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봉준호 감독 영화 전반에 대한 약한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봉준호 감독하면 이제 한국에서 모르는 사람이 거의 없습니다. 봉준호 감독의 영화적 특징도 많이 알려져 있죠. 뜬금없이 유머 등장하기, 장르 뒤틀기, 낯설게 하기, 영화의 톤 바꾸기…. 여러 말로 설명되지만 비슷비슷해 보입니다. 핵심은 친숙한 것과 이질적인 것을 함께 다루는 데 있습니다. 조금 더 자세히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어디선가 본 듯한 배경,
어디서도 보지 못한 장면.
한 번 쭉 볼까요?
〈플란다스의 개〉 (2000)
아파트에서 벌어지는 개 실종 사건이 영화의 기본 배경. 그러면 개와 관련된 감동적인 에피소드가 나오거나 개를 훔친 범인을 찾아 단죄하거나 해야 합니다. 그러나 이야기는 독창적으로 진행됩니다. 개를 찾으려는 사람과 개를 없애려는 사람, 개를 먹으려는 사람이 얽히면서 한바탕 소동이 벌어집니다.
〈살인의 추억〉 (2003)
연쇄살인 사건이 벌어졌고 이제 범인을 찾아야 합니다. 그런데 사건은 미궁으로 빠지고 끝내 범인이 누군지 모릅니다. 범인을 못 잡는 수사 영화. 카타르시스가 없는 스릴러. 당시 많은 사람이 영화의 실패를 예측한 이유였습니다. 하지만 봉준호 감독은 그게 이 영화의 핵심이라고 생각하고 그대로 밀고 나갔죠. 이건 독특하게도 실패한 수사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동시에 한국 현대사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고요.
〈괴물〉 (2006)
장르적으로 구분하면 우리에게 친숙한 괴수 영화. 그러나 〈괴물〉은 괴수 영화의 지루한 클리셰를 따르지 않습니다. 꼭꼭 숨기다가 영화 후반부에 스펙터클하게 등장해야 할 괴물이 영화 초반에 등장해 버립니다. 벌건 대낮에, 넓은 한강에.
〈마더〉 (2009)
어머니의 희생, 하면 가장 잘 어울리는 배우. 국민 어머니 김혜자를 캐스팅합니다. 그리고 그 이미지를 극단까지 가져가 반전시킵니다.
〈설국열차〉 (2013)
빙하기의 지구라는 익숙한 배경. 그런데 하필 그 무대가 움직이는 기차 내부입니다. 덕분에 온갖 새로운 영화적 이미지가 쏟아집니다.
〈옥자〉 (2017)
대기업의 횡포와 야심이라는 배경이지만 키워드 조합이 낯설어요. 슈퍼돼지와 시골 소녀. 창의적이군요.
이렇듯 봉준호 감독은 장르적 관습을 배신하고 그 위에 영화적 상상을 펼칩니다. 그래서 그의 영화들은 대부분 상상력이 뛰어나고 독창적입니다. 누가 보아도 아, 이거 봉준호 영화구나, 할만한 특징들이 존재하죠. 그래서 많은 사람이 물어본다고 합니다. 어떻게 그렇게 천연덕스럽게 장르를 뒤섞는지. 어떻게 영화의 톤을 자연스럽게 바꾸는지.
봉준호 감독의 대답은요? 자신은 그런 적이 없다고 말합니다. 의도해서 배치하거나 의식해서 만든 것이 아니라고 말해요. 언뜻 듣기에 그게 가능한가 싶습니다. 상식과 반대되는 이야기처럼 들리죠. 보통 많은 사람은 창작물의 뛰어난 특징이 창작자의 의도에서 비롯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적지 않은 경우, 매우 뛰어난 특징들은 창작자가 의도하지 않았음에도 발견됩니다. 창작자의 태도에서 비롯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저는 봉준호 영화의 핵심적인 특징이 그의 의도에서가 아니라 태도에서 출발한다고 생각합니다.
정성일 영화평론가가 봉준호 감독과 진행한 인터뷰가 있습니다. 거기서, 봉준호 감독은 자신이 소유하고 싶은 영화적 순간들에 대해서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자신의 영화 창작 이유라고 밝힙니다.
좋은 영화가 뭔지 아직 모르겠지만 그런 의견에는 100퍼센트 공감합니다. 저도 그런 모멘트를 만들고 싶어 영화를 만들거든요. 영화든 만화든. 소설에는 불가능한. 여태껏 본 적이 없는 영화적인 모멘트를 만들고 싶어 저도 영화를 하는 거 같아요.
정성일 평론가는 이걸 시네마틱 모멘트라고 부릅니다. 이것을 뭐라고 부르든, 우리는 이게 무얼 의미하는지 이미 압니다.
〈플란다스의 개〉에서 노란 옷을 입은 무리가 아파트 옥상에 등장해 배두나를 응원할 때, 〈살인의 추억〉의 후반부에 박해일을 보며 비 맞는 송강호가 대사를 던지는 순간이 그렇고, 〈괴물〉의 초반부 한강에 등장한 괴물이 미친 듯이 뛰어다니거나, 〈마더〉의 마지막, 혜자가 허벅지에 침을 놓고 무리의 틈에 섞여 춤을 출 때, 〈설국열차〉에서 성냥불이 켜지고 그걸 횃불로 만들어 기차의 앞으로 나아갈 때가 그렇습니다.
우리는 봉준호 감독의 모든 영화에서 시네마틱 모멘트를 찾을 수 있습니다. 이런 순간들을 뭐라 정의하기는 참 힘듭니다. ‘영화적’이라는 말을 정의하기도 어렵고요. 그러나 분명 멋진 순간들입니다. 현실에선 목격할 수 없는 장면들. 그래서 현실의 의미를 바꿔버리는 장면들. 재기 넘치면서도 감정적으로 묵직하고 때로 기이하면서 동시에 아름다운, 그런 순간들이요. 봉준호 감독은 이런 장면을 위해서 영화를 만듭니다.
KAFA에서 기획한 한 강의에서, 봉준호 감독은 자신이 오랫동안 품어온 이미지들에 대해 설명합니다. 자신의 경험과 상상력에서 길어 올린 이미지로 창작한, 시네마틱 모멘트에 대해 설명하죠. 봉준호의 마지막 말이 인상적입니다.
내가 보고 싶은 영화를 찍습니다. 본인을 만족시키려고 애써보세요.
봉준호 감독에게 영화 창작의 이유는 간단합니다. 내가 보고 싶기 때문입니다. 누가 뭐라든 내 마음에 드는 영화를 찍는 것이 그의 첫 번째 목표입니다.
‘내가 하고 싶어서 한다’는 말은 곱씹어 보면 무척 감동적입니다. 삶의 많은 순간에 우리는 다른 무언가를 위해 행동합니다. 혹은 그렇게 행동할 것을 강요받습니다. 부모님과의 관계 속에서, 사회의 그물망 속에서, 모든 것은 경제 논리입니다. 남들에게 우습게 보이면 안 되고 남들을 은밀하게 제압하는 기술이 필요합니다.
그런 사회가 잘못되었다는 말은 아닙니다. 원래 세상은 냉정한 법이잖습니까? 관계와 사회 안에서 경쟁은 불가피하니까요. 그런데 뒤처지지 않기 위해 노력하다 보면요, 내 행동이 원래 목적을 잃어버리는 순간이 옵니다. 이 전공을 내가 하고 싶어 선택했는지, 이 회사를 내가 원해서 지원했던 것인지 헷갈리죠. 내 인생을 내가 살고 싶은 대로 주도해온 것인지 남들이 사는 대로 따라 해온 것인지 확신할 수 없게 됩니다.
뭐 당연합니다. 누구나 한 번 살기 때문입니다. 이건 물질적인 성공과 아무런 관련이 없습니다. 정신적인 만족의 문제죠. 그래서 만인의 고민입니다. 내가 원하는 삶은 무엇일까. 그러나 남들처럼 사는 게 옳지 않다는 말은 아닙니다. 어떻게 살든 자신이 행복하면 그만이겠죠. 그러나 이게 문제가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젠 내 목적과 사회의 요구를 구별하고 싶을 때가 그렇습니다.
쭉 살다 보면, 내가 어떻게 생겨먹은 사람인지 알고 싶어질 때가 있습니다. 당신이 만약 30살이라면, 30년 동안 함께 살아온 나에 대해서 문득 궁금해지게 됩니다. 그리고 내가 나를 정말 모른다는 사실에 뜨악 하는 순간이 있습니다. 주변의 쓸데없는 말들을 너무 많이 들었구나. 나는 그냥 살아지는 대로 살아왔구나. 그러면 이제, 내가 하고 싶은 말은 뭔지가 정말로 궁금해지게 됩니다. 이런 혼란에 오래 빠져 있을수록 정처 없고, 힘이 빠집니다.
그런데 갑자기 힘 빠지는 얘기를 왜 하냐고요. 봉준호 감독과 같은 창작자의 태도는 그런 힘 빠진 사람들에겐 위로가 되거든요. 봉준호는 자신이 만들고 싶은 한 장면을 상상하고는 그 이미지를 오랫동안 품습니다. 그리고 때가 되면, 그 이미지를 영상으로 만듭니다. 관객이 어떻게 반응할지 고려하지 않습니다. 창작 이유가 곧 목적입니다. 만들고 싶기 때문에 만들어요.
봉준호 작품의 시네마틱 모멘트가 독창적이면서도 기억에 오래 남는다면 그건 봉준호 감독이 이미 오래전부터 그 장면에 열광했기 때문입니다. 자기가 이미 너무 좋아한 나머지 마음속에 오래 품던 순간들을, 결국 영화의 한 장면으로 만들어냈기 때문이죠.
누군가가 깊게 좋아한 것들은 어떤 사람들에겐 큰 감동이 됩니다. 왜냐하면 좋아한다는 마음은 그 자체로 목적이기 때문입니다. 이유가 있어서 좋아하는 사람이 있나요? 좋은데 이유 없어요. 무얼 좋아하는 사람은 그냥 좋은 겁니다. 좋음은 그렇게 간단하면서 진실한 감정입니다. 그리고 그런 진실함과 순수함이 강렬하게 전달될수록 사람들은 더 오랫동안 위로를 받습니다.
저는 이것이 영화의 역할, 나아가서 예술의 역할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람들의 기억에 남아서 길게 위로가 되는 거 말입니다. 오래전, 문학 평론가 김현은 문학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인간에게 유용한 것은 대체로 그것이 유용하다는 것 때문에 인간을 억압한다. 문학은 써먹지 않는다. 문학은 유용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인간을 억압하지 않는다.
저는 문학의 자리에, 영화나 예술을 넣어도 같은 의미가 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유용한 것을 위해 대부분의 시간을 투자합니다. 그러나 투자의 과정에서 우리는 종종 억압받습니다. 내 의지와 반대되는 일도 해야 하거든요. 그럴 때 전혀 유용하지 않아서 순수한, 진실한 창작물을 접하면 잠시 쉬어갈 수 있습니다. 거짓말하지 않아도 되는 순간에 잠시 마음을 누일 수 있습니다.
봉준호 감독은 자신의 영화를 어딘가 써먹기 위해 만들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가 만드는 많은 영화적 순간들은 창작자의 어떤 순수함을 지닙니다. 진실성을 가집니다. 순수하고 진실된 어떤 순간들을 가진 영화는 드뭅니다. 그런 영화는 사람들의 뇌리에 박혀 오래 기억됩니다.
그것이 장면의 순수한 쾌감이든 사려 깊은 메시지든, 중요한 건 창작물의 진실성입니다. 그리고 진심은 사람을 위로합니다. 위로라는 것이 별것 아닙니다. 거짓의 숲에서 잠시 빠져나와 진실한 감정을 느끼는 것. 이것이 위로입니다. 써먹기 위한 것이 아니어도 충분히 의미가 있다. 이렇게 말하는 것이 위로입니다.
반면 우리가 접하는 대부분의 영화는 어딘가 써먹기 위해 만들어집니다. 추석과 설날을 겨냥한 뻔한 패턴의 영화들이나, 관습적으로 반복하는 무성의한 영화들, 한몫 잡기 위해 만들어지는 영화들이 그렇습니다. 그러나 만들 수 있어서 만든 영화들은 만들고 싶어서 만든 영화를 결코 따라갈 수 없습니다.
만들 수 있어서 만든 영화들은 대중성을 고려한다는 명분으로 쓸모없는 유머 한 숟갈, 어울리지 않는 대세 배우 한 숟갈, 어색한 사투리나 괜한 비속어 한 숟갈, 쥐어짜는 감동 한 숟갈로 마치 엉터리 잡탕 요리처럼 만들어집니다.
이런 상황에서 봉준호 감독과 같은 창작자의 태도는 귀합니다. 봉준호 영화의 재기발랄함과 만화적 상상력은 기존 장르 문법 사이사이에 자연스럽게 스며들어 있습니다. 의도하지 않았는데 말이에요. 태도에서 비롯했기 때문입니다. 의도보다 태도가 중요합니다. 예술 창작을 대하는 봉준호 감독의 진심 어린, 혹은 어린아이와 같은 그런 태도 말입니다.
그리고 결국 살아남는 건 치밀하게 의도된 영화가 아니라 진실한 태도의 영화입니다. 로베르 브레송의 말처럼, 우리의 눈과 귀가 강하게 원하는 것은 진실을 말하는 사람이 아니라 진실한 사람이기 때문이에요.
원문: Discus의 브런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