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라노스와 엘리자베스 홈즈가 망한 지도 꽤 되었지만, 홈즈 폭망의 계기가 된 WSJ 탐사기사의 장본인인 존 카리유(John Carreyrou)의 『배드 블러드(Bad Blood)』는 며칠 전에 읽기 시작했습니다. 원래 상당히 게으른 닝겐인지라 통독하는 경우가 드문데 한 번도 쉬지 않고 스트레이트로 끝을 보았죠. 최근 몇 년 내에 읽은 책 중 가장 재미있었습니다. 내용은 다 아실 만한 분은 아실 테고, 몇 가지 ‘사짜 감별’에 시사하는 바가 있어서 적어봅니다.
1. 많은 사람을 속이기 위해서는 본인 자신부터 속여야 한다
사실 진짜로 큰 사짜가 되기 위해서는 자신이 남을 속인다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무의식중에 얼굴에 다 드러나기 마련이죠. 대개의 성공한 사짜는 자신이 남을 속인다고 생각하면서 사람을 속이지 않습니다. 즉, 자신은 자신이 어떤 고귀한 이상을 추구하기 위해서 ‘물불을 가리지 않고 전진하며’ 다만 그 과정 중에서 약간의 ‘지름길’을 걷는다고 생각할 뿐이죠.
이 책의 메인 빌런인 홈즈와 홈즈 남친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홈즈 자신은 지금도 자기가 의도적으로 ‘속인’ 것은 없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자기가 한 말에 책임지는 행동을 보이는 것이며, 결과물을 내지 못한다면 결국 사짜가 되는 것이죠. 그러기 위해서는 자신이 하는 말의 실현 가능성을 끊임없이 의심할 필요가 있으며, 만약 스스로 그렇지 못한다면 옆에서 그런 이야기를 해주는 악마의 변호사(Devil’s advocate), 즉 선의의 비판자를 둘 필요가 있습니다.
문제는 이 책을 읽어보면 아시겠지만 홈즈는 회사의 문제에 대해서 직언을 하는 직원에 대해서는 ‘너님 해고’로 응답했지요. 한 번도 부정적인 이야기에 개선해보려고 시도하지 않았습니다. 자기 자신에 대한 지나친 확신… 사업을 하려면 어느 정도는 필요한 요소겠지만 뭐 그래도 남이 해주는 충언은 들어야… 아무튼 자신에 대한 비판에 대해서 거의 무조건적으로 거르거나 앙심을 가지는 사람을 발견한다면 주의할 필요가 있습니다.
2. 자격 요건
홈즈가 사짜로 판명되기 전, 실리콘밸리의 유니콘으로 떠오르면서 알았을 때 그의 이력을 보고 ‘아 저거는 제대로 작동하지 않겠구나’ 직감했습니다. 사실 200개의 질병을 그것도 피 한 방울로 진단한다는, 아무도 이룩하지 못하던 것을 학부 중퇴생이 개발한다는 것 자체가 가능성이 없으니까요. 물론 ‘전문가를 고용해서 하면 되지 않느냐?’고 생각할 수 있겠습니다. 책을 읽다 보면 홈즈도 애초에 회사를 창업할 때 자신이 학부 시절 연구하던 연구실의 박사와 함께 창업했고, 수많은 전문가를 고용했으니까요.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역시 최종 결정을 내리는 사람의 수준 문제입니다. 책을 읽어보면 결국 기존에 개발되어 있던 온갖 검사법을 피 한 방울이라는 스케일로, 그리고 수십 종류의 검사를 기계 하나로 한다는 것이 얼마나 공학적으로 어려운 문제인지 잘 보여줍니다. 즉 이론적으로는 간단해보이는 일이지만 실제로 구현하려면 엄청난 시간과 노력이 걸리는 일이죠.
그러나 홈즈는 고작 학부 시절, 그것도 1학년 끝나고 몇 달 정도 실험실 생활을 해본 정도의 경험밖에 없고, 연구를 성공에서 실패까지 해본 경험 자체가 없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프로토타입과 양산의 차이점에 대한 개념도 부재했죠. 즉 100번 해서 3-4번 작동하면 되는 프로토타입과 100번 시도하면 97-98번은 되어야 겨우 양산이 가능할까 말까 하는 양산과의 차이는 마리아나 해구와 에베레스트산 정상까지의 차이와 비견될 만한 차이인데, 이것의 차이를 아예 모르는 사람이었던 셈이죠.
개발의 기술적 문제가 있다고 하는 개발자들에게 주 7일 24시간으로 개발하면 되지 않느냐라고 말하는 수준이니 뭐… 그래서 기술진들이 이거 안 된다 하면 ‘너님 해고’ 한 뒤 새로운 사람 고용하고, 오래 걸린다 하면 ‘너님 노력이 부족하셈’ 하고 해고의 반복.
결국은 기술적인 결정을 내릴 역량이 전혀 안 되는 닝겐이 그런 위치에 오게 된 것 자체가 근본적인 문제겠지요. 결국 바이오메디컬 분야에서 학부 중퇴생 따위가 사업을 벌이는 것은 ‘Hello World’도 못 짜는 IT 회사 CTO와 거의 비슷한 이야기라는 것을 입증한 것이 되겠습니다. 사람을 갈아 넣으면 되는 분야와 잘 안 되는 분야가 있습니다 사장님.
3. 적 만들기
사실 능력이 없으면 적이라도 만들지 말아야 하는데, 홈즈와 그 남친은 회사를 운영하며 무수하게 많은 적을 만들었습니다. 사람이 들어왔다 나갔다를 반복하는 것이 실리콘밸리 테크기업의 일상이라지만 이 책에서 묘사된 테라노스는 유별나죠.
거의 모든 등장인물이 처음에는 홈즈의 말발에 껌뻑 죽어서 들어옴 → 회사 어 이거 아닌데 깨닫기 시작 → 홈즈에게 직언 → 님 팀 플레이어가 아닌데? 하고 회사에서 고립됨 → 그러다가 잘리거나 빤쓰런… 이런 과정이 반복됩니다. 즉 외부에 비치는 이미지와 내부의 마치 헬조선 악덕 기업주 빰따귀 돌리는 사이코패스급의 모습이 너무나 다르다 보니 절로 많은 안티를 생산하죠. 이들이 결국 나중에 홈즈의 몰락을 자초합니다.
그리고 미국에서 가장 유명한 변호사라는 데이비드 보이스 로펌을 고용해 불만을 가진 직원 및 안 좋은 보도를 하려는 WSJ를 압박하는 모습에 와서는 할말하않… 이런 것을 보면 뭐 천조국이라는 동네도 다 똑같은 막장인데 그저 뺑끼칠을 그럴싸하게 해놓은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고…
모르긴 몰라도 홈즈는 이 책의 빌런 오브 빌런인 남친이자 COO였던 그 아재(이름이 기억 안 나네 여튼)만 아니었으면 이 정도 꼴은 나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뭐 하긴 이 아재가 없었더라면 애초에 이 정도의 명성을 얻지도 못했으려나? 아무튼 사장님 겨수님 등 고용주님들아… 차카게 삽시다. 당신이 지금 X밥이라고 생각해서 내쫓은 쪼랩 넘들이 모이고 모여서 당신의 등에 언젠가 칼을 꽂을 수도 있습니다.
4. 그래도 끝까지 막장이 안 된 것은
그래도 이 책을 읽고 아직 미국 사회가 최악의 막장은 아니라고 생각했던 것이 비록 홈즈와 거래하던 회사의 높은 양반들은 홈즈의 썰에 해까닥 넘어가는 경우가 많았지만 실무자들은 홈즈가 허당이라는 것을 애초에 간파했다는 것입니다. 문제는 그런 실무자들의 이야기를 홈즈와 거래하던 회사 윗대가리 상당수가 안 들었다는 것(…)
특히 재미있었던 에피소드는 홈즈가 제임스 매티스(트럼프 밑에서 국방장관하다가 나간 바로 그 미친개)에게 로비해서 아프가니스탄에 지네 기계를 들여놓으려고 할 때 실무자인 슈메이커 중령이라는 사람이 반대해서 무산되고, 빡친 매티스가 슈 중령을 불러서 깨려고 하지만 슈 중령이 논리적으로 설득해 결국 작동하지도 않고 인가도 받지 않은 기계가 전쟁터에 나가는 것을 막을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한국군으로 바꿔서 생각해보세요. 야전군 사령관 포 스타께서 직접 지시하신 사항을 국군의학연구소 연구실장 아무개 중령이 딴지 거는 것… 가능할까요? 결국 트황상이 등극해도 아직 안 망하는 것과 같은 것은 그동안 쌓아 올린 제도와 시스템 때문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홈즈와 테라노스의 막장성이 드러난 것도 회사에서 ‘제대로 해야 한다’고 주장하다가 잘린 후 그것을 미국 최고의 로펌이 압박하는 와중에서도 제보해 결국 테라노스의 몰락을 가져오는 동기를 만들게 된 많은 회사 전 직원들 덕이겠지요.
이 책을 읽으면 한국에서도 좀 뜨끔할 사람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읍읍 하긴 여기 나오는 홈즈와 비슷한 행태를 보여주는 사람들은 이 이야기 읽어도 자기 이야기인지 감도 못 잡겠지만… 어쨌든 이 책 번역이 늦게 나온 걸로 아는데 왜 이렇게 재미있는 책이 늦게 나왔죠? ‘아 우리 회사 이야기ㅋㅋㅋㅋㅋ’ 할 사람이 많아서 그런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