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 <살인의 추억>(2003)에 대한 약한 스포일러와 <케빈에 대하여>(2011)에 대한 강한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XX 모르겠다. 밥은 먹고 다니냐?
송강호의 이 애드립은 영화 <살인의 추억>(2003)에서 가장 중요한 한 마디이면서, 영화의 격을 거의 아트의 경지로 끌어올리는 핵심적인 한 마디였습니다. 왜냐하면 형사 박두만은 원래 용의자에게 일체의 관심도 없었던 인물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마지막엔 이 용의자 박현규라는 사람을 정말로 알고 싶어지죠. 박두만의 변화와 진심. 이것은 영화 <살인의 추억>의 핵심입니다.
박두만은 감으로 수사하던, 전형적인 퇴물 형사입니다. 깊게 생각하는 타입도 아닙니다. 증거 조작하고 용의자 폭행해서 대충 범인 만들어버리는 무능한 형사였죠. 그런 박두만이 난생처음 충격적인 사건을 겪으면서 가치의 지표가 흔들립니다. 감으로 수사해오던 자신이 쓸데없는 짓을 했었다며 수사 수첩을 찢어버리고, 자기 직업에 대해 가지고 있던 근거 없는 자부심을 내려놓습니다.
어떻게 해도 잡을 수 없을 것 같은 범인. 박두만이 느끼는 것은 무력감입니다. 무력한 사람의 반응은 두 가지입니다. 어찌할 수 없는 울분을 그저 삭이거나, 이해할 수 없는 세상을 괜히 원망하는 것. 내부로 무너지거나 외부로 폭발하는 것이죠.
그런데 사실 이런 반응은 너무나 쉬운 반응입니다. 어려운 문제 앞에 직면해서 문제를 풀 수 없을 것으로 보이자 문제지를 찢어버리는 반응이죠. 문제를 정말 풀고 싶어지면요, 야 이거 도대체 어떻게 생겨먹은 문제야? 이런 반응이 나옵니다.
박두만은 이제 정말로 답을 알고 싶어집니다. 그러나 단순히 범인만을 찾고 싶은 것은 아닙니다. 이 끔찍한 사건의 근원을 알고 싶은 것이죠. 그 근원은 바로 범인의 사고방식과 삶의 궤적입니다. 그래서 궁금해집니다. 박현규라는 사람은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면서 사는지, 어떤 과거가 있는지, 진짜 범인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어쩌다 가장 강력한 용의자가 되어서 지금 내 눈앞에 서 있는 건지.
그는 사건 너머 사람에 주목합니다. 그리곤 사람에 관한 총체적인 이해, 박두만은 그걸 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묻습니다. 밥은 먹고 다니냐고, 너 도대체 어떻게 생겨먹은 사람이냐고. 박두만은 절박합니다. 절박하기 때문에 진실됩니다. 바로 이 지점이 사람에 대한 진실한 물음, 사람에 대한 진중한 탐구가 시작되는 지점입니다.
<케빈에 대하여 We need to talk about Kevin>
너 도대체 어떻게 생겨먹었냐, 라는 주제를 아예 전면에 내세운 영화가 있습니다. 원제 <We need to talk about Kevin>(2011), 한국어 제목 <케빈에 대하여>입니다.
영화 <케빈에 대하여>는 그러니까, 케빈이 어떻게 생겨먹었는지를 탐구하는 영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람에 관한 이해를 요구하고 있죠. 사람(Human)에 대한 진지한 물음이 인문학(Humanities)인바, 지금 이 영화는 인문학의 질문을 하고 있습니다. 몇몇 사람들은 이 문제작이 불쾌하고 어렵다고들 하지만, <케빈에 대하여>가 영화 내내 던지고 있는 질문은 사실 간단합니다.
당신은 사람(케빈)을 이해할 수 있습니까?
1. 케빈의 입장
일단, 이것은 물론 케빈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케빈은 태어나면서부터 엄마인 에바에게 사랑받지 못합니다. 케빈의 입장에선 이해할 수 없습니다. 태어나고 보니 자신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 사람에 의해 길러지고 있군요. 이것은 엄청난 불행입니다. 그래서 자신도 엄마를 사랑하지 않기로 합니다. 엄마가 애초부터 자신을 사랑하지 않았듯이, 엄마에 대한 사랑이 애초부터 없었던 아들인 것처럼 행동하는 것이죠. 케빈은 도대체 왜 엄마가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지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어린 케빈으로서 그것을 이해하는 건 불가능합니다. 이해 불능이기 때문에 자신도 이해 못 할 행동을 하는 것이죠. 자신이 자발적으로 사랑받지 못하는 아들이 되는 것이, 자신의 이해 불능을 해소하는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에바가 애초에 케빈을 사랑하지 않았기 때문에 케빈은 에바에게 위악적으로 행동할 수밖에 없었습니다(이런 케빈의 마음을 가장 잘 표현한 문장은 이미 문학평론가 신형철이 쓴 바 있습니다. 저는 신형철이 쓴 문장보다 케빈의 마음을 더 정확하게 표현할 재주가 없습니다).
케빈의 입장에서 이야기를 시작했는데, 이야기하다 보니 케빈의 문제는 에바로 거슬러 올라가는군요. 사람에 대한 문제는 언제나 이렇게 서로 엉겨 붙어 있습니다.
그래서, 이것은 또한 에바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2. 에바의 입장
에바는 여행을 사랑하는 자유로운 사람입니다. 한 군데 지긋이 머무르는 것을 체질적으로 싫어하는 사람인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는 가정을 꾸리기에 부적합한 사람이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이것은 성격과 성향의 문제입니다. 누군가가 자유로운 성향이라고 해서 그런 성향을 비난할 순 없을 겁니다. 잘못된 행동을 비난할 순 있겠지만, 타고난 인격을 비난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요.
그러니 에바의 부족한 모성애를 비난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에바는 원래 그런 사람이고, 에바가 왜 하필 그런 사람인지를 비난하는 일은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우리는 케빈의 문제에서 거슬러 올라와 에바로까지 왔습니다. 그런데 에바를 비난하는 일은 무용하군요. 자, 이제 어디로 가야 하나요?
케빈이 위악적으로 행동합니다. 그런 케빈을 기소하기 위해서 행동의 원인을 찾아 나섭니다. 에바의 부족한 모성애가 원인이었군요.
그런데 모성애가 부족하다는 이유로 한 사람을 기소할 수는 없습니다. 분명 세상에 악은 나타났고, 많은 사람이 다쳤으며, 남편과 딸이 죽었습니다. 그런데 아무도 기소할 수 없습니다. 케빈이 실제로 기소되어 소년원에 있다는 사실은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법은 사건에 관심을 둡니다. 개인에 대한 이해를 전제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너무나 많은 예외가 생기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사건이 아니라 사람에 대해 탐구하고자 합니다. 법은 케빈이 저지른 끔찍한 범죄를 근거로 케빈을 기소했지만, 신기한 것은, 사람에 대해 탐구하다 보면 기소권이 없어진다는 것입니다. 그 누구도 쉽게 비난할 수 없게 되어버려요. 그리고는 무력감에 휩싸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모르겠다. 그리고는 기소할 수 없는 이들이 궁금해집니다. 그래서 이렇게 물어볼 수밖에 없습니다. 밥은 먹고 다니냐?
당신은 사람(케빈)을 이해할 수 있습니까?
몇몇 사람들은 에바의 모성애가 부족해서 케빈이 악마가 되었으니 에바에게 귀책이 있다고 비난합니다. 또 다른 사람들은 케빈을 사이코패스라고 명명하고 케빈에 대한 자세한 이해를 포기하고는 케빈을 절대 악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반드시 누군가에게 잘못이 있다거나 누군가가 절대 선 혹은 절대 악이라는 생각은, 사람에 대한 탐구를 시작할 때 가장 먼저 버려야 할 전제들입니다. 그런 건 애들 만화에나 등장하는 구도입니다. 게으른 이분법입니다.
우리가 영화 <케빈에 대하여>를 어렵게 생각하는 이유는, 누구도 쉽게 비난하거나 판단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제 앞의 질문을 다시 가져와 보죠. 당신은 사람(케빈)을 이해할 수 있습니까? 린 램지 감독은 스스로 이에 대한 답변을 보여줍니다. 이 답변은 사려 깊고 아름답습니다.
에바는 케빈을 찾아가 물어봅니다. 도대체 왜 그랬냐고. 케빈은 답합니다.
안다고 생각했는데 이제는 모르겠어(used to think I knew, now I’m not so sure).
그리고 무언가를 말하려고 입을 열지만, 교도관이 말합니다.
시간 다 됐습니다(Time’s up).
영화 <케빈에 대하여>가 가장 탁월한 지점은 바로 이 마지막 순간입니다. 이 마지막 대사를 위해 린 램지 감독은 케빈과 에바의 비극적인 운명의 이야기를 연출해 냈습니다(원작 소설이 있으나 저는 읽지 못했습니다). 케빈은 그냥 대충 넘어갈 수도 있었습니다. 어릴 때 그랬던 것처럼 아무 말도 안 하고 이죽거릴 수도 있었고, 에바 당신의 탓이라고 그를 비난할 수도 있었겠죠.
그러나 케빈은 이제 자신도 자기가 왜 그랬는지 알고 싶어집니다. 사람의 마음에 대한 궁금증을 가집니다. 그래서 자기 자신에게 진심 어린 질문을 합니다. 내가 도대체 왜 그랬지? 그러나 정답은 알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이런 대답이 불가피합니다. 잘 모르겠다.
케빈의 마지막 대사, ‘잘 모르겠어(I’m not so sure)’는 우리가 살면서 인간에 대한 문제들을 마주칠 때 고려해야 할 가장 윤리적인 자세입니다. 어느 한 사람을 일방적으로 비난할 수 없는 문제에 대해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게으른 대답은 그저 침묵하는 것이고, 가장 비윤리적인 대답은 나의 적이 그 비난의 대상이라고 매도하는 일입니다.
그러나 진실은 하나입니다. 누구도 쉽게 비난할 수 없다는 것. 때문에 누가 잘못했냐는 질문에 잘 모르겠다고 말할 수밖에요.
대신 이것은 거짓말이 아닙니다. 한없는 무력감을 그대로 수용하면서도 끝내 진실을 말하는 행위입니다. 진실을 말하기 때문에 무력하지만, 윤리적인 대답이 됩니다. 잘 모르겠다는 말은 해결 불가능한 인간의 문제를 대하는 첫 번째 자세이자, 가장 윤리적인 대답입니다.
이 영화가 답을 주지 않는다거나 아무런 결론도 내지 않는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오해입니다. 답을 주지 않는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정답이 없는 문제를 쫓았다고 말해야 할 것입니다. 더군다나 이 영화는 아주 명쾌한 결론을 내리고 있습니다. 우리는 인간의 사정에 대해 잘 모른다는 것. 그렇기 때문에 계속해서 이해하려고 노력해야 한다는 것.
한국어 제목이 <케빈에 대하여>로 옮겨진 것은 그래서 약간 아쉬운 일입니다. 케빈에 대한 이야기만큼이나 중요한 의미가 원제의 ‘need to talk’에 담겨있습니다. 우리는 말할 필요가 있습니다. 케빈에 대해서 그리고 인간의 마음에 대해서, 잘은 모르겠지만 그래도 우리의 무지를 인정하고 끊임없이 탐구해야 할 윤리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시간은 유한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항상 윤리적일 수는 없겠습니다. 다만 때때로 윤리적인 사건이 불가피할 뿐입니다. 인간에 대한 이해를 요구하는 상황은 삶에서 수시로 찾아옵니다. 그때마다 우리는 문제를 또렷이 응시해야 합니다. 그리고 누구도 쉽게 비난할 수 없다는 사실을 떠올려야 합니다.
만약 우리가 일일의 필요에 맞춰 윤리를 눈감는다면, 사람에 대한 이해와 탐구를 저버리거나 포기한다면, 그 사이에 우리의 시간은 Time’s up, 의미 없이 그저 지나가 버리겠지요.
원문: 디스커스의 브런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