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락도 살인사건>이었나, 그냥저냥 여름밤 납량특집으로 봤던 영화가 있었다. 실화라고 뻥을 치는 마케팅으로 화제를 낳았던 영화였는데 너무 피칠갑이 진해서 보기에 좀 편치 않았던 영화였다.
거기에 보면 영화의 주요한 복선 중 하나로 “이장이 들여놓지 말아야 할 것을 들여 놨다.”는 쪽지가 등장한다. 그 정체는 임상실험용 약이었고 그 약의 부작용으로 환각에 빠진 사람들은 서로를 처참하게 난도질하며 죽어간다. “들여놓지 말아야 할 것”을 들여놓은 결과였다.
1948년 4월 3일 새벽 제주도 곳곳에 봉화가 솟았다. 끔찍한 이름 4.3의 시작. 그 후로도 오랫 동안 제주도라는 아름다운 화산섬을 피에 젖은 유채꽃밭과 주검 널린 한라산으로 대변되는 참상으로 얼룩지게 한 비극의 서막이었다. 그리고 제주도에 들어와 있던, 그리고 그 뒤 육지에서 건너온 신생 대한민국의 군인과 경찰들은 글자 그대로의 대량학살의 주인공들이 된다.
“제주도민 30만 중 얼마가 죽어도 좋다.”는 자유의 수호신들
그 참상의 면면과 사연을 되짚고 싶은 마음은 없다. 분명한 것은 4.3의 시작이 설사 당시와 오늘날의 우익들이 주장하는 대로 ‘빨갱이들의 대한민국 말살 책동’이었다고 하더라도, 제주도에서 공권력이 벌인 행동은 결코 ‘들여놓지 말아야 할’ 것들이었다.
“제주도민 30만 중 얼마가 죽어도 좋다.”는 경찰 총수와 그에 못지않은 군대 지휘관은 그들이 보호해야 할 국민과 맞서야 할 적을 구분하지 않았고 그 모두를 ‘쓸어버림’으로서 자신들의 목적을 달성하려 했던 것이다. 마치 왕년의 미군에게 “좋은 인디언은 죽은 인디언일 뿐”이었듯 그들에게 “좋은 빨갱이란 죽은 빨갱이”일 뿐이었다.
어린아이를 총검으로 받았던 난징 대학살의 일본군의 잔인성은 제주도 4.3을 진압하던 대한민국 공권력과 그들이 고용한 깡패들 사이에서 스멀거리며 부활했다. 목적을 위해서 수단이 의미가 없고, 적으로 정해진 집단을 제거하는 데에 이유와 기탄이 없는, 오히려 그런 자신들을 자유의 수호신쯤으로 자기최면을 거는 기이한 괴물의 사고는 이때 본격적으로 생겨났다.
이역(異域)같이 다른 풍경에 말까지 선 외딴 섬에서 그들은 ‘싹쓸이’의 효율성을 체득한다.
복수와 진압, 전면전과 대학살
4.3의 무서움이 제주도에 국한되지 않는 것은 그 싹쓸이의 악마성이 곧 뭍으로 옮아갔고 좌익과 우익은 사생을 가르는 판갈이로 나아갈 수 밖에 없었던 역사 때문이다. 여수와 순천을 장악한 14연대의 좌익들은 제주도의 복수를 단행했고 진압군은 그에 못지않은 피로 갚았다.
그리고 마침내 터진 전면전에서 패퇴하는 국군과 경찰은 “원수의 하나까지 쳐서 무찌르는” 무시무시한 대학살을 전개했다. 나찌는 몇 년 동안 수백만 명을 죽였고 캄보디아도 비슷했지만 대한민국에서는 대충 두 달 동안 수십만 명의 민간인들의 목숨이 사라졌다. 남녀가 없었고 노소도 없었다. 여자는 더 독한 빨갱이로, 자식은 빨갱이의 씨인 죄로, 노인은 빨갱이를 낳은 죄로 죽었다.
이미 한반도는 광기에 휘말려 있었다. 만약 국군의 마지막 방어선이 무너지고 부산항까지 인민군이 장악했다면 또 다른 싹쓸이가 행해졌을지도 모르고, 그 가능성은 여순반란 당시 반란군의 ‘반동 처단’의 양태를 보면 충분히 유추할 수 있다. 또 이쪽의 광기는 그 후로도 면면히 이어져 광주항쟁의 싹쓸이로, 멱 감는 아이들에게까지 총을 쏘아붙인 야만으로 세습된다.
우리가 4.3을 기억해야 하는 이유
4.3은 그래서 기억해야 할 것이다. 좌와 우 가운데 누가 정당했냐를 가리는 것은 의미가 적다. 그 싸움의 와중에서 깃털보다도 가벼워져야 했던 사람들의 목숨과 새털을 불어 버리듯 생명들을 취했던 그 세월들을 반성하고 돌이키지 못하면 그 야수성은 수시로 발현될 것이고 언제 우리 자신이 야수로 화할지 모르기 때문이다. 언제 우리의 부드러운 생살을 찢고 눈과 귀와 코 없이 이빨과 발톱만 그득한 괴물이 튀어나올지 모르기 때문이다.
4.3은 들여놓지 말아야 할 괴물을 우리 땅 안에 들인 것이나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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