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불순한 의도나 악의가 있어서가 아니다. 의식하지 않으면 깨닫기 어려울 정도로 고착화된 성 역할과 편견이 너무 오랫동안 몸에 밴 탓이다. 21세기에도 여성창업자들은 투자자들 앞에서 종종 이런 말을 듣는다.
엄마가 창업을 하면 애는 누가 돌보나요?”
“임신은 CEO의 최대 리스크입니다.”
“대표는 카리스마가 필요한데, 부드러운 이미지로 잘 헤쳐 나갈 수 있을까요?”
심지어 한 결혼정보 회사 광고에는 이런 문구가 버젓이 등장한다.
취업 못하면 어때? 시집 잘 가면 되지.
그래서 여성창업가들은 말한다. 성별을 떠나 개인의 고유성에 집중해 달라고.
젠더 관점 투자, 기울어진 운동장의 기울기를 낮추다
소셜벤처 전문 투자사인 에스오피오오엔지(SOPOONG, 이하 소풍)는 이달 2019년 상반기 정기 투자 기업을 확정 발표했다. 최종 선발된 기업 4개 중 절반인 두 곳의 대표가 여성이다. ‘빌라선샤인’ 홍진아 대표와 ‘실버문’의 조남희 대표다. 빌라선샤인의 경우 사업모델도 일하는 밀레니얼 세대 여성들이 겪는 유리천장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오프라인 중심 커뮤니티 서비스다.
고영곤 소풍 PR 매니저는 “최근 여성 지원자들이 크게 늘어났고 남녀를 불문하고 여성 관련 서비스와 상품을 만드는 기업들이 문을 두드리는 사례도 증가했다”고 말했다. 이 같은 현상은 소풍이 1년 전부터 시행하고 있는 젠더 관점의 투자와 무관하지 않다.
젠더(Gender)란 생물학적 성별과 구별되는 사회적인 성을 말하며, 사회가 요구하는 남녀의 역할이나 태도·이미지·기대 등을 말한다. 소풍은 창업과 투자 환경이 여성을 비롯한 소수자들에게 차별적이라는 문제점을 인지하고 2018년부터 젠더 관점의 투자를 전면 적용했다.
여성이든 남성이든 창업가의 성별에 따른 편견을 극복하고 투자 기회가 골고루 돌아갈 수 있도록 심사 기준과 과정을 보완한 것이다. 그 결과 1년이 지난 지금 소풍이 투자한 42개 기업 중 여성 대표자의 비율은 1년 전 23%에 비해 33%로 증가했다. 소풍의 임직원 중 여성의 비율도 43%에서 50%로 소폭 성장했다.
2018년 「젠더 안경을 쓰고 본 기울어진 투자 운동장」이란 보고서 발간과 확산을 맡은 유보미 소풍 심사역은 “ 젠더 관점의 투자라고 해서 여성 창업가의 손을 무조건 들어주자는 의미는 아니다”라고 설명했다.
현재의 상황은 여성 창업가에게 덧씌워진 ‘편견’이 많고, 의식하지 않고 보면 기울어진 운동장이란 걸 알기 어렵습니다. 이 때문에 우리가 놓쳤을 수 많은 여성 창업가들을 더 이상 놓치지 말자는 의미가 더 큽니다.”
그는 가장 흔한 편견으로 “ 여성은 리더십이 없고 체력이 좋지 못하다든지, 기술 전문성이 떨어지고 성과를 빨리 내지 못한다는 것 등”이라고 덧붙였다.
민간 자본 100% 여성창업가를 위한 펀드 국내 첫 출시
임팩트 투자사 옐로우독은 지난 12월 민간 자본 100%로 구성된 여성창업가들을 위한 펀드를 출시했다. ‘옐로우독 힘을싣다 투자조합’이 그것이다. 유망한 초기 여성 창업가들을 발굴해 투자하는 이 펀드에는 여성 창업가 선배들도 많이 동참했다.
벤처 투자라는 것이 정보가 쉽게 공개되거나 접근하기 쉬운 곳이 아니다 보니, 상대적으로 소수인 여성들은 네트워크나 채널 진입에 어려움을 겪습니다. 펀드에는 여성창업가분들도 큰 힘을 실어주셨는데 아무래도 선배 세대들이 더 어려우셨을 테니까 도움을 주고 싶다는 마음이 컸다고 봅니다.
여성 창업자들의 자본 접근성을 높이기 위해 설립된 이 펀드는 사회적으로도 의미 있는 일이지만 경제적으로도 좋은 수익률을 거둘 수 있다는 걸 보여주는 것이 우리의 역할이라고 생각합니다.” – 제현주 옐로우독 대표
‘옐로우독 힘을싣다 투자조합’이 투자한 첫 번째 기업은 푸드테크 스타트업인 ‘지구인컴퍼니’다. 식품 R&D를 바탕으로 못생긴 농산물을 활용한 건강 간편식과 대체 고기를 개발하는 스타트업이다.
제 대표는 “ 지구인컴퍼니는 버려진 농산물을 활용한다는 점과 식물성 대체 고기로 육류 소비가 만들어내는 건강과 환경적 문제를 해소하는 사회적 가치가 뚜렷하면서도 시장성 가치도 높은 기업”이라고 투자 이유를 설명했다.
지구인컴퍼니가 만든 식물성 고기 이름은 ‘언리미트’다. 제한이 없는 고기란 뜻이다. 언리미트는 빠르면 이달 말 편의점과 카페 등지에서 만나볼 수 있다. 민금채 지구인컴퍼니 대표는 “도시락과 샌드위치, 소시지, 핫바, 만두 등 10여 가지의 상품 개발을 완료한 상태”라고 밝혔다.
우리는 대기업이 아니다 보니 한 번에 10가지 상품을 출시할 만큼 생산 자금력을 갖고 있지 못합니다. 이번에 투자 받은 자금은 이 상품들을 순차적으로 출시하기 위한 생산 자금으로 쓰일 계획입니다.”
그는 “투자를 받은 만큼 어깨가 무겁다”면서도 “ 앞서 개발된 해외의 임파서블 버거나 비욘드 미트와 견주어도 손색이 없다“고 자신감을 드러냈다. 푸드테크 시장은 빌 게이츠 마이크로소프트 창업자와 세르게이 브린 구글 공동창업자 등 거물급 투자자들이 관심을 보이면서 급속히 성장하고 있다.
젠더 격차 존재: 좁은 문 뚫고 나온 여성창업가 수익률 높아
경영 전략 컨설팅 회사인 보스턴컨설팅그룹(BCG)은 2018년 ‘왜 여성창업자가 운영하는 스타트업에 투자하는 게 더 나은가‘라는 제목의 보고서를 냈다.
실리콘밸리의 350개 스타트업을 분석한 결과 남성 창업가들이 투자를 받은 금액은 2배 이상 많지만 수익률은 여성창업가들이 오히려 10% 더 좋은 성과를 보였다고 전했다. 미국의 퍼스트라운드캐피털 역시 10년 투자 실적을 비교한 결과 여성창업 기업이 일반 기업보다 65%나 더 높은 투자 성과를 안겨줬다고 발표했다.
국내에서도 비슷한 현상이 벌어진다. 홍지애 소풍 심사역은 “소풍이 투자하고 엑셀러레이팅을 지원한 여성창업가의 비율은 30%대이지만 후속 투자를 받는 비율은 50%에 이른다” 고 밝혔다.
이 같은 현상에 대해 제 대표는 “여성이 남성보다 사업능력이 더 뛰어나다고 말할 순 없다”고 전제한 뒤 “단지 일반적으로 상위 10%가 투자를 받을 수 있다면 여성들은 상위 2~3% 안에 들어야 투자를 받을 수 있는 현실이라 결과적으로 치열한 경쟁을 뚫고 살아남은 여성 창업가들의 성적이 좋은 패턴으로 나타나고 있다”고 분석했다.
여성창업가뿐 아니라 젠더 감수성이 뛰어난 기업들이 더 좋은 성과를 내고 있다는 보고서도 있다. 젠더 감수성이 뛰어나다는 것은 성별을 떠나 개인이 가진 고유성과 개별성을 존중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2017년 컨설팅 업체 맥킨지는 미국 내 젠더 다양성 상위 25%에 해당하는 기업의 경우 업계 중간치보다 높은 재무 수익을 얻을 확률이 15% 많다고 분석했다. 또 경영진 내 젠더 다양성이 10% 상승할 때마다 기업의 영업 마진이 1.6% 오른다고 발표했다.
투자 생태계 변해야 한다: 여성 파트너와 심사역 늘어나야
스타트업 전문 미디어 플래텀에 따르면 2018년 총 32곳의 여성 창업 기업이 합계 1,480억 원 규모의 투자를 유치한 것으로 조사됐다. 이는 전체 투자 유치액의 5.3%를 차지한다.
여성창업가들에게 이처럼 문턱이 높은 이유 중 하나는, 투자 결정 권한을 쥐고 있는 대표 파트너와 여성 심사역이 턱없이 적은 점이 주요 요인으로 꼽힌다.
현재 국내 여성 심사역은 약 9% 내외로 추정되며, 이 숫자는 의사결정자 수로 가면 훨씬 줄어든다. 국내 130여 개 VC중 여성 대표 파트너가 있는 투자 기관은 4곳에 불과해 투자 유치 과정에서 여성 투자자를 만날 가능성은 매우 낮다.
홍지애 심사역은 “여성을 위한 제품이나 서비스를 제공하는 여성창업가들은 특히 남성 중심의 투자사들로부터 쉽게 공감을 얻어내기 힘들어 투자 순위에서 밀려나기 쉽다” 지적했다.
한 예로, 여성들이라면 생리 때문에 큰 고통을 겪고 있다는 문제의식을 갖고 있습니다. 하지만 안전한 생리대와 월경 문화를 남성들이 이해하는 데는 한계가 있죠. 여러 가지 투자 옵션이 있는 상황이라면 공감을 얻기 어려운 아이템들은 우선순위에서 밀리거나 아예 배제되기 쉽습니다.”
이에 반해 여성 파트너의 존재만으로도 젠더 편향적인 인식이 완화돼 여성 창업가가 투자받을 확률은 3배 이상 높아진다는 통계가 있다. 실제 여성이 대표 파트너로 있는 옐로우독의 경우 투자한 기업 14곳 중 5곳이 여성 창업자들로 평균보다 3배 이상 높다.
홍 심사역은 “젠더 감수성을 높이려는 노력은 창업가와 투자 기관 그리고 소비자 모두에게 필요하다”면서 “지금은 기울어진 운동장을 바로잡기 위해 여성창업자의 자본 접근성을 높이는데 주력하고 있지만 궁극적으로는 여성이든 남성이든 성 역할에 갇히지 않고 다양성을 유지하는 것이 젠더 관점 투자의 본질”이라고 설명했다.
더 보기: 여성은 기술 산업에 약하다고? 과학 기술로 승부를 건 여성들
흔히 투자자들이 은연중에 갖게 되는 편견 중 하나가 여성창업자들은 기술에 약하다는 것이다. 과연 그럴까? 숫자가 절대적으로 적다는 건 맞다. 그러나 이를 능력과 결부시키는 건 큰 과오다. 최근 투자사들로부터 잇단 러브콜을 받고 있는 기술 기반 여성창업가들이 이를 증명한다.
‘에누마'(Enuma)는 엔씨소프트의 게임 기획자이던 이수인 대표가 같은 회사 개발자이던 남편과 2012년 미국 캘리포니아 버클리에서 창업한 스타트업이다.
신체적 장애나 사회·문화·지리적 여건으로 학습이 어려운 아이들에게 효과적인 디지털 기술 솔루션을 제공한다. 대표 서비스가 4세~8세 아이들이 놀이처럼 즐겁게 수학을 배울 수 있는 모바일앱 ‘‘토도매스(Todomath)’이다.
토도매스는 미국 내 1300여 초등학교와 전 세계 150개국에서 8개 언어로 서비스 중이며 애플 앱스토어에서 누적 500만 다운로드 이상을 기록한 교육 분야 베스트셀러이다.
친환경 플라스틱 원료와 산화 생분해를 유도하는 첨가제를 개발하는 친환경 소재 전문 기업이다.
테코플러스는 석유 추출을 통한 플라스틱 원료 사용을 줄이는 대신 폐종이, 왕겨, 코코넛 껍질과 같은 바이오매스를 등을 활용한 친환경 플라스틱 원료를 생산한다. 이는 석유 자원 사용량과 이산화탄소 발생량을 50%까지 줄이는 효과를 가져온다. 또한 복합 생분해 첨가제의 경우, 기존 제품 대비 4배 이상 빠른 분해 속도를 자랑한다.
소리를 보는 통로(소보로)는 음성언어를 문자화하는 기술 (STT, Speech to Text)을 활용해 소통의 접근성과 장벽을 낮추려는 미션을 갖고 있다. 소보로는 같은 이름의 인공지능 문자 통역 서비스를 개발해 운영 중이며 전화 통화나 학교 수업, 세미나, 병원 진료상담, 인터넷 강의에도 활용할 수 있다. 한국어뿐만 아니라 영어, 중국어, 일본어 등 외국어 설정이 가능해 외국어를 자막으로 볼 수 있다.
특히 기존 통역 지원 서비스의 비용이 부담됐던 청각장애인에게 저렴한 비용으로 실시간 자막을 제공해 좋은 반응을 얻고 있다. 현재 국립특수교육원, 서울애화학교, 청음복지관, 한국장애인고용공단 등을 포함하여 총 18곳의 교육기관・일반기관에서 사용하고 있다.
원문: 이로운넷 / 글: 백선기 이로운넷 책임에디터 / 사진제공: 에스피오오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