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에 미디어를 타는 학문 분야 중 경제학만큼 인기 있는 것도 없을 것이다. 많은 사람이 경제에 대한 뉴스를 보고 평론을 듣고 강의도 듣는다. 그래서 경제학자의 의견에 주목하는 일도 많다. 예를 들어 EBS 특별기획 통찰이란 프로가 있다. 여기서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의 장하준의 강의를 2016년에 방송했는데 그의 첫 번째 강의에서 장하준은 경제학이 접근하기 어려운 학문이 된 이유 세 가지를 든다.
- 경제학자들이 학문을 수학과 통계로 복잡하게 만들었다.
- 경제학자들이 경제학을 객관적 과학으로 여기면서 대중과의 소통 의지를 잃어버렸다.
- 그런데 사실 경제학에는 여러 학파가 있으며, 이 학파 모두 서로 다른 사상체계를 가져서 전혀 다른 경제학을 만든다.
그는 강의를 마치면서 ‘이게 우리가 경제학을 알아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고 말한다. 하지만 나는 전반적으로 말해서 사람들은 경제학보다는 과학이나 철학에 더 신경 쓸 필요가 있다고 믿는다. 경제학과 관련되어서는 한 가지 아주 큰 오해가 있다. 경제학자인 장하준은 직설적으로 말하지 않지만 경제학은 과학이 아니라 과학의 외피를 쓴 사상과 철학이다. 그런데도 많은 사람은 경제학을 객관적 과학이라고 생각하며, 심지어 경제학자들도 그렇게 말한다.
사실 경제학은 과학이 되지 못했을 뿐 아니라 제대로 된 철학도 아닌 미성숙한 학문이다. 어떤 사람은 경제학이 모든 걸 해결해 주는 만능의 학문인 것처럼 착각한다. 하지만 경제학은 사실 아직 과학과 철학 모두보다 훨씬 못한 처지에 있다. 그것이 만능처럼 보이는 것은 애매한 사상이기 때문이다.
내가 말하려고 하는 것은 경제를 연구하는 것이 반드시 물리를 연구하는 것보다 못하다는 것이 아니다. 과학이 아닌 것을 과학으로 여기면 문제가 생긴다는 것이다. 물론 과학과 철학은 반드시 물 베듯 구분되는 것은 아니다. 물리학 같은 엄밀한 과학도 형이상학적인 전제가 있다. 예를 들어 뉴턴역학은 절대 시간과 절대 공간이라는 가정 위에서 전개된다. 나에게 동시에 일어나는 두 개의 사건은 모든 사람에게 동시이며, 나에게 1미터면 모든 사람에게 1미터다. 그리고 상대성 이론은 이 전제를 뒤집으면서 전개되었다.
그래서 경제학을 포함한 어떤 학문이건 어떤 철학적 전제를 가지는 것은 그 자체로는 당연하다. 하지만 혁명적 변화가 일어나기 전까지 물리학 연구공동체는 기본적으로 같은 철학적 전제를 공유했다. 경제학은 당연하지 않은 철학적 전제의 영향을 너무 많이 받는다. 모든 경제학자가 같은 철학적 전제를 공유한 것도 아니다.
게다가 경제학과 관련된 철학적 전제는 절대 공간이나 절대 시간 같은, 부정하기 어려운 원초적 수준이 아니다. 우리가 경제학이라고 부르는 것은 실은 어떤 철학적·사상적 태도에 과학의 외피를 살짝 뒤집어씌운 것이다. 따라서 경제학을 배운다고 할 때 실은 대부분 누군가의 사상과 철학을 배운다. 이런 착각의 결과는 심각하다. 과학이 아닌 것을 과학으로 착각하는 것은 맹신을 만들어 내기 쉽다.
우리가 철학과 과학에 대해서 가지는 태도는 전혀 다르다. 누군가 ‘나는 철학자이며 나는 나의 철학에 대해서 이야기하겠다’고 하면 사회는 그의 말에 상당한 관용을 보이지만 동시에 지나치게 빠져들지 않도록 면역이 되어 있다. 세상에는 서로 다른 너무 많은 철학이 공존한다. 과학기술 분야에서와는 달리 수천 년 전의 사람이 말한 철학도 아직 영향력이 있다. 따라서 누군가 ‘내가 말하는 것은 사상과 철학의 영역에 있다’고 하는 순간 그 사람은 자신의 말이 그저 하나의 주관적 의견이라고 하는 것이다.
반면에 누군가 ‘이것은 상대성 이론과는 다른 나의 물리학 이론’이라고 말한다면 그런 여유는 없다. 그 사람이 맞다면 상대성 이론이 틀린 것이다. 이 세상에 과학은 기본적으로는 하나밖에 없다. 게다가 과학의 철학적 전제는 너무 기초적이라서 과학에 대해서는 그 철학적 전제가 뭔지 잘 따지지 않는다. 반면에 누가 내 말은 철학이라고 말하면 대개 그 전제가 뭘까 고민하고 주목한다.
그러니까 과학이 아니고 철학과 사상인 것을 혹은 그저 주관적 주장인 것을 과학이라고 말하는 것은 전체주의적이다. 어떤 사람의 관점을 모두에게 강요하는 것이다. 정확히 바로 이 이유 때문에 칼 포퍼가 『열린 사회와 그 적들』을 썼다. 과학이 아닌 유사과학이 자신을 과학이라고 말하기 때문에 열린 사회가 위험해졌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때로 포퍼가 공산주의를 비판하기 위해서만 이 책을 썼다고 착각하는데 이 책은 결코 공산주의만 비판하는 게 아니다. 스스로를 과학이라고 주장하는 모든 경제학 이론들은 모두 포퍼가 말하는 유사과학이며, 포퍼에 따르면 닫힌 사회를 만들어 전체주의로 가는 길을 여는 것이다. 그들은 과학의 외피로 자신들의 미심쩍은 철학적 전제를 숨기고 그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게 만든다.
이래서 경제학자에게 속지 않기 위해서 경제학을 먼저 배워야 한다는 말이 반드시 옳지는 않다고 하는 것이다. 사이비 종교에 속지 않기 위해서는 먼저 그 종교의 신자가 되어야 한다는 말이나 마찬가지다. 아무런 대비 없이 엄청나게 많은 세부 사항이 있는 이론으로 들어가면 그 안에서 길을 잃고 세뇌되기 쉽다. 경제학만 공부한 학자도 그런데 일반인이 지엽말단적인 경제학 이론들을 보고 배우면서 길을 잃지 않기란 불가능하다.
심지어 경제를 똑바로 보기 위해서도, 경제학보다는 철학과 과학을 더 배워야 한다. 먼저 그 뿌리에서 문제점을 볼 수 있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글쓰기 등을 통해 사고하는 능력을 키워야 한다. 확실하게 믿을 수 있는 과학적 지식을 길러야 하고 사고의 기본적 전제를 분석하는 철학적 사고에 익숙해야 한다. 그렇지 않고 주장과 사실을 뒤섞어 놓은 걸 공부하면 주장과 사실에 혼돈을 일으키고 자기도 모르게 뭔가를 맹신한다. 우리는 20세기의 전쟁을 통해 전체주의자 혹은 사상적 광신자의 위험을 이미 경험한 바 있다. 그들의 잘못이 바로 사상을 과학으로 잘못 여긴 것이다.
경제학을 과학으로 착각해서 생기는 결과 중의 하나는, 경제학이란 학문이 없으면 경제정책을 운용할 수 없고 국가 경제도 존재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마치 달 탐사선을 달에 보내려면 공학자와 물리학자 없이는 불가능한 것과 같다. 그러니까 경제학이 과학이라면 경제는 경제학자라는 전문가가 다뤄야 하고, 잘 모르는 사람들의 의견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것 같다. 달로 가는 로켓의 모양은 전문가가 결정하게 하지 여론 투표나 국민적 토론으로 그것을 결정하지는 않는다.
그런데 경제학이 실은 윤리이고 상식이며 철학이라면 이야기가 전혀 다르다. 예를 들어 법에 대해서 우리가 같은 착각을 한다고 해보자. 법이 과학이라서 전문가들만 다루고 전문가들이 맘대로 고치면 사회는 어떻게 될까? 실질적으로 관료에 의한 독재 사회가 될 것이다. 이쯤 되면 철학인 것이 과학인 척하는 게 얼마나 위험한지, 왜 그들은 과학인 척하는지 알 수 있다.
좀 극단적으로 말하면 과학인 척하는 경제학은 일반 대중을 경제로부터 분리하고 세뇌하기 위해서 주로 존재한다. 그래서 경제학에 우리가 가장 먼저 들어야 하는 말은 ‘경제학은 과학이 아니라 사상과 철학’이다. 그것도 어설픈 철학인데, 사고의 근원을 파고드는 철학과는 달리 경제학은 어떤 철학적 출발점 위에 근원을 다시 고려하지 않은 채 결과물들을 쌓아 올린 것이기 때문이다.
경제학은 사실 객관적이고 공평할 수가 없다. 경제학은 그 태생부터가 국가정책과 관련이 있었다. 즉 사회적 부를 어떻게 분배하는가에 대한 주장들에서부터 경제학이라는 학문이 나왔다는 것이다. 애덤 스미스의 국부론이나 토마스 맬서스의 인구론 같은 것을 생각해 보라. 경제학은 불행하게도 가장 깊게 돈의 분배와 관련된 학문이다.
그런데 이게 공평할 수가 있을까? 학문도 사람이 하는 거라서 결국은 누가 교수가 되고 누가 언론을 통해 유명해지는가, 누가 연구비를 많이 타는가 하는 것에 민감하게 의존한다. 그나마 물리학이나 수학처럼 분명한 예측을 통해 자신의 옳음을 보일 수 있다면 이런 부분을 극복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실험이 기본적으로 불가능한 경제학 분야에서 이게 가능할까?
누가 어떤 경제학자들을 지원해 왔을까? 누가 교수가 되고 누가 미디어에서 유명해 지며 누가 연구비를 많이 타서 많은 제자를 배출했을까? 그것이 어떤 이론들이 돈 많고 권력이 있는 사람들에게 환호를 받았는가 하는 것과 정말 상관이 없을까? 아마도 대다수 학자는 분명 수학자나 물리학자 이상으로 양심적일 것이다. 그들은 그저 자신의 주장을 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해도 그들은 자본에 의해 선택되고, 자본에 의해 선전된다. 스스로는 그저 자신이 믿는 바를 주장했겠지만 그 주장 중에서 거대 자본이 좋아하는 주장을 하는 학자들이 더 큰 목소리를 냈을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경제학이라는 학문의 공평성을 논하는 것은 역사를 한국 사람끼리 모여서 논하며 이 역사는 일본 사람, 중국 사람, 미국 사람 모두에게 공평한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나 다름없는 거 아닐까?
우리는 인생의 법칙을 모른다. 인생의 의미가 뭔지 객관적으로 써 놓은 책도 없다. 이 세상에는 좋은 아빠나 엄마가 되는 법에 대한 조언은 많지만 사실 공식적으로 누구나 인정하는 이게 좋은 아빠고 엄마라는 객관적인 기준은 없다. 그래도 산다. 결혼을 하거나 아이도 키운다. 그날그날 사안마다 상식과 우리의 가치관에 기대어 대중적인 대처 방법을 쓰면서 그냥 산다. 삶에 대한 전체적이고 큰 그림이 없어도, ‘인생의 의미는 무엇인가’ 하는 질문의 정답을 몰라도 말이다.
우리 모두는 이렇게 사는데 종종 경제에 대해서는 다르게 생각한다. 경제학이라는 어떤 객관적인 학문이 존재하고 경제에 대해서 어떤 진리를 알기 때문에 경제가 존재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경제를 이해하지 못해도 대증적인 정책을 펼 수 있고 현상학적인 이론을 만들 수 있다. 실업자가 큰 문제면 그런 문제를 완화하는 정책을 펴는 것이고 빈부격차가 사회적 부작용을 만들면 그걸 완화하는 정책을 펴는 것이며 그러기 위해서 지극히 단순하고 상식적인 모델을 쓰는 것이다.
내년의 예산이 왜 꼭 이렇게 분배되어야 하는가에 대해서 전문가들의 합의가 있기 때문에 그렇게 하는 게 아니다. 복잡한 이론이 없어도 우리의 상식과 윤리와 철학에 따라서 행동할 수 있다. 지나치게 복잡한 이론은 오히려 문제를 만든다. 문제는 주로 우리의 상식과 윤리와 철학, 무엇보다 우리의 책임감에 있는데 복잡한 이론은 그걸 대중으로부터 숨기는 효과가 있다.
설사 경제를 객관적 과학으로 이해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해도 그렇다. 몇백 년 전의 세상을 돌아보자. 그러면 오히려 의사에게 갔던 것이 더 위험한 일일 수 있었다는 느낌을 받는다. 스스로를 의사라고 주장했던 사람들은 귀신을 믿는 무당 같은 사람이었다. 세균이 뭔지도 몰랐다. 페니실린 같은 항생제도 없었다. 그러니까 전염병 같은 걸로 아프다고 의사를 찾아갔던 사람들은 온 가족이 병에 걸렸을 것이다.
그것이 어려운 일이라고 해도 경제를 이해하고자 하는 학문적 노력을 중단해서는 안 된다. 이론도 개발하고 테스트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과학 이전 시대의 의학이 주는 교훈도 잊지 말아야 한다. 경제를 살릴 수 있다고 주장하는 돌팔이들이 사실은 경제를 더욱 심하게 망치는 주범일 수도 있다.
우리가 믿을 수 있는 것은 과학이고 배워야 하는 것은 철학이며 경제적 상식들이다. 그런데 경제학은 아직 과학이 되지 못하고 그저 과학의 외피를 두른 개인적 사상들이다. 엉터리 약장수들에게 속지 않으려면 가장 먼저 배워야 하는 것은 이것이다.
원문: 나를 지키는 공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