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 <마더>(2009)에 대한 강한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살인을 이해시킨다는 것에 대해서
우리 아들은, 아니야!
혜자는 일관되게 외치지만 아무도 그를 듣지 않습니다. 그는 소시민이기 때문입니다. 임대인은 혜자를 무시하고, 경찰은 이제 사건이 종결되었다며 그를 다그칩니다. 변호사는 아예 관심도 없어요. 혜자는 그들의 아래에 있습니다. 영락없는 약자입니다. 그런데 영화의 끝, 약자인 혜자는 살인을 합니다.
이리저리 치이던 소시민이 잔혹한 살인 후 방화를 하기에 이릅니다. 봉준호 감독은 이 급작스러운 변화를 관객에게 이해시켜야 합니다. 소심한 인간과 잔인한 악마라는 두 개의 다른 모습을 동일인 안에서 끌어내야 해요. 어떻게 적절히 표현할 수 있을까요?
사이코패스 살인마가 등장하는 영화는 이런 고민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 원래부터 악마였다는 설정이기 때문입니다. 동기가 없어서 더 잔인하게 느껴지겠지만 창작자 입장에선 어찌 보면 쉽습니다. 사이코패스는 한쪽으로 치우쳐진 극단적인 인물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인지 배우들은 사이코패스를 연기하면서 전형적인 클리셰를 따르는 함정에 빠지곤 합니다. 이 역시 한쪽으로 쏠린 극단적 인물이라서 그렇습니다.
반면 <마더>의 혜자는 약자와 살인자, 양극단을 오갑니다. 봉준호 감독은 이것을 영상으로 보여주어야 합니다. 두 극단을 섬세하고 적절하게 표현하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살인’만큼 한 인간의 복잡한 내면을 드러내는 행위는 없기 때문입니다. 살인은 인간의 마음에 지옥을 만듭니다.[1]
살인이라는 내면의 지옥을 어떻게 관객에게 보여줄 것인가? 이 문제를 최초로 고민한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윌리엄 셰익스피어죠. 그의 <맥베스>를 볼까요?
스코틀랜드의 용맹스러운 장군이었던 맥베스는 전쟁에서 돌아오다가 마녀들의 예언을 듣게 됩니다. 자신이 왕이 될 것이라는 예언이었죠. 맥베스는 고민하지만, 마녀와 맥베스 부인의 회유에 넘어가 결국 던컨 왕을 살해합니다. 그리고 곧 인상적인 장면이 등장합니다.
2막 2장에서 던컨 왕을 살해한 맥베스는 자신이 저지른 일 때문에 두려워합니다. 이때 밖에서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립니다. 쾅쾅. 맥베스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울부짖습니다.
내 손이 내 두 눈을 잡아 뽑는다.
손은 그가 저지른 일이고 눈은 그의 양심입니다. 그의 양심은 뒤늦게 그가 저지른 끔찍한 일을 후회합니다. ‘문의 노크 소리’가 현실을 깨닫게 만듭니다.
“문의 노크 소리”
그리고 이런 ‘문의 노크 소리’에 특별히 주목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토머스 드 퀸시. 19세기 영국에서 활동한 문필가입니다.
그는 괴팍한 사람이었습니다. 이상한 기벽이 많았고 아편 중독자였으며 살인의 예술적 측면을 집요하게 연구했어요. 그러나 집요함 덕분인지 그는 탁월한 문예평론을 방대하게 써냈습니다. 그중 한 편, 1823년 런던 매거진에서 발행된 「맥베스의 문의 노크에 관하여(On the Knocking at the Gate in Macbeth)」는 문예비평 역사상 가장 예리하고 탁월한 글로 여겨집니다.
그 글에서, 드 퀸시는 사람의 두 본성에 관해서 설명합니다.
We were to be made to feel that the human nature, i.e., the divine nature of love and mercy, spread through the hearts of all creatures, and seldom utterly withdrawn from man was gone, vanished, extinct? and that the fiendish nature had taken its place.
우리는 인간의 본성, 즉 만물의 마음에 깃들어 있으며 인간으로부터 완전히 없어지지 않는 자비와 사랑의 신성한 본성이 마침내 사라지면서 그 자리를 악마적 본성이 대신 차지하는 것을 느끼게 된다.
‘자비와 사랑의 신성한 본성’과 ‘악마적 본성’. 처음에 맥베스는 자비와 사랑의 본성으로 대표되는 평범한 인간의 세계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그러나 마녀와 부인에게 점차 회유되고, 마침내 악마의 세계에 발을 들입니다. 그리고 던컨 왕을 살해합니다.
the knocking at the gate is heard; and it makes known audibly that the reaction has commenced: the human has made its reflux upon the fiendish; the pulses of life are beginning to beat again; and the re-establishment of the goings-on of the world in which we live, first makes us profoundly sensible of the awful parenthesis that had suspended them.
문의 노크 소리가 들린다. 반작용이 시작됨을 깨닫는다. 악마적 본성으로부터 사람의 본성이 돌아오면서, 이내 삶의 맥박이 다시 뛰기 시작한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가 다시 작동하기 시작하고, 그동안 인식하지 못했던 끔찍한 악마의 시간이 우리의 감각을 날카롭게 깨운다.
이때 문의 노크 소리가 들립니다. 노크 소리는 악마의 세계에 발을 들인 맥베스를 인간의 세계로 불러들이는 소리입니다. 맥베스는 뒤늦게 인간의 세계로 돌아옵니다. 삶의 맥박이 다시 뛰기 시작합니다. 두 세계를 넘나드는 극적인 순간을 문의 노크 소리로 표현한 것입니다.
드 퀸시는 두 가지 재밌는 예시로 이해를 돕고 있습니다. 기절한 사람이 절박한 숨을 찾으며 몸의 떨림과 함께 극적으로 되돌아오는 순간, 광장에서 마주친 장례 행렬이 죽음 같은 적막을 만들지만 이내 행렬은 지나가고 순간적으로 광장의 활력이 되찾아지는 순간. 마치 원래의 세계에서 잠시 다른 세계로 다녀온 순간 같죠. 그런 순간은 잊을 수 없는 인상을 남깁니다.
셰익스피어는 문의 노크 소리로 두 세계 사이를 건너는 극적인 순간을 표현하고 있고, 드 퀸시는 그 효과를 예민한 통찰력으로 짚어내고 있는 것입니다.
훌륭한 예술을 만드는 아주 작은 요소
그런데 봉준호 감독은 이와 같은 효과를 자신의 영화 <마더>에서 재현하고 있습니다. 혜자가 악마의 세계에 갔다가 다시 인간의 세계로 돌아오는 것을 표현하고 있어요. <마더>의 살인 장면이 인상적인 이유입니다.
웅장한 배경음악이 흐릅니다. 살인사건의 유일한 목격자는 고물상 노인이라는 사실이 밝혀집니다. 혜자는 짧은 탄식과 함께 주저앉습니다. 그리고 고물상 노인은 경찰에게 전화를 겁니다. 혜자는 홀린 듯이 주변의 스패너를 집습니다.
첫 번째 일격을 가하는 순간, 웅장했던 배경음악이 단번에 사라집니다. 이명 같은 것이 들릴 뿐이에요. 그 이명은 혜자를 인간의 세계에 붙들어 놓는 마지막 끈과 같습니다. 그러나 혜자는 악마의 세계로 발을 들입니다. 이미 쓰러진 노인을 향해 또 일격을 가합니다. 바로 그 순간, 영화의 모든 배경 사운드가 정지됩니다. 인간의 세계에서 희미하게나마 뛰던 맥박이 정지한 셈입니다.
혜자는 잔혹한 살인을 자행합니다. 지금 그는 악마의 세계 안에 있습니다. ‘우리 아들 발톱에 때만도 못한 놈’을 죽이고 나서 눈에 튄 피를 닦아냅니다. 모든 것이 정지한 순간, 그는 움직이는 것을 하나 봅니다. 흐르는 피. 그는 흐르는 것을 골똘히 바라봅니다. 그리고 깨닫습니다. 여기는 인간의 세계라는 사실을.
그는 외마디 비명을 외칩니다. 비명과 함께 도준의 모습이 인서트 됩니다. 인서트 쇼트는 도준의 비명이기도 하고 혜자의 생각이기도 합니다. 혜자는 도준이 살인을 한 후 비명을 지르는 순간을 떠올리고 있습니다. 그가 바로 살인자라는 사실을 혜자는 이제야 깨닫는 것입니다.
첫 질문을 다시 볼까요? 소심한 인간과 잔인한 악마라는 두 개의 다른 모습을 동일인 안에서 어떻게 적절히 표현해야 하는가, 셰익스피어의 전략을 따르면 됩니다. 두 개의 세계를 이행하는 것. 악마의 세계로 넘어가는 순간 사건은 더 극적으로 변모하고, 인간의 세계로 돌아오는 순간 인물은 더 비참하게 느껴집니다. 셰익스피어가 위대한 이유는 그의 유산이 아직도 현대에 전해지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봉준호 감독은 문의 노크 소리 대신 영화의 사운드를 지움으로써 혜자의 두 세계를 표현하고 있어요. 잊을 수 없는 연출입니다.
사실 우리 모두는 드 퀸시가 예시로 든 순간들을 경험한 적이 있습니다. 두 세계 사이에서 이행하는 느낌 말이죠. 무언가에 몰입하다가 문득 “어, 방금 뭔가 다른 세계인 줄 알았어.”라고 말하면서 원래의 세계로 돌아오거나, 시끄러운 곳에 슬며시 찾아온 적막에 조용해졌다가 “뭐야 갑자기 왜 이렇게 조용해?”하면서 다시 왁자지껄 해지는 순간들 말입니다.
그 순간의 느낌을 잘 간직하고 있다가 인물의 어지러운 내면을 표현하는 데 써먹은 것은 셰익스피어입니다. 그런 효과를 누구보다 예리하게 알아채고 가치를 알아준 사람은 드 퀸시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변용해 가장 필요한 순간에 적절히 이식한 것은 봉준호입니다.
셰익스피어와 드 퀸시, 그리고 봉준호는 지금 바로 여기에 이런 효과가 필요하다는 것을 직관적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런 직관은 인간의 마음에 대한 섬세함과 오랜 관찰에서 비롯됩니다. 드 퀸시는 증오, 분노, 사랑, 연민 혹은 찬양과 같은 감정으로 인물을 지켜봐야 한다고 말합니다.[2]
인물의 마음을 상상해보자는 겁니다. 살인자 내면의 지옥을 들여다보자는 거예요. 그러면 그것을 어떻게 표현해야 하는지 자연스럽게 알게 됩니다. 문의 노크 소리가 지금 이 타이밍에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게 됩니다. 지금 여기서 영화의 사운드를 없애야 한다는 생각이 들게 됩니다.
결국 좋은 희곡과 영화는 작은 차이에서 비롯됩니다. 플롯의 완성도나 카메라 워킹은 그렇게 중요한 것이 아닌 것 같습니다. 지금 여기서 들리는 노크 소리, 어떤 한순간 영화의 소리를 지우기, 이런 아주 사소한 것들이 관객을 숨죽이게 만듭니다. 그 순간을 잊을 수 없게 만드는 것이죠.
원문: 디스커스의 브런치
- [1] there must be raging some great storm of passion,—jealousy, ambition, vengeance, hatred,—which will create a hell within him. (Miscellaneous Essays, Thomas De Quincey)
- [2] Our sympathy must be with him (…) the feelings of another, whether for hatred, indignation, love, pity, or approbation. (Miscellaneous Essays, Thomas De Quince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