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4년, 미국의 클린턴 대통령은 우크라이나가 핵무장을 해제하면 미국이 안전을 보장해준다는 이른바 ‘부다페스트 메모랜덤’에 서명했다. 우크라이나는 이를 믿고 소련 시절 배치되어 있던 1,900여 기의 핵무기를 포기하고 재래식 군비도 점차적으로 축소해나갔다. 소련은 무너졌고, 이제 미국이 독주하는 ‘팍스 아메리카나’의 시대가 열린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었다. 미국을 축으로 한 ‘서방’에 의존해서 평화와 번영을 ‘편하게’ 추구하겠다는 결정이었다.
우크라이나의 안이한 결정
하지만 우크라이나는 이후 군사적으로 약체가 되었고, 외교적으로도 ‘서방’의 도움을 별로 받지 못했으며, 경제적으로 피폐해졌다. 우크라이나는 현재 1인당 국민소득이 4,000달러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답답한 것은 이렇게 취약한 전략적 위치에 놓여 있음에도 불구하고 러시아가 던진 ‘천연가스 할인’이라는 미끼를 덥썩 물기까지 했다는 것이다.
가스 가격 할인은 우크라이나가 자신에게 에너지원을 의존하도록 만드려는 러시아의 계략이었다. 계략은 주효했다. 러시아는 벌써 ‘가스가격 현실화(인상)’을 압박의 카드로 사용하고 있다. 우크라이나 정부에는 ‘시장의 가격법칙’을 넘어설 수 있는 조직력이 없었다. ((세상의 법칙 즉 ‘인지상정’을 넘어서는 것을 비르투(virtù)라고 한다. 예컨대 5만의 군대가 100만의 군대에 맞서면 당연히 쉽사리 항복할 것이다. 죽기는 싫은 것이 인지상정이니까. 하지만, 좋은 군대라면 이러한 죽음의 공포를 이기고 싸움에 뛰어든다. 운이 좋으면 5만이 100만을 이길 수도 있다. 이것이 비르투이다. 시장의 법칙, 사회의 법칙, 인지상정을 이겨내는 것이 정치의 비르투이다. 물론 보통은 이겨내지 못한다. 훌륭한 사람, 훌륭한 나라만이 가능한 것이다.))
우크라이나의 정치엘리트들의 미숙함은 계속되었다. 2007년의 경제위기 이후 ‘서방’은 군사적 행동을 취할 여력을 상실했다. 여기에 더해 미국은 과거 부시 행정부가 과도한 군사적 행동으로 남긴 재정적자의 무게 때문에 군사비를 삭감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었다. 그런데도 우크라이나는 이러한 타이밍에 여전히 ‘서방’의 도움을 통해 독립을 유지하겠다는 헛된 꿈을 계속 꾸었다.
혁명이 일어난 이유, 러시아가 개입한 이유
결국 작년 가을에 유럽연합(EU)와의 ‘협정’에 서명하려 했고 (주로 경제적 협정이지만 러시아는 여기에서 정치적 의미를 읽었다), 이에 친러파 대통령인 야누코비치가 반발해 방해에 나섰다. 이에 대해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자들이 야누코비치의 퇴진운동을 시작했던 것이다.
‘서방’과의 협력을 강화하는 조약/협약의 타이밍이 좋지 않았다. 서방이 강하고 미국이 여전히 군사적 행동을 추구할 때라면 한번 시도해 볼 만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미국이 군비 감축을 결정하고 있는 이때에 이런 외교적 움직임을 보인 것은 우크라이나의 미숙함 외에 아무것도 아니다. 수도 모스크바와 우크라이나 국경 간의 거리가 단 500킬로미터 밖에 되지 않는 러시아는 이를 좌시할 수 없었다.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자들이 당분간은 ‘완충지대’로서 입지를 정하고 때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 오히려 나았을지도 모른다. 수도 모스크바에서 500킬로미터 밖에 안 되는 거리까지 서방 세력이 접근해 오는 것은 러시아로서는 결코 받아들일 수 없는 노릇이었을 테니까. 서방이 충분한 힘만 갖고 있었다면 러시아가 싫어하는 것도 강요할 수 있었겠지만, 지금의 서방은 그럴 수 있는 상태가 아니다.
이렇게 친러파 대통령을 축출한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자들은 정권을 장악한 후에 곧바로 또다른 실수를 저질렀다. 정권을 잡자마자 우크라이나와 함께 공용어의 지위를 누리고 있던 러시아어를 공용어의 지위에서 끌어내리기로 결정한 것이다. 동쪽에 많이 살고 있는 러시아계 주민들이 반발하는 것은 당연했다.
게다가 이러한 결정은 미래에 러시아계 주민들에 대해 더 많은 차별과 탄압을 예고하는 듯한 인상을 주었다. 폭력 사태와 정권 전복 이후 우크라이나의 극도로 불안한 상황 하에서 이 결정은 동부의 러시아계 주민들에게 더 큰 불안감을 심어줄 수 밖에 없었다. 이 때문에 러시아계 주민들의 마음이 러시아쪽으로 기울게 되었으리라는 것을 상상하기란 어렵지 않다. 정치는 마음의 문제이고, 마음은 갈대처럼 이리저리 흔들리기 마련이다.
국제사회가 여러 제재조치를 내놓고는 있지만 러시아의 크림반도 합병은 거의 기정사실이 되었다. 미국 정부는 러시아를 비난하면서 “더 이상의 도발은 좌시하지 않겠다”고 엄포하고 있는데, 이는 뒤집어 생각해보면 ‘크림반도 병합까지는 봐주겠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러나 과연 러시아가 크림반도에만 머무를 것인가? 앞서 말한 대로 우크라이나는 러시아 수도와 너무 가깝다. 그리고 크림반도 외에도 동부에는 러시아계 주민들이 많이 살고 있다.
우크라이나에서 무엇을 배울 것인가?
자신의 운명을 남에게 의존하고 지난 20년을 허무하게 보내버린 우크라이나. 결국 크림반도를 빼앗기고 또 나머지 동부지역도 잃을지 모르는 상태에 빠지게 되었다. 나는 미국, 중국, 러시아, 일본 등의 열강들에 둘러싸인 대한민국이 우크라이나의 사례에서 무엇을 배울 수 있을지를 생각해 보았다.
첫째, 정치, 경제, 외교 등을 총체적으로 멀리 내다보면서 국가계획을 짜갈 수 있는 그룹들이 꼭 필요하다. 대한민국에 이러한 그룹들이 과연 있는지 걱정스럽다. 대한민국의 행정부 관료들은 역부족이다. 다들 자기 부처의 현안에 바쁘고, 그리고 총체적으로 미래를 계획할 만큼 엘리트의 위치에 있지도 않다. 입법부 역시 지금 당장의 선거에만 목을 매고 있는 실정이다. 의원들은 오직 ‘선거’만을 본다. 선거를 넘어서서 정책을 계획하고 스스로의 존립을 기획하는 ‘정당’이 제대로 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정당이 실질적으로 존재하지 않는 한국의 입법부로서는 이러한 ‘국가방어’의 중책을 맡기가 어렵다.
둘째, 미국과의 동맹이 결정적으로 중요하긴 하지만, 여기에 모든 것을 의존해서는 안 된다. 최소한 단독으로 침략자에 맞서 한 달이라도 버틸 수 있는, 최소한의 ‘자주국방’이라도 되어있어야 한다. 약체인 북한은 이제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러나 중국 등 다른 주변강대국의 무력개입에 대한민국이 과연 한 달간 맞서 싸울 수 있을까?
주변의 무력개입에 대항하여 한 달을 버틸 수 있는 능력은 필수적이다. 우선 미국이 한국을 돕겠다는 결정을 쉽게 할 수 있도록 도울 수 있다. 그리고 미국이 불개입 결정을 내리는 경우, 미국에 의존한 방어계획 A에서 다른 방식의 ‘플랜B’로 전환하는 시간을 벌기 위해서이다. 미국의 개입, 불개입 모두를 감안한 방어계획들이 작동하기 위해서라도 최소한 ‘한 달간의 버티기’가 꼭 필요하다. 대한민국이 과연 이러한 준비들을 하고 있는지 한번 점검해 볼 필요가 있다.
(편집: 김수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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