놀라운 이야기입니다만, 제가 첫 직장생활을 시작한 통신 대기업은 이메일이 업무기반이 아니었습니다. 1980년대에 입사했다면 모르겠지만, 무려 2000년대 중반 입사임에도 말이죠. 이메일 대신 전 직원은 사내 메신저의 쪽지(!)를 통해 업무를 진행했습니다.
가물가물한 제 기억으로 쪽지함의 유통기한은 3개월이었던 것 같습니다. 조직도와 연계해서 단번에 원하는 조직에 쪽지를 뿌릴 수 있었죠. 첨부파일을 붙인 쪽지가 하루에도 수십 통씩 오고 갔습니다. 이메일도 있긴 있었습니다만, 직원당 100MB의 공간이었고 그나마도 1주일에 한 통이 올까 말까 했습니다. 사내 메신저의 쪽지가 이메일을 완벽히 대체했죠.
뭐 지금 스타트업에서 쓰이는 슬랙(Slack) 같은 솔루션 느낌일 수도 있겠지만(꿈보다 해몽입니다) 직장 초년생으로서 저는 대단히 큰 위기에 빠지게 됩니다. 심지어 자신이 위기라는 사실도 몰랐죠. 바로 이메일 쓰는 법을 제대로 배우지 못하고 직장 생활을 시작한 것입니다.
무려 입사 4년 차까지, 저는 이메일을 업무에 쓰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외부업체와 프로젝트를 하게 되면서 큰 위기에 봉착합니다. 말이 무슨 필요가 있을까요. 그때 제가 썼던 메일을 복기해 보면 이런 식입니다.
안녕하세요? A사 B과장님, 날씨가 점점 무더워지는 오후입니다. 졸릴 텐데 시원한 거라도 드시면서 힘내세요! 저는 A사 앞에서 파는 과일빙수가 맛있더라고요 (이모티콘 뿌잉뿌잉)
며칠 전에 제안해 주신 AA 프로젝트는 잘 보았습니다. B과장님의 열정이 느껴지는 좋은 내용이었던 것 같습니다. 다만 전체적인 톤을 좀 더 저희 회사가 지향하는 바와 비슷하게 해 주시면 좋을 수도 있겠다는 느낌이 들기도 합니다… 예전 회의 때 저희 팀장님이 언급하신 그런 방향이요… 곧 저희 접수가 마감이라고 들었으니 재송부하시는 게 어떨까 싶기도 한데 고민해보시면 좋을 듯합니다… 내일은 비 온다고 하니 우산 잘 챙기시고요~ 날씨 더운데 건강도 잘 챙기세요~! 이만 줄입니다. ○○○ 본부 길진세 드림
아, 쓰다 보니 손발이 오그라들어 키보드를 칠 수가 없네요. 잠시 격한 자기반성이 됩니다… 위 예시의 뭐가 문제인지는 일일이 다 열거할 수 없을 만큼 많습니다. 아마 회사 경험이 어느 정도 있으신 분들은 다 보이실 겁니다. 통렬한 자기반성으로 저 때 제가 왜 저런 식으로 메일을 썼나 생각해 보면, 이런 문제가 있었습니다.
- 결국 상대방에게 다시 업무를 시켜야 하는데 받는 사람 기분이 나쁠까 봐 빙빙 돌렸다.
- 업무 메일은 간결히, 명확히 쓰는 게 중요함을 못 배웠다.
결국 남들은 대리 달고 한창 열심히 일할 때 저는 ‘이메일도 이상하게 쓰는 놈’으로 혼나며 기초부터 다시 배워야 했습니다. 그래도 뿌잉뿌잉을 간혹 일삼다가 업무량이 넘쳐나는 현 직장에 와서야 완전히 고칠 수 있었죠. 뭐든 처음부터 제대로 배우는 게 중요합니다.
여러분들은 이메일을 잘 쓰고 계신가요? 제 나름의 팁 몇 가지를 오늘 이야기해볼까 합니다. 공감이 가시는 것이 몇 개나 있으실지 궁금해지네요.
1. 첨부파일을 보낼 때는 가급적 PDF를 같이
요즘은 모바일에서 바로 업무 메일을 확인하는 게 일상화된 시대입니다. 모바일에서 .xlsx 파일이나 .pptx를 클릭하면 모바일 MS 오피스나 구글 닥스, 폴라리스 오피스 등을 통해 보게 될 텐데요. 메일 내용만 확인하려는 사람에게는 굳이 무거운 프로그램을 띄울 필요가 없죠.
그래서 센스 있는 발송자는 pdf를 같이 보냅니다. 읽는 사람을 위한 배려입니다. 특히 임원에게 보낼 때는 기본예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 혼나면서 배운 노하우입니다 크흑…) 주니어 시절부터 이 습관을 잘 들이면 칭찬받는 신입이 될 수 있습니다.
2. 맥 쓰는 분들은 차라리 첨부 파일명은 영어로
저도 맥을 애용했지만, 제가 내공이 부족했던지 끝까지 해결하지 못한 문제가 이건데요. 한글로 된 파일명이 종종 풀어져서 배달됩니다. ‘대한민국. xlsx’가 ‘ㄷㅐㅎㅏㄴㅁㅣㄴㄱㅜㄱ.xlsx’ 처럼 되는 거죠.
하도 자주 있는 일이라 보는 사람들이 이해하는 경우도 많지만, 완전히 해결할 수 없다면 차라리 영어 파일명으로 보내는 게 프로페셔널해 보이고 좋습니다. 추천합니다.
3. 첨부파일은 순서도 신경 써서 첨부하자
첨부파일 여러 개를 보낼 때는 파일명 앞에 1. 2. 나 1_ 2_와 같이 표시를 해 주면 좋습니다. 그리고 아웃룩에서는 파일을 첨부하는 순서도 중요합니다. 받는 사람에게 그 순서대로 보이거든요. 기왕 보내는 메일은 깔끔하게 보이는 게 좋습니다. 더불어, 상대방이 꼭 봤으면 하는 파일을 1번으로 두면 센스 만점이겠지요.
4. 자동회신을 잘 활용하자
아웃룩 등의 메일 클라이언트들은 대부분 특정 기간 수신되는 메일에 대해 자동회신 기능을 제공합니다. 휴가 중일 때 많이 쓰게 되는데요. 조직 내부에서 보낼 때와 외부에서 보낼 때를 구분하여 기재도 가능하니 자리를 비울 때는 꼭 사용하도록 합시다. 휴가 갔을 때 상대방의 급한 전화를 받지 않게 해 주는 아주 소중한 기능입니다.
5. 수신인은 꼭 메일을 다 쓰고 붙이자
메일은 제목 – 본문 – 첨부파일 – 수신인 지정 – 발송 순서를 지키도록 하세요. 보통 받는 사람을 기재하고 메일을 쓰는 사람들이 많지만 마우스나 키보드를 잘못 눌러 바로 발송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아웃룩 기준 단축키는 alt+s인데 꽤나 많이 잘못 누릅니다.
오발송으로 인한 에피소드는 회사생활 중 무수히 많이 보았습니다. 해프닝도 있었지만 어마 무시한 사태가 벌어지는 것도 자주 보았습니다. 이메일 발송은 신중, 또 신중하게 해야 합니다.
6. 지연 발송 기능을 활용하자
대부분의 이메일 클라이언트들은 지연 발송을 지원합니다. 발송 버튼을 누르더라도 사용자가 설정한 일정 시간 동안 발송하지 않고 기다리는 기능입니다. 그동안은 ‘보낼 편지함’에 들어가 있습니다.
이메일이라는 놈이 요물이라, 꼭 내용을 다 쓰고 나면 추가할 것이 생각이 나기도 하고 이걸 보내는 게 맞나 하는 후회가 밀려오기도 합니다. 지연 발송을 걸어두면 큰 도움이 됩니다.
7. 말머리는 필수
사실 이건 팁이라고 할 것도 없을 정도로 필수적인 이메일 예절로 자리 잡았습니다. 메일의 목적을 최소한의 글자로 함축하여 말머리로 메일 제목에 달아줍니다. [요청], [전달], [보고], [공유] 등입니다.
하루에 수백 통의 메일이 오고 가는 상황에서는 말머리는 상대방에게 업무 우선순위를 구분할 수 있게 해 주는 ‘고마운 배려’입니다. 아웃룩에 메일 중요도(붉은색 느낌표의) 기능이 있긴 합니다만 이쪽이 더 직관적입니다. 말머리를 잘 쓰는 사람은 프로의 느낌이 들곤 하죠.
8. To CC/BCC를 잘 활용해라
- To: 이건 님이 좀 하셔야 하는 거예요
- CC: 쟤가 이거 할 건데 님도 좀 아셔야 할 듯 (너님도 본 것임)
- BCC: 쟤가 이거 할 건데 님은 아셔야 하는데 쟤는 모르게 아는 게 좋겠…
사실 수신인 지정을 잘 못하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그럼에도 이 항목에서 발생하는 오류의 본질은, 업무를 잘 이해하느냐입니다. 어떻게 아냐고요? 제가 깨지면서 배웠거든요(ㅠㅜ).
본인이 지금 수신인 지정에 어려움을 느낀다면, 하는 일을 완벽히 이해하지 못했다고 보면 됩니다. 가끔 보이는 To 다중화, CC로 넣어두고 본문 중 업무 지정 등의 사례가 그런 케이스입니다. 본의 아니게 업무 배정 지시(?)의 효과도 있는 만큼 민감한 포인트이니 신경 써야 합니다.
9. 나만의 암호로 프로젝트를 구분해 보자
이건 좀 고난도의 팁인데요, 저도 귀찮아서 잘 쓰는 방법은 아닙니다. 하지만 확실히 유용합니다. 인스타그램 태그처럼 메일 제목 또는 본문에 주제별로 나만의 코드를 달아두는 방법입니다. 코드는 되도록 흰색을 입혀서 다른 사람에게 보이지 않게 합니다.
업무 진행은 보통 스레드(Re:re:re:…. 뭔지 아시죠?)로 나타나지만, 특정 주제에 대해 메일 제목이 계속 바뀌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런 경우 주제어나 수신인으로 탐색하는데, 일정량 이상의 메일이 쌓이게 되면 한계가 오죠. 첫 메일이나 이어지는 메일 스레드의 글을 적을 때 본문 한구석에 자신만의 표시를 해 두는 겁니다.
예를 들면 AA 프로젝트와 관련된 메일은 모두 본문 마지막 한구석에 [AAXXTT]라고 적은 뒤 글자색을 흰색으로 해 두는 겁니다. 평소에 절대로 치지 않을 문자열을 사용하는 게 중요합니다.
10. 메일을 보낼 때, 많이 생각하자
사무 노동자의 업무 상당수는 메일을 읽고, 메일을 보내는 데 집중됩니다. 업무 메일이 업무의 알파이자 오메가라는 것은 결코 과언이 아닙니다. 상대방에게 메일로서 전달하게 되는 것은 단순한 정보공유일 수도 있지만 상대의 행동 유발을 요청하는 경우도 상당히 많습니다. 그래서 메일을 보내기 전 정말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꼭 이메일로 보내야 할 내용인가? 전화나 메신저로 가능하지 않을까? 어차피 하게 될 업무인데 중복업무가 되는 건 아닌가? 수신인, 참조인 모두에게 떳떳하게 보낼 수 있는 내용인가? (특히 중요)
메일만 잘 다뤄도, 업무의 많은 부분이 쾌적해집니다. 많은 분께 도움이 되길 바라며.
비즈니스 IT 트렌드, 예측 말고 전망하라: 미래 비즈니스 변화와 트렌드 전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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