙하고 수려하게 대처하는 인물들을 동경해왔다. 성공하려면 대범해야 하고 행복하려면 사교적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인지 주변을 돌아보면 꽤나 많은 대범인이 눈에 띈다. 누구나 이 ‘자신이 있는 느낌(자신감의 사전적 정의)’을 갖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실제로는 세계 인구 중 절반이 소심인이다. —미국 국립연구소에서 전 세계를 대상으로 진행한 연구 결과에 따르면— 이중에서도 한국은 유독 내향성이 높은 문화권으로 분류된다. 그럼에도 소심인들은 대범인을 지향하는 사회 풍토 속에서 저마다의 방법으로 상당한 성과를 이뤄왔다. 이들 모두 자신감이 있어서 성공한 것일까?
익숙한 환경, 낯선 무대
톡톡 역시 자신감과 성공을 동일선 상에 두고 있었다. “그래야 기회를 잡고 성공할 수 있잖아”라는 말처럼 그것은 당연한 필수요소였고 친구인 나 역시 자신감이 있어서 기회를 잘 잡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대범한 무언가를 좇던 지난 시도들과 달리, 나에게 있어 ‘성공’이라 할만한 것들은 모두 내가 소심인으로서 그대로 존재할 때 다가왔다. 그 시간 속에 대단한 자신감 따위는 없었다.
여전히 지나치는 낯선 사람의 눈빛에도 가슴을 쓸어내린다. 수십 명 앞에서 그럭저럭 말하는가 하면 한두 명 앞에서도 입을 못 열고 우물쭈물한다. 이따금 떨고, 빨개지며, 마른 숨을 고른다. 나에게도 곽도원의 ‘익숙한 촬영장’과 ‘낯선 무대’가 있을 뿐이다.
역사는 ‘소심인의 성공이 반드시 자신감과 닿아 있지 않다’고 말하고 있다. 사실 이들이 막연한 자신감을 장착하려고 애쓰는 것만큼 비효율적인 일도 없다. 차분하게 숙고하고 판단할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익숙한 상황이 될 때까지 망설이고, 스스로 납득할 수 있을 때에야 입을 연다.
필요에 따라 ‘익숙한 환경’의 외현을 줄이거나 확장한다. 그런 과정 속에서 자신을 꺼내지 못해 답답한 상황들을 만나기도 한다. 도망칠 때도 있고, 후회의 시간도 길다. 하지만 그 좁고 기다란 통로에서 비로소 전에 없던 성과를 만들어낸다. 소심한 성공의 역사.
“나는 소심해.”
그에게 소심인이 가질 수 있는 면모들을 설명했다. 톡톡이 성공한 이들의 공통점을 자신감이라고 본 것은 어쩌면 그들이 눈에 더 잘 띄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우리에게 기회는 자신감보다 지속적인 고민의 시간과 닿아 있는 게 아닐까, 되물었다. 술 오른 면전에 참 열심히도 떠들었다. 자신감이 꼭 필요한 건 아니라고.
원문: 『소심해서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