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시 漢詩
몇 년 전 잠시 고향에 있을 때, 아빠랑 이런저런 대화를 했습니다. 그러다 미래에 관한 이야기가 나왔어요. 저는 지금도 그렇지만 완벽주의 성향이 있어서, 당시에 스스로 계획한 10년짜리 미래 계획이 있었습니다. 그 청사진을 아빠 앞에서 당당히 읊었습니다. 일단 이건 이렇게 하고 저건 저렇게 하고 안 되면 이렇게 하고. 자세한 계획이었어요. 아빠는 말없이 듣더니 뜻대로 하라고 말씀하시면서, 한 가지만 말해줄 것이 있다고 뜬금 옛날이야기를 합니다.
아빠가 대학 다니던 시절입니다. 하루는 어떤 선배 집에 놀러 갔답니다. 근데 그 선배가 아빠를 보고 잠깐 해줄 말이 있다더니 한시(漢詩)를 하나 써주더랍니다. 지금도 누가 한시를 써주면 생소한데 당시에도 아빠는 좀 놀랐다고 그래요. 그래서인지 그 내용을 아직까지 기억하고 있다고 하더라고요. 그리고 그게 인생을 살면서 정말 많은 도움이 되었다고 합니다. 짧은 한시입니다.
我今不備生
生中我眞走。나는 지금 인생을 준비하는 것이 아니라
삶 가운데서 진실로 달리고 있을 뿐이다.
처음엔 이해가 잘 안 됐습니다. 계획을 세우는 게 잘못이라는 말을 하는 건가? 아니 기껏 계획을 세웠더니 인생은 준비하는 게 아니라니. 왜 그런 이야기도 있잖아요. 그냥 산 사람들보다 계획을 세우고 그걸 노트에다 적었던 사람들이 더 성공한 인생을 살았다는 이야기요.
물론 계획을 세우면서 좀 찝찝한 기분은 있었습니다. 너무 긴 계획을 세우다 보니 거의 소설이 되어버린 느낌이 있었어요. 일단 이것부터 하면 그다음에 이렇게 될 확률이 높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다음 계획은 이것이다… 이런 식으로요. 그런데 좀 허황되면 어때요. 계획을 세웠다는 건 미래에 대한 준비성이 철저하다는 거니까 저는 나름대로 괜찮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그 후 계획을 실행하면서 저는 매 순간 절망했습니다. 뜻대로 되는 게 하나도 없었거든요. 저는 치밀하게 계획을 세우고 빈틈없이 실천하려고 했어요. 그러나 지금 돌아보면 그 계획대로 이루어진 것은 거의 아무것도 없습니다. 계획대로 했음에도 그랬습니다. 늘 예상치 못한 문제가 발생했기 때문에 계획을 계속 수정해야 했어요.
계획이 뜻대로 되지 않을 때마다 자존감이 바닥을 치면서 스스로를 탓했습니다. 모자란 놈. 쓰레기 같은 놈. 이것밖에 안 되는 놈. 그리고 그다음 계획을 다시 세웠습니다. 그것도 마음대로 되지는 않았어요. 나름의 합리성으로 매번 계획을 세우면서 순간순간을 대처했어도, 뒤돌아보면 저는 항상 다른 곳에 서 있었습니다.
어디선가 들었던 말이 자연스럽게 떠오를 수밖에 없었어요. 우리가 사는 모습은 기차를 타고 있는 것과 비슷해서 객실의 입장에선 앞을 향해 똑바로 가는 것 같지만, 기차의 입장에서는 구불구불한 길을 달리고 있다는 말. 저는 객실 안에서 발버둥 쳤지만, 미래는 기차의 뜻대로 가더군요.
블랙 스완 이론
나심 탈레브는 현재 가장 주목받는 사상가 중 한 명입니다. 그의 책 『블랙 스완』을 보면 흑조 이론이 소개됩니다. 18세기 말, 유럽인들은 오스트레일리아 대륙으로 이주하기 시작합니다. 그때 검은 백조를 발견해요. 검은 백조의 발견은 ‘백조는 흰색’이라는 경험을 완전히 무너뜨립니다. 예기치 못한 발견이 과거의 경험과 규칙을 깨뜨린 것이죠.
탈레브는 백조로 은유하는 평범의 세계가 있고, 그곳에서는 경험 법칙과 인과 관계가 잘 성립된다고 말합니다. 한편 흑조로 은유하는 극단의 세계도 있는데, 예상치 못한 극단적인 일들이 발생하여 인과 관계가 통하지 않는 곳이라고 해요. 우리는 우리가 사는 세상을 백조의 세계라고 착각하는 경향이 있다고 탈레브는 말합니다. 오히려 진짜 실존하는 세계는 흑조의 세계에 가깝고 우리는 흑조의 존재를 과소평가한다고 이야기하죠.
그래서 탈레브는 장기(長期)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해요. 장기적으로 원인과 결과를 따져가면서 예측할 수 있는 건 백조의 세계에서나 가능하다는 것이죠. 장기 이전에 반드시 무슨 일이든 발생하기 마련이고, 우리가 생각하고 있었던 장기의 모습은 결국 변하게 됩니다.
저는 계획한 만큼 미래를 통제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백조의 세계를 가정하고 있었어요. 최소한 내가 백조의 마음가짐으로 임한다면 세상도 어느 정도는 백조의 결과물을 주리라 낙관했습니다. 그런데 세상은 흑조의 세계였습니다. 몰랐던 무언가가 몰랐던 때 등장합니다. 그동안 제가 세워왔던 모래성 같은 계획들을 단번에 쓸어가는 쓰나미가 등장합니다.
제가 깨달은 것은, 계획을 세우는 것과 미래를 통제하는 것은 아무런 관련이 없다는 사실입니다. 계획을 세우는 것은 기차의 시간표를 스스로 만드는 일과 같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기차에 올라타도 기차는 기차의 뜻대로 가지 내 뜻대로 가지는 않습니다. 백조의 세계가 있고 흑조의 세계가 있는 것처럼, 객실의 세계가 있고 기차의 세계가 있습니다.
오히려, 계획을 자세히 세울수록 미래는 더 통제되지 않을 확률이 높습니다. 완벽한 계획을 세우려는 사람은 미래를 통제하고자 하는 바람이 크기 마련입니다. 바람이 크면 실망도 큽니다. 자기 뜻대로 되지 않는 것이 많을수록 거기서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습니다. 스트레스가 쌓이면 판단이 흐려지고 생각이 짧아집니다. 상황에 현명하게 대처하지 못할 확률이 커집니다.
계획을 세우는 것 자체는 별다른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다만 계획대로 될 것이라는 믿음은 문제가 됩니다. 이건 주술사가 두려워하는 것을 종이에 적어놓고 그것이 사라지기를 바라는 믿음과 같습니다. 계획을 세우는 일에 함정이 발생하고 맙니다.
기차를 놓친 후의 태도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모든 계획을 폐기해야 할까요?
장기가 없다면 단기는 있습니다. 계획에 함정이 있다면 계획이 필요 없는 지금, 이 순간에는 함정이 없습니다. 10년 치 계획을 세우던 당시의 심정을 사실대로 말하자면, 저는 계획을 세우면서 스스로 안도하고 있었어요. 불확실한 미래를 노트 위에 가지런히 정리한 뒤 불안한 마음을 달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계획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모두 ‘만약’에 기초하고 있었어요.
일단 이것부터 하면 다음엔 이렇게 될 것이다. 만약의 연결고리로 묶여 있었습니다. 그러니 하나가 안되면 다음도 모조리 무너지는 것이죠. 그렇게 만들어진 상상의 모래성을 저보다 30년은 더 인생 경험이 많은 어른에게 보여줬으니. 아마도 아빠는 불안한 저의 모습을 발견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점잖은 방식으로 저에게 돌려 말하는 조언을 하셨던 것 같습니다.
같은 책에 등장하는 일화가 있습니다. 탈레브와 친구는 기차를 타려고 플랫폼으로 걸어갑니다. 그런데 기차가 막 떠나려고 합니다. 탈레브는 뛰어가서 기차를 잡으려고 하는데 친구는 느긋합니다. 탈레브가 물어봅니다. 안 뛰어? 친구가 그럽니다.
나는 기차를 타겠다고 뛰지는 않아.
그 순간 그가 깨닫는 것은 통제할 수 없는 것을 수용하는 태도입니다. 놓친 기차가 아쉬운 것은 애써 쫓아가려 했기 때문이라는 거예요. 내가 자세한 계획을 세우고 거기에 내 삶을 끼워 맞추려고 하다 보면 반드시 어긋나기 마련입니다. 그러면 금방 불안해져서 계획을 위한 계획을 세우고는 가짜 안도를 삼킵니다. 그러나 이내 다시 계획은 어긋나고 또 불안해집니다.
하지만 기차를 놓쳐도 애타지 않으면 새로운 계획에 금방 적응할 수 있습니다. 혹은 처음부터 계획을 세우지 않아도 불안하지 않습니다. 삶은 계획을 세우고 그것을 이루고 다시 계획을 세우는, 계단식으로 진행되는 게 아닌 것 같습니다. 삶은 연속되어 있습니다. 바닥이 투명한 냇가 위에서 돌다리를 건너는 것이 아니라, 너무 깊어 보이지 않는 바다 위에서 헤엄치는 것입니다. 보폭에 맞게 놓인 돌다리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헤엄에 헐떡이는 숨이 현존할 뿐입니다. 삶 가운데서 진실로 달리고 있을 뿐입니다.
계획은 세워봤자 무용지물이다. 이런 이야기는 아닙니다. 미래는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니 구태여 그 무계획성을 이겨내려 애쓰지 않아도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세상이 내 마음대로 안 된다고 모자란 놈, 쓸모없는 놈이라고 자신을 탓하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지금 이 글은 옛날의 저에게 쓰는 글이기도 합니다.
변하지 않는 사람은 없습니다. 우리는 변해요. 그러니 우리의 미래도 변합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은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는 것입니다. 예전의 저는 스스로 만든 기차의 시간표를 따라가지 못해서 공연히 자신을 탓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계획을 세우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현재의 불안과 대면하는 일입니다. 미래의 무계획성 그 자체를 받아들이는 일입니다. 기차를 놓쳐도 동요하지 않고, 다음 기차를 기다리는 일입니다.
원문: Discus의 브런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