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그란 어깨에 가방을 걸치기 시작했을 때부터 우리는 수많은 아침밥을 걸러왔다. 시간도 없는데 밥통을 들고 등교를 할 수 없으니까. 도시락을 싸왔지만 아침부터 책상에 3첩 반상을 만들 수도 없으니까.
스타벅스에서 나온 이천햅쌀 라떼를 마시며 생각했다. 비록 아침에 밥을 먹을 수는 없지만 ‘마실 수’는 있지 않을까? 그 뒤로 나는 아침밥을 마시러 마트를 찾았다. 농부의 눈으로 음료에 벼나 콩이 그려져 있으면 모두 장바구니에 담았다. 이것 참 풍년이구만.
0. 실험 : 현대판 숭늉을 찾아라
그동안 많은 음료를 비교해서 마셔봤다. 커피믹스, 망고음료, 라면국물까지도. 하지만 곡물음료를 비교하기 위해서는 더욱 체계적인 실험방법이 필요했다. 단순히 맛이 아닌 ‘아침밥 대용으로 가능성’을 알아야 했기 때문이다. 결국 3단계 방법으로 곡물음료를 비교했다.
- 매일 아침 한 가지의 음료를 마셔본다
- 비교를 위해 모든 음료를 한 컵씩 마시고 비교 기록한다
- 촬영을 하며 다시 마시고 부족한 부분은 보충한다
총 17종의 음료를 1달 동안 마셨다. 안타까운 것은 이 실험의 발단이 된 스타벅스의 ‘이천 햅쌀 라떼’가 2번 실험단계에서 불참하였다(판매 시즌 종료). 결국 최종 16종의 음료가 본선에 들어왔다. 자 이제 음료를 마실 차례다. 곡물 음료계의 빕스라고 할까? 보기만 해도 배가 부른 것 같다. 5시간 가까이 곡물음료들을 비교한 뒤에야 깨달았다. 이 돈으로 점심을 사 먹는 게 낫겠다는 것을…
1. 이미지 : 나 이런 음료를 마시는 사람이야
음료는 카톡 상태 메시지 같은 것이다. 책상 위에 있는 음료는 ‘나 오늘 무엇을 마셨어’는 물론 ‘나는 이런 취향의 사람이에요’라는 것을 보여준다. 음료가 주는 메시지는 생각보다 강력하다. 음료를 통한 편견을 뛰어넘고 싶다면 ‘고급 스포츠카를 타고 출근’하는 방법밖에 없다(…) 뚜벅이 마시즘. 음료라도 고급지게 마셔본다.
이 부문에서 가장 돋보인 것은 ‘이천 햅쌀 라떼(스타벅스)’였다. 쌀알이 동동 떠있는 힙한 비주얼. 하지만 더 이상 판매하지 않아서 다음 추수철을 노려본다. 그다음에는 ‘우도땅콩라떼와 해남고구마라떼(세븐일레븐)’와 ‘핸디밀(풀무원녹즙)’이 뒤를 이었다. 우도땅콩라떼와 해남고구마라떼는 카카오톡 이모티콘 같이 생겼고, 핸디밀은 바스키아의 낙서 같은 감각적인 그림이 좋았다.
아쉬웠던 부분은 ‘베지밀 검은콩&16곡 두유(정식품)’이다. 이름도 거창한 이 녀석은 16화음 휴대전화 같은 레트로 한 디자인을 가지고 있다. 마치 건강을 챙기는 아빠가 마실 것 같다고? 맞다. 우리 아빠가 마신다.
2. 꾸덕함 : 끈질긴 음료가 배 속에 오래 남는다
우리는 음료의 매력을 양파껍질 까듯 한 겹, 한 겹씩 벗겨낼 필요가 있다. 이번에는 컵에 따를 때의 꾸덕함이다. 평소라면 목에 깔끔하게 넘어가는 음료를 선호하겠지만, 밥 대신이라면 이야기가 다르다. 질척거리는 녀석이 뱃속에서도 오래 살아남을 것 같거든.
꾸덕함으로는 핸디밀. 그중에서 ‘검은깨&흑미’가 압도적이었다. 병을 따라 내려오는 음료의 속도가 버퍼링에 걸렸다. 조금만 더 느렸으면 깨죽이라고 불러도 좋을 뻔했다. 이어 ‘퀘이커 오츠&밀크’, ‘맷돌 방식으로 만든 국산 검은콩&귀리 무가당 두유(시작은 찰랑였으나 끝이 꾸덕함)’가 중량감을 보여줬다. 나머지는? 굉장히 찰랑거렸다. 특히 비락식혜는 탬버린 치듯이 찰랑였다.
3. 맛 : 달거나 너무 건강하거나
맛 평가는 주관적이다. 심지어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도 달라서. 이 부분에 대해 작성할 때는 항상 조심스럽다. 다행인 점은 곡물음료의 대부분이 두유와 식물성 우유 스타일이라는 것이다. 나는 둘 다 잘 못 마시거든(?)
때문에 개인적인 취향을 고르라면 ‘비락식혜’다. 사실 이 녀석은 두유들 사이에 있으니까 그렇지. 아침에 마시면 식혜임에도 진짜 식혜가 그리워지는 맛이 난다. 남은 녀석들의 승부는 달거나 담백한 맛이다. 단 것은 단 것대로 취향이었지만, 전혀 달지 않은 녀석들은 역설적으로 건강한 듯한(기분 탓) 맛이 났다. 특히 ‘맷돌… 두유’는 맛까지 맷돌로 갈아버린 것 같았다.
5. 향 : 입에서 나는 향을 풍선에 담아보았습니다
비즈니스는 에티켓이다. 직장에서 음료를 마신다면 나의 코보다 상대의 코를 존중할 필요가 있다. 무슨 말이냐고? 음료를 마시고 나에게 나는 향(이라고 쓰고 냄새라고 읽는다)이 날지 고민해야 한다는 것이다.
문제는 우리의 게으른 코는 자신의 냄새를 못 맡는 안하무인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보관하기로 했다. 풍선에 내 입김을 보관하고, 양치를 하고, 다른 음료를 마시고, 다시 입김을 보관하는 것이다. 입냄새의 뮤지엄(…). 하지만 마시는 것보다 풍선을 부는 게 더 힘들었다. 5개 정도 불고 나서 포기. 풍선에는 고무 냄새만 있었다.
그렇다면 학계에 인증된 방법을 쓰는 수밖에. 바로 손등에 혀를 핥고, 10초간 떨어져 있다가 30cm 거리에서 코로 향을 맡는 ‘셀프 입냄새 실험(The wrist – lick test)’를 하는 것이다. 고양이도 아니고 손등에 혀를 핥고 냄새를 맡다니. 이번에는 혀클리너까지 동원해서 혀를 포맷하고 다시 냄새를 맡았다. 사무실에 혼자 있어서 다행이다. 아니 누가 봐도 못 본 척해줬을 것 같다. 너무 고맙다.
아쉽게도(?) 침 본연의 향 외에 다른 흑화 된 향이 나는 녀석은 별로 없었다. ‘베지밀 검은콩 16곡 두유’나 ‘맷돌 방식으로 만든 국산 검은콩&귀리 무가당 두유’ 정도가 남는 향이 살짝 강하다고 느꼈을 뿐이다. 꼬리가 길면 밟히는 법. 그렇다. 이름이 길 수록 입에 남는 향이 강하다!(아니다)
6. 포만감 : 우리의 배는 방전될 수 없어
그렇다. 곡물음료는 휴대전화로 치자면 ‘보조 배터리’ 같은 녀석이다. 배가 방전되어 소리를 지르기 전에 위를 달래주어야 한다. 랩노쉬 같은 다이어트를 표방한 음료는 개인적으로 효과는 확실했지만 입맛까지 떨어뜨리는 아쉬움이 있었다. 곡물음료들은 다음 식사를 기다릴 정도의 포만감을 주었다.
식사 대용식으로 나온 ‘마시는 한끼 시리즈’와 ‘핸디밀’은 용량 대비 포만감이 좋았다. 아침에 우유를 소화하지 못하면 ‘퀘이커 오츠밀크’나 ‘매일 두유’쪽이 내 뱃속을 지켜주는 선택이 될 수 있다. 사실 ‘미숫가루 우유’와 ‘베지밀 검은콩 16곡 두유’는 사이즈가 너무 커서 나의 배뿐만 아니라 사무실 모두를 배부르게 할 수 있었다.
7. 접근성 : 노력의 천재만이 아침음료를 마실 자격이 있다
맛과 향과 포만감 모두 중요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꾸준함이다. 한 번 마시고, 다음부터 안 마시는 일을 반복하는 일이 많기 때문이다. 각각의 장점을 언급해주는 것이 좋겠다. ‘아침햇살’이나 ‘매일두유’는 어떤 마트와 편의점에 가도 보이는 장점이 있다. 물론 너무 흔하게 볼 수 있어서 고르지 않을 수 있다는 게 함정.
‘마시는 한끼 시리즈’는 CU편의점에서만 구매가 가능하지만, 온장고와 냉장고 모두 있어서 날씨에 따라 골라서 마실 수 있다. ‘핸디밀’은 배달음료다. 따로 사러 나가지 않아도 되지만, 구몬 숙제가 밀린 아이의 심정을 느낄 수 있다. 뭐든 꾸준히 마시다 보면 빛을 보겠지. 적어도 업무 중에 꼬륵 소리를 내지는 않겠지.
곡물음료는 우리에게 무엇을 남겼나?
음료의 남은 경쟁지는 아침밥이라고 할 정도로 많은 식사 대용 음료가 나오고 있다. 그중 우리의 식습관과 비슷한 맛과 영양의 곡물음료들은 미래에 한 발 와 있는 녀석들이라고 봐도 좋을 것 같다. 여러 음료를 마셨고 모두 좋은 음료였지만, 매일매일 마셔야 한다면 이 정도를 고를 수 있을 것 같다.
- 아침햇살 : 너무 좋지도 싫지도 않은 꾸준한 익숙함
- 핸디밀 아몬드&퀴노아 : 아기입맛러들에게 추천, 용량 대비 배에 오래 생존
- 마시는 한끼 고구마 : (돈만 있다면) 편의점은 우리의 냉장고니까
- 퀘이커 오츠&밀크 스위트 : 맛있게 다이어트를 하는 기분이 든다
- 베지밀 검은콩 16곡 두유 : 진격의 거인 같은 용량, 여럿이서 나눠서 레이드
하지만 역시 취향차다. 17가지나 마셨는데 아직도 많은 곡물음료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아침밥은 항상 거르지만 마음만은 언제나 ‘아직 배고픈’ 히딩크… 아니 직장인과 학생을 위한 아침음료는 무엇일까?
원문: 마시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