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말이 되면 ‘한해의 인물’ ‘올 한 해 가장 영향을 끼친 인물’을 뽑는다. 이와는 별개로 ‘가장 영향력 있는 브랜드’ 순위도 나온다. 어느 순간 궁금증이 생겼다.
우리는 왜 브랜드에 그리 관심을 쏟게 되었을까?
질문을 던지며 다리를 책상에 뻗었다. 문득 한 장면이 떠올랐다. 9년 전 랑방과 H&M은 협업했다. 발매일 날 오전 10시에 학교 수입이 있었지만 옷을 사기 위해서 과감히 수업을 가지 않기로 했다. 새벽 5시에 첫차를 타고 새벽녘 명동 길거리에 줄을 섰다.
아침 수업은 결석이었지만 내가 원하는 가방, 옷을 구입했다. 무엇이 그리도 당당했는지 “옷을 사느라 늦게 왔습니다! 결석 처리하십시오!” 외치며 수업에 들어갔다. 내 말 듣고 어이없어하시는 교수님. 나도 모르게 피싯 웃었다. 그 웃음과 함께 또 다른 장면이 떠올랐다.
YEEZY 500 SALT!
무척이나 사고 싶던 신발이었다.
회사에 급하게 반차를 내고 가장 가까운 명동 아디다스 매장으로 달려갔다. 이미 중국인 리셀러들이 알바를 고용해 신발을 싹쓸이하고 있었다. 1시간 남짓 기다림 후 신발을 구입했다.
참 재밌다. 항상 내가 줄을 선 매장은 명동이다. 아차! 플레이스테이션 4 프로를 사기 위해 새벽 용산 아이파크몰에 줄을 섰다가 실패한 적도 있었다. 사람들과 씁쓸함을 나누며 지하철로 허탈하게 돌아간 기억. 남들은 왜 브랜드에 그리 열광할까? 정작 나 자신도 브랜드에 열광한다는 사실을 까먹었다. 바보였다.
우리는 왜 사람도 아닌 브랜드를 사랑하고 열광할까
사람들은 애플이 출시하는 신제품, 나이키의 에어조던, 한정판 의류를 사기 위해 캠핑도 마다하지 않는다. 좋아하는 뮤지션의 공연을 보기 위해서 캠핑도 불사한다. 콘서트 표 예매를 위해 각종 챗봇과 싸우면서 표를 구한다. BTS가 뉴욕에서 공연할 때 수많은 팬이 근처에서 캠핑했다. 캠핑하는 사람들의 안전을 위해 뉴욕 경찰은 수시로 트위터에 상황 보고를 했다.
명동에 가면 ‘라인 프렌즈’가 있다. 그곳에서는 항상 사진을 찍기 위한 대기열로 사람들이 북새통이다. 고된 기다림을 이기고 물건을 손에 쥔 사람들! 길고 긴 기다림 속에 공연장에 입장하는 사람들을 보자. 그들 눈가에는 피로가 아닌 즐거움이 가득하다. 열망에 가득한 눈동 자안에는 용광로 같은 뜨거움이 가득하다. 브랜드에 대한 뜨거운 사랑. 열병 같은 사랑.
브랜드가 사람들에게 영향력을 끼치는 시대다. 영향력은 단순한 현상이 아니다. 영향력은 권력 같은 거다. 우리가 누군가에게 영향을 받는다는 말은 그 사람을 추종한다는 말이다. ‘영향’을 받는다는 이가 있다면 ‘영향’을 주는 이가 있다. 사회를 지배하는 권력자.
정치제도를 이끄는 이들만이 권력자가 아니다. 누군가에 영향을 받는다는 말은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음에도 그렇게 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자유의지를 내려놓고 귀 기울인다는 말이다. 그 안에는 권력이 있다. 자발적이라는 사실이 더 중요하다. 왕좌의 게임에서 왕좌를 쥔 자만이 권력자가 아니다. 다른 이에게 크거나 작게 영향을 준다면 어느 누구나 크고 작은 권력자다.
브랜드를 정의하는 단어는 이제 몇몇 단어로 충분하지 않다. 마케팅 이론, 브랜드 관리는 분석이지 브랜드를 정의하는 게 아니다. 이제 개인, 기업, 미디어를 넘어서 브랜드는 메시지이자 권력이다. 그 안에는 우리가 알지만 쉽사리 설명 못 하는 무엇인가 있다. ‘아우라’라는 말이 적당할까?
지금 시대를 이끄는 아름다움, 영향력, 힘은 브랜드다. 방대한 지구를 통일한 사람은 없지만 코카콜라는 전 세계 사람들이 한 번은 마시거나 보았을 거다. 옛날 영화 부시맨에서 부시맨도 콜라병은 그리 좋아하지 않았나?
문득 미학이 떠올랐다. 이유는 모르겠다. 미술사를 전공해서 그런가? 미학이라는 말이 떠올랐다. 위대한 예술가 중 한 명인 루벤스는 유럽 각 나라를 돌아다니면서 그림을 그렸다. 동시에 외교관도 같이했다. 왜 그는 외교관을 할 수 있었을까? 당시 유럽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추구하는 아름다움, 바로크 미술! 그 미학을 가장 잘 표현할 수 있는 사람 중 한 명이 루벤스였다.
그는 당시 최고의 가문인 메디치 가문의 일원인 마리 드 메디치가 프랑스 앙리 4세와 결혼할 때 연작을 그렸다. 그림 속에서 마리 드 메디치를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여신같이 묘사했다. 실제로 엄청난 부귀영화를 누린 메디치가 일원인 그녀에게 그보다 더한 찬사를 담은 그림은 없었을 것이다.
그림 안에는 당시 권력자가 추구한 라이프스타일이 묻어 있다. 옷, 신발, 장식들이 말해준다. 루벤스가 묘사한 것처럼 그녀가 실제 그리스 여신같이 생기지 않는 않았을 거다. 그렇지만 그림 속에서 그녀는 그리스 신화라는 브랜드를 입었다. 이처럼 루벤스는 당시 누구나 원하는 아름다움을 알았기에 정치 역학, 권력, 경제력에 상관없이 자유롭게 이야기할 수 있지 않았을까?
미학은 시대마다 시대정신을 보는 도구였다. 바로크 미술은 역동적인 장면과 빛의 대비를 사용한다. 물론 바로크 미술을 비롯한 모든 미술사조는 몇 가지 단어로 손쉽게 정의할 수는 없다. 바로크도 마찬가지다.
당시 종교개혁에 가톨릭의 권위가 흔들리는 시기였다. 1542년 교황 바오로 3세는 가톨릭 전체 교회 회의를 소집(트렌토 공의회)했다. 이 공회에서 가톨릭교회의 개혁과 종교개혁에서 제기된 가톨릭의 기본 교리를 재확인했다. 공회로 모인 가톨릭교회 지도자들은 교리 재확인의 수단 중 하나로 예술을 택했다. 무엇보다 더 드라마틱하게 그려 교리를 강화하기로 했다.
이 트렌토 공의회의 결정은 반종교 개혁 및 바로크 미술 이론적 토대가 되었다. 지금 관점에는 상당히 웃기는 결정일지 모른다. 하지만 당시 가톨릭 성당에 있는 그림과 설교는 지금의 미디어 같은 존재였다. 동화 플란다스의 개에서 주인공인 네로가 파트라슈와 죽으면서 보는 그림은 루벤스의 십자가 내림이다. 역동적인 교리가 담긴 그림을 보는 일은 당시 사람들에게는 소중한 일이었다. 또한 성당은 시대가 추구하는 아름다움을 보는 곳이었다.
유럽 미술을 분석하면 그 당시 권력자들이 좋아하는 취향, 가구, 옷, 주제, 권력에 대한 모든 부분이 그림에 녹아있다. 그림 속 내용을 판정하고 서술하고 해석하는 작업을 연구 과제로 하는 미술사의 한 분과인 도상학은 쓸데없이 발전한 게 아니다.
요즘 이 같은 도상학적 작업을 누가 하는가? 브랜드를 담당하는 마케터들이 한다. 마케터는 브랜드 속 이미지를 판정하고 스토리를 붙어 서술하고 해석하며 이를 연구해서 각종 플랫폼에 선보인다. 현시대의 도상 학자들은 마케터다. 더불어 그들과 함께 일하는 이들이 기획자, 디자이너들이 아니던가?
그렇다면 미학으로 브랜드가 추구하는 방향을 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개성은 이제 개인의 라이프스타일이다. 특히 패션 브랜드들이 이에 민감하다. 매일 자신을 표현하는 일이 중요한 지금 시대에 옷은 개성의 전쟁에서 살아남기 위한 갑옷이다. 사람들이 옷을 통해 자신의 매력을 뽐내는 일과 브랜드가 디자인을 통해 소비자에게 다가가는 일은 같다. 개인은 패션 아이템이 그 역할을 한다.
브랜드는 브랜딩이다. 단지 개인보다 기업이 사용하는 미디어가 다양하기 때문에 우리는 다르게 생각한다. 하지만 이 역시도 요즘은 의미가 없어진다. 개인과 기업 모두 다양한 매체를 사용하고 그 경계가 모호하다. SNS, 유튜브, 각종 플랫폼을 통해 모든 정보와 이미지는 기하급수적으로 퍼진다. 그 속도만큼 사그라드는 속도 역시 빠르다. 그 속도를 확인하는 방법은 유튜브에 접속해서 누적 조회 수를 보면 된다.
브랜드가 생활을 지배하는 시대다. 각자 추구하는 라이프스타일은 다르지만 그 안에서 자신을 대표할 수 있는 라이프스타일 브랜드를 누구나 하나씩 가졌다. 나 같은 경우는 발뮤다다. 발뮤다 에어 엔진과 가습기는 1년 내내 내 방에서 나의 숙면을 돕는다. 이 글을 쓰는 지금도 가습기는 열심히 습도를 유지하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판매보다는 제안과 경험이 더 유효한 시대. 이 같은 시대에 개인은 자신을 나타낼 ‘잇 아이템’이 필요하다. ‘아날로그 감성’이 담긴 옛 물건은 그 역할을 하기 위해 가장 알맞다.
밀레니얼 세대는 인터넷 기술부터 스마트폰까지의 변화뿐 아니라 그에 연관한 통신 기술, 미디어, 플랫폼이 성장하는 과정을 모두 경험했다. Z세대는 또 다르다. 그들은 태어날 때부터 스마트폰이 대중화되고 인터넷 기술이 정착한 뒤 태어난 세대다. 밀레니얼 시대는 델몬트 유리병, 서주우유 컵, 아폴론, 자개 서랍장을 어릴 때 보고 경험했다. 반면 Z세대는 델몬트보다 DOLE, 선키스트, 미닛메이드를 더 잘 알지 않을까?
‘빈티지’라 부르는 옛 물건들. 그 물건이 처음 세상에 선보인 시대를 살지 못한 이들에게 빈티지는 새로운 아름다움이다. 동시에 지금 시대에 맞추어 새롭게 변한다. 자개장롱이 벽 디자인으로 다시 태어나는 이유는 이런 맥락에서다. 결핍! 경험하지 못한 결핍은 유행의 씨앗이다.
나는 초등학교 때 사 먹은 서주우유와 그 컵, 보리차를 담았던 델몬트 유리병이 주목받는 모습을 보면서 신기했다. 1990년대 유년 시절을 지낸 나에게 델몬트 유리병, 자개장, 서주우유 컵, 서울우유 머그잔은 자연스러운 물건이었다. 지금 20대에게 핫한 물건인 델몬트 유리병. 고작 10년 차이지만 세대마다 보는 미학의 기준이 다르다는 사실은 신기하고 놀랍다.
미학은 세상에 존재하는 다양함을 소화하게 돕는 근육을 만든다. 지금 시대를 이끄는 아름다움을 찾는 일이 미학이다. 또한 미학은 세상 속 단편적인 조각들을 이어 붙이는 접착제 역할도 한다. 나라마다 문화는 달라도 공통으로 추구하는 아름다움을 포착하면 다양성 속에서 통일성을 발견할 수 있다. 더 세밀하게 사물을 볼 수 있도록 도와준다.
미학은 생각의 담금질이다. 담금질을 위해 필요한 숫돌에 더 가깝다. 칼을 숫돌에 갈면 칼날은 더 세밀해진다. 생각의 결을 세밀하게 만드는 도구 그것이 미학이다. 나는 미학의 개념사, 이론을 이 글에서 논할 생각은 없다. 나보다 더 훌륭한 분이 많다. 또한 시중에 좋은 책도 많다. 내가 미학을 통해 보고자 하는 바는 이 시대를 이끄는 아름다움인 브랜드다.
기획, 브랜드, 디자인을 단순한 도구로 본다면 기술적인 부분만 보는 거다. ‘아름다움’이라는 관점에서 브랜드를 보기 시작하면 지금 시대 우리가 어떻게 사는지 더 자세히 관찰할 수 있으리라 믿는다.
“Less is more”
미스 반 데어 로에가 말한 이 말은 현대 디자인을 관통하는 슬로건이다. 디터 람스는 이 말에 디테일을 더했다. 브랜드 홍수 속에서 사람들은 ‘만든다’가 아닌 ‘고르다’에 집중한다. 개인마다 고르는 능력 즉 편집력이 시대의 중심으로 떠오르는 건 당연하다. 하지만 너무 많은 선택에서 우리에게 더 필요한 건 ‘더 적은 선택’을 해야 한다. 자신의 선택을 더하기보다는 빼는 것은 우리 모두가 취해야 할 필수적 덕목이다.
무인양품같이 많은 이들이 선호하는 좋은 디자인을 만드는 일은 자신 혹은 브랜드를 명확하게 표현하는 일이다. 브랜드 미학은 제품, 이미지, 슬로건에 녹아들어 간다. 브랜드가 추구하는 바를 표현하는 일. 나이키는 “JUST DO IT”이 문구 하나로 자신을 표현한다.
하지만 브랜드는 이미지 혹은 슬로건에 자신들을 한정하지 않는다. 브랜드가 궁극적으로 원하는 목표는 브랜드를 보고, 느끼고 만지는 모든 부분이 사람들의 라이프스타일이 되는 일이다. 디즈니랜드에 가서 사람들은 디즈니가 만든 동화의 세계로 빠져든다. 유니버설 스튜디오 안 해리포터관에 가기 위해 사람들은 교복까지 챙겨간다.
사람들은 아마존 에코와 알렉사를 통해서 물건과 음식을 주문하고 음악을 듣고 전자기기를 작동시킨다. 아마존은 매년 더 사람들 삶의 필수적인 존재가 된다. 브랜드가 물건의 품질을 보증하던 시대는 끝났다. 이제 브랜드는 삶 그 자체로 이미지를 확장한다.
모든 브랜드는 아름다움을 추구한다. 20세기 초만 해도 ‘아름답다’는 누군가 제시하는 개념이었다. 19세기 말까지만 해도 프랑스에서 ‘아름다움’은 살롱전이 제시했다. 살롱전의 심사위원들이 인정하는 그림만이 예술이었다. 그 범위를 벗어나는 그림들은 예술이 아니었다.
살롱전을 주최하는 에꼴드 보자르는 아름다움을 제시하고 만들고 통제했다. ‘그리스 신화, 역사, 성경 교리, ‘를 비롯한 주제만이 살롱전을 통과할 수 있었다. 푸생이 기틀을 닦은 ‘묘사’에 치중하는 그림만이 예술로 여겨졌다. 살롱전이 생각하는 예술은 새로운 예술의 탄생을 옥죄는 사슬이었다.
산업혁명을 통해 이미 사람들이 마주하는 삶은 변했다. 촛불은 가스등으로 수공업품은 대량생산 물품으로 바뀌었다. 초상화는 사진으로 말은 기차로 바뀌었다. 사람들은 기차를 타고 교외로 여행을 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예술만 변하지 않았고 변하려고 하지 않았다. 아프리카와 일본 물품들이 파리에 들어오고 일본의 물건이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그래도 살롱전은 견고했다. 곤조를 지키면서 자신들만의 기준만이 아름다움이라는 타성에 빠졌다. 사람들은 산업혁명이라는 시대변화에 적응했지만 예술은 산업혁명만큼 빠르게 시대에 적응하지 않았다. 구스타브 쿠르베나 오노레 도미에의 그림과 판화는 아름다움이 아닌 시대상을 반영했다. 예술이 추구해야 할 길은 ‘이상적인 아름다움’이 아닌 ‘현실에 기반한 삶’을 다루어야 한다는 새로운 흐름을 제시했다.
에두아르 마네를 비롯한 인상주의자 미술가들은 기존의 예술에 도전했다. 조롱과 비아냥 속에서도 그들은 묵묵하게 자신들의 길을 개척했다. 폴 세잔, 고흐, 고갱, 클림프, 피카소 등 새로움을 추구하는 예술가들은 서로 모여서 새로운 예술의 개념을 만들고자 노력했다. 지금 미술 경매에서 고가에 낙찰되는 그림, 사람들이 사랑하는 그림은 단순히 멋진 그림이 아니다. 당시 예술의 변화를 끌어낸 도전의 산물이다.
그들이 노력하지 않았다면 우리가 지금 생각하는 예술과 아름다움에서 시작한 자유는 더뎠을 것이다. 자신만의 느낌, 자연의 변화, 생각의 묘사, 새로운 시야의 표현은 지금 시대에 개개인이 만들고자 하는 라이프스타일의 주춧돌이다. 그러기에 각자가 개성’을 추구하는 일이 응당 당연한 일이다.
개성을 추구한다는 말은 자신의 정체성을 온전하게 추구하는 말이다. 기업 입장에서는 하나의 브랜드가 브랜드만의 개성을 갖는다는 말이다. 무인양품만 보아도 무인양품 그 자체가 브랜드 정체성이다. 드론을 일상생활로 만들고 새로운 영상기술로 다듬은 DJI, 가구산업 판도를 바꾼 이케아.
브랜드와 미술, 스타일을 각각 다르게 생각하면 오산이다. 모든 건 연결되어있다. 단지 우리가 모를 뿐이다. 불과 100년 전만 해도 아름다움이라는 개념은 폐쇄적이었다. 하지만 지금 시대에 아름다움은 하루가 다르게 변한다. 오늘 이상하다고 여긴 무언가가 내일에는 아름다움이 된다.
브랜딩: 브랜드만의 아름다움을 만드는 담금질
브랜드는 자신들을 연상케 하는 색이나 그림을 상품, 디자인, UI, UX에 모두 반영한다. 코카콜라는 빨간색, 챔피언스리스는 별, 애플은 사과, 무인양품은 서체, 에어비앤비는 여행, 아마존은 삶 그 자체다. 브랜드는 사람들이 바로 자신들을 항상 먼저 생각하게 만들기 위해서 다양한 매체를 사용하고 지극정성을 쏟는다(우리는 이걸 마케팅이라고 부른다).
사람들이 자사 브랜드에 열광하는 일은 모든 브랜드가 원하는 결과이자 숙원이다. 자사의 브랜드를 사람들이 아름답고 멋지게 받아들이는 모습. 브랜드 미학이 사람들 속에 담기기를 원하는 마음. 브랜드는 사람들이 오로지 자신만을 사랑해주기를 원한다. 다른 브랜드를 사랑하는 일은 용납하지 않는다. 오늘도 모든 미디어와 스마트폰을 통해 각종 광고를 쏟아내며 사람들의 마음이 떠나지 않게 끊임없이 구애한다.
좋아요, 공유 수, 댓글, 팔로워, 월별 접속 시간, 재구독률은 사람들이 브랜드에 얼마큼 반응하는지 가늠하는 기준이다. 이 기준은 기업과 개인을 나누는 경계를 점차 모호하게 만들었다. 이제 SNS 인플루엔서가 벌어들이는 광고 수익은 규모 있는 기업에 버금가는 수준이다. 브랜드가 된다는 말은 막강한 영향력과 부를 가지는 지름길임을 의미한다. 이제는 영향력이 가장 큰 권력이다.
브랜드가 디테일을 추구하는 자세는 아름다움이 일상화된 시대에 차별화를 두기 위함이다. 그렇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으니까. 일본 기획이 한국에서 유독 주목을 받는 이유는 당연한 결과이기도 하다. 일본만큼 디테일로 차별화를 잘하는 민족이 없다. 미학은 언제나 시대정신을 설명하는 길잡이다. 발터 벤야민이 이야기한 아우라. 그는 말했다.
원본은 끊임없이 복제되어 사람들에게 퍼지지만, 그럴수록 원본에 대한 사람들의 갈망은 커진다.
SNS에서 나오는 음식을 너도 나도 인증 사진을 찍고 해시태그를 넣어서 포스팅하는 일은 발터 벤야민이 말한 아우라의 교과서다. 아우라! 수능에도 나온 그의 말은 현대 시대를 관통하는 핵심 메시지다.
브랜딩은 브랜드가 추구하는 미의식을 표현하는 방식이다
서로 다른 브랜드 간 협업 시 반드시 놓치지 말아야 할 부분이 ‘상대방이 추구하는 아름다움’이다. 협업하는 이유는 상대방이 추구하는 아름다움의 교점을 찾기 위함이다. 이 과정이 좋을수록 브랜드 간 협업이 신선한 결과물을 만든다. 혹은 다른 분야의 브랜드이지만 추구하는 아름다움이 같다면 더 깊이 있는 결과물이 나오기도 한다.
과거에는 특정계층이 시대의 아름다움을 다수에게 제시했다. 예를 들어 바로크 미술 속 기독교 그림은 르네상스 시기와 다르게 빛의 대비가 크다. 또한 그림 안에서 인물 혹은 상황 묘사가 극적이다. 이 같은 이유는 바로크 미술 화가들이 의도한 바가 아니다. 루터의 종교개혁 이후 수세에 몰린 가톨릭은 당시 사람들에게 교리를 더 극적으로 전하기 위해서 극적인 묘사가 들어간 그림을 그리도록 주문한 영향이 크다.
2019년 지금은 개인과 기업이 자발적으로 새로운 아름다움을 만든다. 아름다움이라는 말이 진부하다? 하지만 우리는 개인과 기업이 만드는 아름다움을 다른 말로 바꿔서 표현한다. ‘핵인싸’ ‘인정 각”뉴트로’ ‘오지고 지린다’ 등 사람들이 무엇을 보고 멋지다는 사실을 표현하는 단어나 유행어들이 모두 아름다움에 들어간다. 끊임없이 멋지거나 혹은 아름다움을 표현하는 신박한 표현 등이 등장한다. 인류 역사에서 이런 시대는 없었다.
우리는 미학이 눈에 보이는 아름다움에만 초점을 맞춘다고 생각한다. 아름다움을 단순하게 분석하는 일이 낯설기에 사람들은 미학을 학자들만의 전유물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는 잘못된 생각이다. 유튜브에 들어가면 사람들은 리뷰 영상을 올린다. 누군가 올리라고 강요하지도 않았다. 리뷰라는 단어 자체가 내가 어떤 물건, 서비스, 경험을 평가하는 행동이다. 그 안에는 다양한 평가들이 나온다. 그 평가는 결국 두 가지로 귀결된다.
좋냐? 나쁘냐?
결국 아름답냐? 혹은 추하냐? 와 다를 바가 없다. 우리가 아름답다고 여기는 모든 부분은 이미 일상생활에 깊숙이 자리 잡고 있다. 내가 사용하는 어플 중 ‘오늘의 집’이라는 어플이 있다. 집안 인테리어를 소개하고 관련 물건도 판매하는 애플리케이션이다. 매일 그날 화제인 디자인에 대해서 푸시 알림이 온다. 푸시를 보고 디자인을 본다.
이야, 멋지네. 이건 캡처해두자!
이 아이템을 이렇게도 활용하는구나.
이 같은 표현은 이미 내가 디자인을 보고 아름다움을 느끼기에 말하는 거다. 그릇에서 시작해서 주택까지 일상에서 우리가 당연하게 여기는 모든 부분을 주목하자. 아름다움은 보이지 않게 시대마다 사람들의 기준에 부합해 변화해왔다.
지금 시대에 우리가 특정 브랜드의 제품을 선호하고 신뢰하는 일은 그 브랜드가 추구하는 미학에 공감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이 제시하는 스타일을 우리가 받아들인다. 리셀러, 중국인, 봇 때문에 구하기 너무 어려운 에어 조던 1. 매장에서 캠핑을 하고 웃돈을 주고 그 신발을 사는 이유는 그 신발 속에 담긴 스타일을 나 자신이 흠모하기 때문이다.
‘어디 제품이 좋다’고 사람들에게 추천하거나 추천하지 않는 행동은 그 제품에서 본 미학을 우리가 공유하거나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브랜드가 일관성을 가져야 하는 이유는 결국 브랜드 미학을 유지하기 위함이다. ‘-다움’ ‘-사람’ 같은 수식어를 브랜드가 추구하는 일은 개인이 자신만의 스타일을 추구하는 일과 다를 바가 없다.
애플은 항상 혁신이라는 추상적 단어를 합리적 가격과 기능으로 선보였다. 하지만 과거와 다르게 감성만 자극하는 마케팅, 얄팍한 상술, 합리적이지 않은 고객 서비스, 제품 가격은 과거 애플이 자신이 보여준 미학을 스스로 지우고 있다. 최근 40%나 폭락한 애플의 주가는 브랜드 미학을 잃어가는 그들이 마주한 냉정한 현실이다. 최근 애플이 금융, 뉴스, 게임 구독을 비롯한 콘텐츠 사업을 발표한 것도 브랜드 미학을 빠르게 회복하기 위한 시도 중 하나다.
미학은 세계관이라고 말할 수 있다. 동시에 일상을 지탱하는 뿌리다. 우리가 ‘아름다움을 지향하는 태도는 무엇일까?’에 더 집중할 때, 브랜드가 지배하는 이 세계를 더 상세하게 볼 수 있을 거라 믿는다. 그 상세함 속에 자리한 자신의 라이프스타일은 덤이다.
원문: 조성은의 브런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