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영에 필요한 스킬셋은 뭘까요. 경영은 르네상스형 인간이 필요한지라 꼽자면 한도 없지만, 저라면 하나씩 소거해 나가도 마지막까지 들고 있을 하나는 ‘인간에 대한 통찰‘입니다. 재무나 전략으로 단기적인 성과를 낼 수는 있지만, 결국 그걸 이뤄내고 지켜내고 더 키우는 건 항상 ‘사람’을 통해야 하니까요. 사람만 잘 안다고 사업이 저절로 되지 않겠지만, 이 부분이 부족하면 항상 한계를 노정하거나 추락을 경험합니다.
그런 면에서 창의성이 유일한 핵심 역량이 될, 애니메이션 스튜디오 이야기는 인간 경영의 가장 깊은 고민이 녹아 있는 사업입니다. 에드윈 캐트멀(Edwin Catmull)은 평생을 이 부분에 대해 고민하고 실험하고 실패에서 배워가며 실전 연구를 했습니다. 결과로 17년간 내놓는 작품마다 박스오피스 1위를 차지하는 괴력의 조직적 창의성을 달성했습니다. 그 내용을 담담히 적은 책입니다.
〈토이 스토리〉처럼 우리가 아는 유명한 애니메이션 제작 과정이 책의 줄기를 잡아주어 흥미를 잃지 않고 이야기를 따라갑니다. 그러나 화려한 겉모습의 뒷면이 인상적이지요. 회사가 언제 망할지 살아날지 기약도 없이 만든 〈토이 스토리〉를 비롯해 제작 시스템의 실패로 다 갈아엎고 작품의 퀄리티라는 회사의 가치에 천착해 흥행뿐 아니라 회사의 문화까지 건져낸 이야기는 흥미 이상입니다. 결과로 보면 쉽지만, 당면했을 때는 수많은 선택지에서 골라야 하는 어려운 결정이니까요.
캐트멀의 내공은 단단합니다. 예컨대 실행하지 않는 구호성 비전은 가방에서 떨어져 나온 손잡이 같다는 표현은 이것만 고민하지 않은 사람은 쉽게 떠올리기 어려운 비유라고 생각합니다. 또 균형은 정적인 상태가 아니라 동적인 밸런싱이라는 말에 저는 무릎을 탁 치며 공감했습니다.
픽사 초기에는 창의성을 극대화하는 방법에 신경을 썼다면, 후기에는 커진 조직에서의 창의성을 유지하는 방법이 주된 고민이었던 캐트멀입니다. 사람은 많아지고, 의견은 다양한데, 전에 나온 모든 작품이 개봉 첫 주 박스오피스 1위를 달성하는 엄청난 기록이 후배에게 주는 중압감. 이 속에서 창의성은 어떻게 만들어야 할지 고민스러운 상황이지요.
결국 공포의 해결과 소통, 신뢰라는 일견 평범한 답이지만, 이를 어찌 실행했는지가 눈여겨볼 부분입니다. 경영진이 솔선수범하고, 비전과 방향성을 일관되게 적용하되 직원의 자발적 참여를 이끄는 다양한 트리거는 한 경영 천재가 슥슥 그린 도안이 아닙니다. 공학도 출신이 경영이란 책임을 떠맡아 가설과 실험과 분석이라는 틀 위에서, 벽돌 하나하나를 손에 피가 배어가며 쌓아 올린 건물 같은 맥락에서만 이해됩니다.
픽사 유니버시티를 통해 직급이나 부서를 넘는 약한 고리(weak link)를 만든 점과 고용계약에 대한 새로운 관점도 제겐 배움이었습니다. 계약 기간이 존재하면 상사는 저성과 직원이 있어도 고용계약의 만료까지 기다립니다. 저성과 직원은 영문도 모르다가 계약 종료 직전에 문제가 있다는 걸 알게 되지요.
반면 우수한 직원이라면 회사는 계약 기간 이전이라도 잡으려고 더 노력하고, 직원도 회사가 좋아 자발적으로 남으면 만족도가 올라가기 때문에 고용계약은 회사에 실일 뿐 득이 아니라고 단언합니다. 그리고 놀랍게도 캐트멀의 회사는 고용계약서를 작성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제가 스타트업 대표와 이야기할 때 ‘창업자는 회사의 영혼’이라는 표현을 자주 하는데 그걸 몸소 보여준 캐트멀입니다. 모르몬교의 구도자적 성실성으로 한 조직에 바친 생애는 최고의 창의성 조직인 픽사로 물화했습니다. 책을 읽으며 많이 배우고 같이 기뻐할 수 있는 건 저자의 자세가 한결같이 프런티어적이라서 그럴 것 같습니다.
기억해두고 싶은 말
스토리가 흡인력 있으면, 와이어 프레임 상태로 잠깐 나타나도 관객은 눈치를 못 챈다.
픽사는 기술 회사가 아니라 스토리 회사다.
신뢰는 공포의 해독제다.
경영자의 임무는 리스크 예방이 아니라, 직원의 회복 능력을 키우는 것이다.
의도가 유지된다면, 목표는 바뀔 수 있다. 그 반대가 아니다.
창의성은 무관한 아이디어의 예상치 못한 결합이다.
문제도 예상할 수 없지만, 문제를 해결하는 인간의 능력도 예상하지 못한다.
임의성을 처벌하지 마라. 다음에는 숨긴다.
창의성의 적은 둘이다. 착각과 고정관념이다.
픽사가 돈도 안 되는 단편 애니메이션을 만드는 이유는 두 가지다. 새로운 기술의 실험과 신인의 검증.
책에서 잡스를 다시 만나는 재미도 상당합니다. 픽사의 소유주이자 코파운더이기 때문에 캐트멀은 잡스와 오래 알고 지냈습니다. 잡스는 죽기 전 세 가지 소중한 것을 말했다고 합니다. 가족, 애플, 픽사. 오만한 청년 시절부터 죽기까지 픽사의 수호자이자 영혼을 불어넣는 데 도움을 줬던 잡스입니다. 그리고 캐트멀만큼 그를 잘 아는 사람도 많지 않지요.
공격적 언사를 소나(sonar)처럼 쏘던 오만한 천재가 원숙한 천재로 변해가는 내용을 접하는 것도 의외의 기쁨입니다. 특히 잡스에 애정을 갖고 이야기들을 탐독하는 제겐 선물 같은 즐거움이었습니다. 마지막에 한 챕터를 특별히 할애해 잡스에 정통한 시각의 모습 그리고 마지막 함께 보낸 시간을 읽을 땐 마음이 뜨거워질 지경이었지요.
Inuit Point ★★★★★
최고의 전략은 논문으로 발표해도 남이 따라 하지 못하는 실행능력이라고 했습니다. 책의 내용 중 한두 개 마음에 드는 걸 따라 해도 약간의 개선은 있겠지만 지속 가능하고(sustainable) 포괄적인(holistic) 모방이 아니면 큰 효과는 없으리라 생각합니다.
경영의 지침으로는, GE 이후로 이렇게 재미나게 읽은 책이 없네요. 전체적인 분량이 많고, 자전적 성격을 강하게 띠고 있어 지루할 수도 있는데, 어느 정도 상황에 몰입되면 흡인력 있는 이야기입니다. 다만 처한 위치에 따라 다르게 읽힐 겁니다.
기업 외적 상황이나 아직 의사결정이 주가 되지 않는 포지션이면 그냥 좋은 말 대잔치로 느껴질지도 모르겠습니다. 직접 경영을 죽도록 고민하는 역할의 사람이라면 가뭄의 단비 같은 책이 될 겁니다. 이런 알이 꽉 밴 책 읽은 지 저는 꽤 오래됐습니다. 별 다섯 꽉꽉 채웁니다.
원문: Inuit Blogg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