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 술자리에서 친구들과 꽤 했던 배틀이 있습니다. ‘내가 있던 부대가 더 빡세더라 경쟁’입니다. 군 생활을 두 번 이상 하지 않고서야 당연히 결판이 날 리 없습니다. 사회인이 되고는 또 다른 배틀이 술자리에서 벌어집니다. 바로 ‘이상한 관리자 배틀’입니다.
네, 대한민국 회사에는 무수히 많은 중간관리자가 있습니다. 이들은 팀장, 실장 등의 이름을 달고서 회사로부터 권한을 받아 우리에게 일을 시킵니다. 일을 많이 한다고 월급을 더 주는 게 아니고, 결과물에 대한 의견 충돌은 늘 있다 보니 팀장님들은 우리에게 빌런처럼 느껴집니다. 뭐,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것도 그들의 일이니까요.
하지만 살다 보면 정말 이상한 팀장도 볼 수 있습니다. 대한민국 직장인 모두 다양한 경험을 가지고 있을 텐데요. 오늘은 제 회사생활 속에 기억에 남는 몇몇 분을 적어볼까 합니다. 우리 상식을 벗어나지 않은 일반적인 빌런들은 제외합니다.
예를 들어 맨날 짜증만 내는 다혈질 팀장이라든가, 술 좋아해서 강제회식을 하는 팀장 등은 너무 흔해서요. 어디서나 볼 수 있는 그런 분들 제외하고 좀 더 고차원적이고 유니크한 빌런 팀장들을 기억해 봅니다.
1. 나무위키 사관 스타일의 백과사전 편찬 팀장.
한창 사업개발에 매진하던 시기, 매일 매일 사업 아이템 발굴에 여념이 없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우리 팀은 아직 아이템을 찾지 못해서 헤매고 있을 때였죠. 팀장은 좋은 분이어서 위에서 갈구는 걸 잘 막아주고 팀원들에게 여유를 주려 노력했습니다. 그 덕에, 또 미안한 마음에 더 열심히 아이템을 찾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옆 팀을 보면…항상 엄숙한 가운데서 일을 하고, 팀 회의도 엄숙하기 그지 없었습니다. 팀원간 화기애애한 대화라던가 논의는 찾아볼 수 없었죠. 이는, 근엄하기 이를데 없는 팀장님께서 매의 눈으로 팀원들을 보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사실 중학교 교장을 하시면 딱 맞을 법한 옆 팀 팀장님은, 승진시기를 놓쳐 동급 팀장들 중에서도 나이가 많으신 편이셨습니다. 뭐 외모나 나이야 그러려니 하지만 정작 팀원들을 지옥불 구덩이에 넣는 점은…보고서에 대한 끝없는 집착과 ‘내가 다 옳다’ 라는 굳건한 믿음이었죠.
당시 그 팀이 보던 아이템은 전자책 사업이었습니다. 당시 상황은 아이폰 이후 아이패드1이 막 해외에서 출시되던 때였습니다. 지금 생각해도 정말 좋은 아이템이었죠. 조직문화를 생각하면 절대로 해선 안 될 사업이었는지도 모릅니다만…
상식적으로 생각해 봤을 때, 보고서는 임원들까지 빨리빨리 올리고, 의사결정 받으면 바로 시장으로 달려나가야 했죠. 좋은 출판사와 작가를 모으고, 관련 App과 시스템을 개발하고…할 게 너무도 많았습니다.
그런데 이 바빠야 할 시국에 그 팀이 했던 것은 이른바 ‘전자책 백서 만들기’였습니다. 물론 제목은 ‘보고서’라고 쓰여 있었지만, A4 한장에 2페이지씩 나오게 해서 500장이 출력되는 보고서의 위용이란. 보고서를 하나로 엮기 위해 3공펀치가 동원되었으나 불가능하여 편철도구를 사오는 모습을 보며 당시 주니어였던 저는 많은 생각을 했습니다. 나무야 미안해…라고.
그 보고서에는 전자책의 모든 것이 담긴 듯했습니다. 전자책의 어원과 시조로 시작해서 제삼 세계 현황까지. 보고서를 출판하면 그게 더 돈이 될지 모르겠다는 생각을 여러 차례 했습니다. 처음부터 보고서 양식을 PPT가 아닌 워드로 했던 이유도 알 것 같았죠. 더 소름 돋는 것은, 제가 본 버전도 최종이 아니었고 파일명 뒤의 ver 숫자는 계속 올라가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딱 봐도 고통스러워 보여서 그쪽 팀원들과 이야기를 꽤 해 봤으나 돌아오는 것은 ‘소통의 부재’로 인한 비극의 현장 목격담이었습니다. 일단 팀장님은 본인이 참 옳았고, 그랬기 때문에 임원들에게 보고가 올라갔을 때 빈틈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셨죠. 또한 본인도 알아야 했으니 보고서의 분량은 점점 더 커져만 갔습니다.
사실 이 부분이 가장 큽니다. 팀장 본인이 몰라서 팀원들을 통해 학습을 할 순 있으나 그 모든 내용이 보고서화 된다면 팀원들은 결국 팀장 학습자료 제작에 매진하는 모양새가 되니까요.
저는 얼마 뒤 다른 부서로 이동해서 그 팀의 뒷이야기는 나중에 들을 수 있었습니다. 다소 늦게 시장에 출시한 사업은 고전을 거듭하다가 조용히 사라졌습니다. 그 팀장님도 지금은 퇴직하신 것으로 알고요. 아마 회사 창고 어딘가에 그때 편찬한 백서가 있을겁니다. 그 시간과 노력과 종이의 대가는 어디로 간 것인지… 문득 궁금해 집니다.
2. 덕업 일치는 팀원과 함께 이룬다. 캠핑 빌런.
직장생활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트랜드로 캠핑이 떠올랐습니다. 그러기를 4~5년. 이제 캠핑도 꽤나 대중화가 되었을 시점이었습니다. 그때 그 팀장님을 만났습니다.
프로젝트성 업무로 잠시 모시게 된 팀장님이셨는데, 평소에도 산을 사랑하셨다는 그분은 정말로 진정 캠핑을 위해 사시는 듯한 분이셨습니다. 캠핑에 재미를 붙이시고 차를 픽업트럭으로 바꿨다 합니다. 그리고 매 주말 전국의 캠핑 명소를 다니신다고 했습니다.
개인의 취향은 존중해야 마땅합니다. 그냥 그런가 보다 생각하고 있던 중 팀장님이 팀 워크샵 이야기를 꺼내셨습니다. 그분의 취미를 잘 알고 있던 팀원들은 예의상 “캠핑은 어떠냐” 라는 말을 꺼냈습니다. 네, 정말 예의상이었습니다. 그때 저희 팀원들은 잘 몰랐죠. 세상에는 굳이 차리지 않아도 되는 예의가 있다는 것을요.
팀 행사로 1박 2일 캠핑을 하러 가기로 결정되자, 당장 진행담당자가 정해졌습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분위기는 나쁘지 않았습니다. 놀러 가는 건데 뭐 심각할 게 있겠어요. 그런데 팀장님이 업무보다 캠핑을 더 챙기기 시작하면서 사태는 예상외로 흘러갑니다. 캠핑이 팀 내 최우선, 최중요 과제가 되었죠.
보통 메일 본문 정도로 개요를 공유하면 되었을 워크숍 계획이, 공식 기안문서까지 쓰게 되자 다들 뭔가 이건 잘못되었다고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문서에는 캠핑장까지의 이동 경로, 코스, 필요 물품 조달계획, 업무분장, 우천 시 Plan B, 비상시 행동요령까지 들어가기 시작했습니다. 담당자의 얼굴은 하얗게 질렸고 온갖 업무 분장을 받은 직원들의 얼굴은 어두워졌습니다.
대망의 캠핑 날. 기나긴 하루가 시작되었습니다. 먼저 선발대는 오전 업무 종료와 동시에 마트로 가서 물품 구매 후 팀장님이 거듭 강조하신 아이템을 확보코자 캠핑장 옆 모처로 출발해야 했습니다.
그것은 바로 ‘숯’이었습니다. 팀장님의 지론에 따르면 캠핑의 꽃은 바비큐고, 바비큐의 핵심은 숯이라고 합니다. 좋은 숯과 나쁜 숯의 차이는 굉장하다며 회의실에서 핏대를 높이신 팀장님을 생각하면, 상무님 방에 있는 숯 화분이라도 가져와야 하나 싶었습니다.
저도 나이 먹을 만큼 먹었지만, 숯으로 유명한 판매점이 있다는 건 처음 알았습니다. 여기까지는 아직 괜찮았습니다. 그런데, 본대가 합류하고 나니 할 일들이 엄청나더군요. 팀원 전체는 캠핑장에서 텐트를 치고, 주변을 정비하고, 요리를 준비했습니다.
글로 쓰면 한줄이지만 실로 공수가 어마어마한 일입니다. 물론 나와서 산공기를 마시며 요리를 먹는 느낌은 좋았습니다. 그러나, 세상 일에는 다 ROI라고 해야할까요. 가성비랄까 하는게 있잖아요.
지금 내가 하는 것은 레져인가 노동인가. 짧은 순간을 위한 이 수고로움은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내일 이거 누가 다 어떻게 치우지…등등의 번뇌가 있다보니 무엇을 먹고 있는지 헷갈리더군요.
약 3주를 문서까지 써 가며 준비한 캠핑은 다음날 아침 강제산행과 먹은 것 치우기, 텐트 철거를 정점으로 하여 마무리되었습니다. 정말 놀란건 픽업트럭에 실리는 짐의 양과 종류였습니다. 온갖 먹을거리부터 텐트와 각종 식기들이 다 들어가더군요.
그 뒤로도 몇번 더 캠핑 빌런으로 활약하셨던 팀장님 덕에 몇몇 캠핑장을 더 갔던 슬픈 뒷이야기가 있습니다. 퇴직하고 관련된 샵을 하고 싶다고 하셨는데 어떻게 지내시는지 모르겠네요. 팀장님께 전쟁나면 꼭 연락드리겠다고 했었는데…
쓰다 보니 너무 길어져서, 2부에서 계속 써 보겠습니다. 다음에 나올 빌런은 ‘모든 일은 집단지성으로 해결하는 집단지성 성애자 팀장님’, ‘MS워드 그림판 성애자 팀장님’ 이 이어집니다. 저보다 훨씬 더 고차원적인 빌런을 만나신 분들도 많으시리라 예상합니다.
원문: 길진세의 브런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