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월, 자이언티(Zion.T)의 새 앨범 〈ZZZ〉를 뒤늦게 찾아 들었습니다. 제 취향인 노래도, 아닌 노래도 있었어요. 그러다 〈잠꼬대〉를 들었습니다. 듣자마자 이건 자이언티만이 쓸 수 있는 가사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TV를 켠 채로 잠이 들었지
큰 소파에 푹 파묻혀서
리모컨을 툭 떨어트리고도 못 깨어나
Swimming 이렇게 속삭이지아오아 아오우 야아
아오아 아오우 야아
아오아 아오우 야아
우우아 아우우차라리 이대로 떠나면 좋겠지
관에 들어가면 이런 기분일까
내 주머니를 잘도 뒤졌지
새꺄 난 잠귀가 밝아아오아 아오우 야아
아오아 아오우 야아
아오아 아오우 야아
우우아 아우우
뭐 더 볼 필요도 없을 정도로 간단한 내용의 가사입니다. 소파에서 잠을 자는 게 전부. 코러스는 잠꼬대를 표현했습니다. 아오아 아오우. 이렇게 힘을 빼서 가사를 쓸 수도 있군요. 이렇게 힘을 뺄 수도 있잖아. 이렇게 대충해도 재밌잖아. 이렇게 말하는 것이 가벼운 예술의 미덕입니다. 자이언티의 가사는 대개 이렇습니다.
왜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싶죠
[…]
시끄럽죠
다 성가시죠
〈꺼내먹어요〉의 가사입니다. 그냥 냉장고에서 사과를 꺼내 먹듯 음악을 즐기는 태도. 자이언티는 흐느적거리며 무대에서 그루브를 타면서 우리에게 힘을 빼자고 제안합니다. 지금 한국의 어떤 뮤지션이 고작 잠꼬대하는 걸 소재로 삼아서 가사를 쓸 수 있을까요. 자이언티는 가벼운 예술의 미덕을 아는 뮤지션인 것 같습니다.
그런데 저는 가벼운 예술을 대하는 일부 전문가들의 태도에 약간의 불만을 품고 있습니다. 오래전 일본의 문학평론가 가라타니 고진은 근대문학의 종언을 선언했습니다. 그리고 문학은 이제 가치 없는 오락으로 전락했다고 말했습니다. 이 주장엔 가치 없는 오락은 문학이 아니라는 생각이 전제되어 있어요.
그에 따르면 근대문학은 국가에 맞서 정치적, 윤리적인 과업을 수행할 때 가치 있습니다. 쉽게 말하자면 사람들에게 생각할 거리를 던져주는 문학, 삶을 되돌아보게 만드는 문학, 무거운 문학만이 가치 있다는 것이죠. 가벼운 문학은 단순한 오락거리일 뿐이고, 그런 오락거리는 문학이 될 수 없다는 거예요.
이때 가라타니가 말하는 문학은 소설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소설 말고도, 이따금 저는 주변에서 다양하게 변주된 가라타니의 주장을 발견하곤 합니다. 예를 들어 가라타니의 영화 버전은 이렇습니다. 최근에 지인과 영화 이야기를 했습니다. 좋아하는 영화감독이 있냐고 물어보자 지인이 대답합니다.
저는 예술영화 타입이 아니라서요. 가벼운 거 좋아해요. 가이 리치 감독이나, 한국으로 치면 최동훈 감독이요.
순간 저는 부정하고 싶었어요. 가벼운 영화는 예술영화가 아니라는 지인의 정의. 생각할 거리를 던져주지 않는 오락거리는 문학이 아니라는 생각. 저는 이런 생각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가이 리치와 최동훈 감독의 영화도 충분히 독자적인 예술성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해요.
그러나 예술영화에 대한 당신의 정의는 잘못되었다는 식으로 말하는 건 너무 건방진 태도인 것 같아 그냥 관두었습니다. 그리고 이내 안타까워졌어요. 예술이 고고하고 무거우면서 범접하기 힘든 무언가로 여겨지고 있다는 생각에요.
무거운 예술도 있고 가벼운 예술도 있습니다. 진지하고 과묵해서 기품 있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발랄하고 통통 튀어서 매력적인 사람이 있죠. 예술성도 마찬가지인 것 같아요. 다양한 무게의 예술성이 존재합니다. 진중한 예술이 있는가 하면 낄낄대는 예술도 있습니다. 진심을 다하는 문학이 있고 가볍게 전달하는 문학이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요컨대 작품의 무게는 예술성을 결정하는 요인이 아닙니다. 무거운 예술이 어떤 역할을 맡았던 시대가 있었습니다. 외세의 간섭에 저항하고 국가의 폭력에 대항했던 시대, 민족의 정신을 품고 그 생명력을 전달했던 예술이 있었어요. 그렇다면 지금은 어떤 시대인가요. 꼰대라는 단어가 생기고 설명충, 진지충이라는 단어가 통용되는 시대입니다. 파편화되고 개인화된 시대예요.
그렇다면 예술성을 결정하는 요인은 무엇일까요. 20세기 초, 그런 요인 같은 건 없다고 주장한 사람이 있습니다. 마르셸 뒤샹은 프랑스의 예술가로 개념미술의 아버지로 불립니다. 개념미술은 그저 예술가가 예술이라고 선언한 것이면 무엇이든 예술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을 바탕으로 합니다. 전통적인 예술의 입장에서 보면 어떤 건 도저히 예술이 아닙니다.
그런데 그런 것도 예술이야, 뒤샹은 그냥 쉽게 정의해버리는 것이죠. 1917년, 뒤샹은 공장에서 생산된 평범한 소변기를 뉴욕 아모리 쇼에 내놓고 〈샘>이라고 이름 붙입니다. 뒤샹은 소변기가 샘이 될 수 있듯이, 아무 의미 없다고 생각하는 것에도 우리가 정의함에 따라 그것이 바로 예술이 될 수 있다는 점을 지적합니다.
말하자면 정의의 덧없음, 정의란 것이 이렇게 가변적이라는 사실을 폭로하고 있는 것이죠. 이제 예술은 스스로의 울타리를 먹어치우고 세상 온갖 것으로 퍼져나가게 되었습니다. 예술이라고 정의된 범위를 벗어나는 것도 예술이라고 말할 수 있게 되었어요.
저는 현대의 삶에서 정의가 흔들리는 시대, 의미가 버거워진 시대를 봅니다. 이런 시대에 생산된 가벼운 예술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나요? 예술이란 원래 그런 것이 아니야, 라고 말할 순 없습니다. 스스로의 울타리를 벗어나는 것 또한 예술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문학이 가치 없는 오락으로 전락했다는 가라타니의 말은 잘못된 것인지도 모릅니다. 전락이라는 단어는 내리막길을 떠올립니다. 문학이 높은 곳에 있고 오락은 낮은 곳에 있다는 인상을 심어줘요. 그러나 예술은 넓은 평지에 서 있는 울타리를 반복해서 벗어날 뿐, 그곳엔 높고 낮음이 없습니다. 새로운 시대의 새로운 사람들에 의해 새로운 예술이 끝없이 태어날 뿐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뒤샹의 소변기가 예술이 될 수 있었듯이 자이언티의 가사도 예술이 될 수 있습니다. 이렇게 가볍게 쓸 수도 있다. 아무 의미 없는 잠꼬대도 가사가 될 수 있다. 바로 이런 가벼움과 무의미가 현대의 예술성이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사실 예술은 애초부터 욕구에서 출발했습니다. 그래서 인간의 욕구가 다양한 만큼 예술도 다양합니다. 예술을 통해 삶의 진실을 드러내려는 욕구는 물론 존재합니다. 그러나 진실같이 무거운 단어에 관심을 두지 않고 그냥 생각을 비우고 싶은 욕구도 있습니다.
삶에 대한 진지한 탐구가 힘을 잃은 지금, 가벼워지려는 욕구가 선호 받고 있습니다. 진지함을 멀리하고 가벼움을 선호하는 시대, 그런 시대의 가벼워지려는 욕구를 충분히 무겁지 않다고 거부하는 일은 예술의 또 다른 한 면을 무시하는 일인지도 모릅니다.
선호 받는 것이 예술이라는 말은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는 어째선지 선호 받지 않는 것을 예술이라고 여기는 경향이 있는 것 같습니다. 예술은 대중의 선호와 관계없는 것이지만 인간의 마음과는 관계합니다. 가벼운 오락거리에 대한 자연스러운 욕구를 비예술로 치부하는 건 근시안적인 태도입니다.
무엇이든 예술이 될 수 있습니다. 뒤샹의 샘이 그랬듯이, 이런 것도 예술이라고 말할 수 있는 파격이 예술의 본질입니다. 정의의 전복이 예술이에요. 무게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이런 것도 가사다. 이렇게 말할 수 있으면 그건 예술이 됩니다. 파격과 전복을 보여줄 수 있으면 그건 예술이 될 수 있어요. 가벼운 예술의 시대. 자이언티는 지루한 가사를 쓰지 않습니다. 그런 시대는 이미 지났기 때문입니다.
원문: Discus의 브런치