낡디 낡은 경제학박사 유승민
“성장이란 건 돈을 어떻게 버느냐의 문제 아닙니까? 복지나 분배는 돈을 어떻게 쓰느냐의 문제고.”
재작년 대선 TV 토론회에서 유승민이 문재인에게 던진 질문이다. 유승민은 경제학 전공자들이 흔히 가진 이분법 편견과 후진적인 복지 인식을 드러냈지만, 문재인도 복지 (담론) 후진국의 기성세대답게 딱히 제대로 된 응대를 하진 못했다.
유승민식 이분법의 맹점은, 뒤에 자세히 알아볼 것이지만, 이렇게도 간단히 알 수 있다. 돈 씀씀이가 엉망인 어느 가정에서 필수적인 보험 가입도, 적절한 자녀교육도, 이른 퇴직에 대비한 인생 이모작 준비도 전혀 안 되어 있다고 생각해보자.
이런 집은 돈을 잘 못 쓰는 바람에 가구의 소득을 늘릴 기회가 크게 제한된다. 개인이건 기업이건, 국가 단위에서건 돈을 잘 벌려면 당연히 돈을 잘 쓸 줄 알아야 한다. 애먼 곳에 돈을 허비하면서 소득과 이윤을 늘리기는 어려운 법이다.
복지 차원을 넘어 세금이 어떻게 성장을 이끄는지에 대해 스웨덴 사민당 소속으로 팔메의 암살 이후 총리를 역임한 잉바르 카를손이 쉽게 정리한 바 있다. 그의 저서 중 일부를 발췌한다.
경제학적 연구들은 경제성장과 조세부담률 간에 연관성이 없다고 말하고 있다. 즉 높은 세금에서도 고도의 경제성장이 가능하다(필자 주: 이것은 특히 북구형 복지 국가들이 오랜 기간 실증해주었다). 경제성장에 중요한 것은 정말로 조세부담률이 아니라, 과세가 이루어지는 실제 방식이다.
하나 더 추가하자면, 세금이 사용되는 방식이다. 만약에 우리가 세금지원을 통해 선진적인, 양질의 학교교육 시스템을 유지할 수 있다면 이것은 당연히 경제성장에 도움을 주게 된다. 다른 한편으로 낮은 수준의 세금은, 만약에 이것이 형편없는 교육 시스템 또는 빈약한 운송, 텔레커뮤니케이션 시스템을 의미한다면, 경제에 별로 도움이 안 된다. […]
합리적인 세율은 어느 정도인가의 문제는 세율의 높낮이의 문제일 뿐만 아니라 우리가 세금을 통해 무엇을 얻을 수 있는가의 문제(그리고 세금이 아닌 다른 방식을 통한다면 이를 위해 얼마나 비용을 지불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이기도 하다. […] 세금이 낮다고 해서 병원치료나 교육 그리고 연금에 들어가는 비용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
조세시스템은 두 가지 매우 중요한 기능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사회복지를 재정적으로 떠받치고 국민경제의 안정적 발전에 기여하는 것이다. […]
나는 GDP나 경제성장을 지나치게 목적화하는 태도에 공감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성장의 이로움을 깎아내리는 태도에 동조하는 것도 아니다. 1인당 GDP가 낮은 저개발 국가는 그것이 높은 국가의 우월한 삶의 질을 절대로 누릴 수 없다.
간혹 “부탄의 행복지수가 1등이다. 경제성장이 능사가 아닌 거다”와 같은 주장을 볼 수 있는데, 이것은 행복지수나 삶의 질 등에 대해 얄팍한 정보만을 가지고서 하는 이야기다. 부탄 같은 저개발국가의 국민들은 다른 모든 저성장 국가의 국민들과 마찬가지로 자신들의 삶에 불만이 가득하다.
어떤 경제성장이냐
(1) 복지를 통해 여성의 능력을 사장시키지 않는 경제성장
1인당 GDP가 나타내는 양적 경제성장 혹은 경제성장의 기간은 국민의 후생과 삶의 질에 틀림없이 긍정적 영향을 미친다. 하지만 경제성장 선진국들 사이에서도 주관적, 비 주관적 삶의 질에 작지 않은 차이가 난다. 요컨대, 한국 이상의 선진국들에겐 ‘어떤 경제성장이냐’가 관건이다.
늘 강조하지만, 여성의 경제활동을 촉진하고 또 이들이 저임금에 내몰리는 것을 방지하는 경제성장이어야 한다. 이것이 결국 남성의 부양 부담 및 노동시간, 격차를 줄이며 모두에게 큰 이득이 된다. 이처럼 여성의 역할을 확대하며 이로움을 얻는 경제성장을 위해서는 무엇보다 복지 체제가 중요하다.
비근한 예로, 보육 기관의 추첨에 떨어질까 노심초사할 필요 없는 촘촘한 공보육 시스템과 출산을 전후로 1~2년가량 지급되는 충분한 부모 휴가 급여 등은 여성의 노동시장 진출을 적극적으로 뒷받침한다.
여성의 능력을 알차게 활용하려면 출산 이후 복귀한 직장에서 불이익을 받지 않도록 관련 법령을 정비하는 한편, 기업의 인식을 환기하는 작업도 병행돼야 한다. 예컨대, 출산의 공백을 이유로 여성채용에 차별을 두는 기업에겐 여론의 비난 등 사회적 압력을 가하거나 (상징적인 수준일지라도) 제도적 차원의 조치가 취해져야 한다. 가정 내에서 동거인 간의 역할을 잘 분담해야 하는 것도 물론이다.
우수한 복지 체제나 문화의 개선을 통해 여성의 경제활동이 진작되면, 이것은 결국 그 사회가 더 넓은 인재풀을 갖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당연히 이런 사회는 경제성장 및 고용 창출에 보다 유리한 고지를 확보하게 된다.
뛰어난 복지 시스템은 GDP나 일자리를 늘리는 데 그치지 않고, 가장 바람직한 형태로 사회 구성원의 후생도 증가시킨다. 결국, “복지는 단순히 돈을 어떻게 쓰느냐의 문제일 뿐이고 돈을 버는 성장의 방안은 따로 있다”는 유승민 식의 인식은 박물관에나 보내버려야 할 낡은 이분법이다.
(2) 복지를 바탕으로 ‘혁신’이 만개하는 경제성장
경제성장은 공급 측면의 요법인 ‘혁신’에도 영향을 받는다. 새로운 재화나 서비스가 혁신을 통해 ‘공급’되고 이 중 일부가 ‘수요의 선택’을 받게 되면, ‘탈락한 혁신적 공급들’의 자원 낭비가 있긴 하지만 전체적으로는 고용 및 성장이 증진된다.
나는 혁신을 위해 마찬가지 공급 사이드의 주 방안인 규제 완화가 적절하게 이뤄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세금인하 같은 공급 주의적 방안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세금을 줄이고 복지를 확충하지 않으면 혁신과 경제성장이 일어난다고 할지라도 사회 구성원의 후생이 크게 벌어질 뿐 아니라, 혁신을 일으키는 중요한 사회적 자본인 ‘근원적 동기’가 약화하기 때문이다.
‘근원적 동기’는 한국의 몇몇 기업에서도 업무 능률을 높이기 위해 표면적으로나마 강조하는 요소이기도 하다. 쉽게 말해 성과에 대한 압박을 덜어내고 업무 만족감을 고취하면, 능률이 올라가고 이것이 결국 회사의 발전에 도움이 된다는 이야기다. 혁신과 성장을 추동하는 ‘근원적 동기’의 내막에 대해 좀 더 알아보자.
행동심리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인간의 행동을 끌어내는 동기는 세 가지로 나뉜다. 제1 동기는 식욕이나 성욕 등의 본능적 동기다. 제2 동기는 상이나 벌의 보상 동기다. 성적이 나쁘면 좋은 대학도 못 가고 임금도 적게 받으니까 열심히 공부해야 한다는 동기부여다. 보상동기 자체는 있을 수 있지만, 한국은 이것이 지나치게 팽배하다는 문제가 있다.
상급의 복지선진국은 격차가 작아 보상 동기가 떨어진다. 평균 언저리의 벌이만 하면, 맞벌이 및 복지를 통해 여유와 안정이 확보되기에 상과 벌의 보상 동기가 저하될 수밖에 없다. 저임금자의 급여 수준도 비교적 높은 데다 복지를 더하면 확연히 살 만하다.
실제로 더 많은 급여를 주는 고위직, 상위 관리직으로의 승진을 마다하는 풍토마저 있다. 승진과 고소득이 노동시간과 업무강도를 가중시키므로, 그럴 바엔 현재의 고만고만한 수입과 다양한 복지혜택, 여가 활동에 만족하며 살겠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네들 나라에도 열심히 밤을 지새우며 공부하는 학생과 과로를 자처하는 사회인이 있고, 창의적인 기술과 아이디어를 지속적으로 내놓는 기업(인)이 있다. 그렇게까지 안 해도 제도적으로 보장되는 최소한의 생활수준이 준수하고, 평균을 훌쩍 뛰어넘는 소득이 굳이 필요없음에도 왜 그에 안주하지 않는 이들이 존재하는 걸까? 게다가 수입이 소박한 이들이라고 해서 업무효율이 떨어지는 것도 아니다. 노동권과 무관하다면, 한국보다 간결하고 뛰어난 일 처리를 보여준다.
이것은 제3 동기인 ‘근원적 동기’ 때문이다. 인간이 어떤 행동을 하게 되면 그 행위 자체에서 작고 큰 기쁨을 얻을 때가 있다. 예를 들면 이런 거다. 다 알다시피 한국의 사회생활이란 참 뭐 같은 면이 많다. 자발적인 능률? 눈치 잘 보고, 사내 정치 잘 하는 게 능률이다. 때려치우고 싶지만 처자식 먹여 살리고 굶어 죽지 않으려면 그냥 굽실굽실 붙어 있어야 한다.
그렇게 송장 같은 사회생활의 와중에, 누가 돈을 더 주겠다는 확약이 없는데도 “이건 이렇게 하면 좀 더 나은데” 하면서, 스스로 개선할 때가 있다. 그래서 효과가 있으면 사소한 거라도 그냥 기분 좋다. 심리학자 해리 하로우는 이를 두고 ‘행위 자체의 보상’이라 명명했다.
사람은 누구나 이 같은 ‘근원적 동기’가 있고, 이것은 ‘보상 동기’보다 더 높은 능률과 효율을 가져온다. 이를 보여주는 몇 가지 실험을 보자. 근원적 동기에 관한 실험 등의 설명들은 서상철 교수의 저서 『무한경쟁이 대한민국을 잠식한다』를 참조했다.
실험 1. 원숭이
먼저 원숭이부터 살펴본다. 포도를 보상으로 주는 경우와 아무런 보상이 없는 경우, 원숭이들은 동일한 행동을 함에도 포도를 줄 때, 그렇지 않을 때보다 더 많은 실수를 저지른다. 잘하지 못하면 포도라는 보상을 받지 못한다는 스트레스로 인해 원숭이의 능력이 저하된 것이다.
한국인이 받는 과중한 보상 동기의 압박은 개인은 물론 사회 전체의 역량을 저하시킨다. 물론, 높은 급여나 승진 탈락과 같은 신상필벌의 보상 동기는 능률 향상을 가져올 뿐 아니라 의욕과 열정을 달궈준다. 우리는 또 보상 동기를 과도하게 억누른 체제의 몰락을 이미 목도한 바 있다. 하지만 한국처럼 이것이 극심하면 불안과 걱정도 덩달아 커지기에, 사람은 사람대로 불행하고 효율은 효율대로 떨어진다.
실험 2. 어린이
다음은 어린이를 대상으로 한 실험이다. 아이들을 세 집단으로 나누고, 집단 A에는 그림을 그리면 상을 줄 테니 그렇게 할 건지 물어본 뒤 그림을 그리게 한다. 그리기 작업이 끝나면 약속대로 상을 준다. 집단 B에는 아무 말 없이 그림을 그리게 하고, 예기치 못한 상을 준다. 집단 C에는 그냥 그림만 그리게 한다.
2주 후 아이들에게 그림 도구를 주고 자유롭게 놀도록 하자, 집단 A에 속했던 아이들은 집단 B와 C의 아이들보다 그림 그리기에 현저히 낮은 흥미를 보이며 가장 적은 시간을 할애했다. 보상 동기에 근거해 그림을 그렸던 아이들은 그것이 사라졌음을 인지하자 동기부여가 뚝 떨어지고 만 것이다.
보상 동기는 행위 자체에서 흥미를 얻고 보상을 받는, 인간 고유의 근원적인 동기부여를 약화시킨다. 한국의 흔한 회사로 치면, “뭐 어려운 것도 아니니까 나라도 하면 다들 좋긴 할 텐데, 그래 봤자 돈이 더 나오는 것도 아닌데” 하며 누군가 지적할 때까지는 아무도 안 하게 되는 경우이다.
하버드 경영대 애머빌 교수의 연구에 따르면, 직원들을 몰입하게 만드는 가장 큰 요인은 일에 대한 진전을 느낄 때인 것으로 나타났다. 애머빌 교수는 보상 등의 외적 동기부여는 창의성을 촉진하는 데 근본적인 한계가 있는 반면, 일 자체의 재미 등 내적 동기 부여는 창의성을 촉진한다고 지적한다.
실험 3. 대학생
대학생도 마찬가지의 행동 양태를 보여준다. 3일 동안 두 집단으로 나누어 조각 맞추기를 시키고, 집단 A는 보상을 주었다가 빼앗지만, 집단 B는 3일 내내 아무런 보상도 주지 않았다. 집단 B는 날이 갈수록 더 많은 시간을 조각 맞추기에 할애하지만, 집단 A는 보상이 사라지자 흥미를 잃어버렸다. 이는 행위 자체에서 보상을 받아 능률을 올리는 인간의 본성을 드러낸다.
‘근원적 동기’는 복지가 탄탄하고 상과 벌의 보상 동기가 과도하지 않으며 안정감이 높은 사회에서 가장 잘 발현된다. 그리고 사회 구석구석 충만해진 ‘근원적 동기’는 일의 효율을 높이고 새로운 아이디어와 혁신을 끌어내는 견인차 역할을 한다. 이것은 잘 정비된 복지 체제가 고르게 높은 삶의 질은 물론 경제 성장에도 기여한다는 의미이다.
이 점에서 유승민처럼 성장과 복지를 분리시키는 보수집단의 사고관은 한국의 성장과 전진을 저해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 현 정부·여당과 같이 이런 낡은 가치관을 극복하기 위한 대처가 부족해서는 더 나은 사회로 올라서기가 어렵다는 점도 알 수 있다(곁가지로, 은수미 성남시장처럼 책을 몇 권 읽으면 돈을 주겠다는 정책은 전혀 미래지향적이지 않다는 점도 알 수 있다).
나는 한국의 경제와 GDP가 더 성장하기를 바란다. 단, 건강하게 성장하길 바란다. 지금껏 해온 방식에서 훨씬 더 과감하게 탈피해야 그렇게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말로만 포용이니 창조니 혁신이니 할 게 아니라 정말 그에 맞는 방안들을 써야 한다.
바로 그때, 지금과 비슷하거나 좀 더 낮은 성장률에도 일반 국민의 살림살이에 문제가 없고, 때로는 성장률이 팍 떨어지더라도 우리네 삶에 큰 지장이 없는 사회가 무엇인지 경험할 수 있을 것이다.
원문: 장제우의 페이스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